Melbourne in '샤인 SHINE'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멈추지 말고 갈아갈 것!

2019. 3. 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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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그 동남쪽 빅토리아주의 멜버른. 멜버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꼽을 때 항상 상위권에 오르는 아름다운 도시다. 호주 전체 인구의 약 20%인 500만여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는 ‘정원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자연 친화적이다. 호주는 이민자들이 건설한 국가다. 이 수많은 이민자들 속에 영화 ‘샤인’의 주인공 데이비드 헬프갓의 아버지 피터 헬프갓도 있었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나치의 학살에 가족을 잃은 피터는 호주로 건너와 멜버른에 정착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847년 아들 데이비드 헬프갓을 낳았다.

▶멜버른, 금과 전쟁이 낳은 도시

가끔 TV 예능에서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맞히는 퀴즈가 나온다. 그때마다 예능감 뛰어난 출연진의 ‘재치’로 웃음을 선사하는 ‘단골 국가’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리아다. 두 나라를 같은 나라로, 혹은 두 나라의 위치가 모두 유럽이라는 ‘오답’은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우리는 호주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섬이 아니다. 대륙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는 러시아로 약 1700만㎢, 2위가 캐나다 998만㎢, 그 다음 순으로 미국 982만㎢, 중국 960만㎢, 브라질 850만㎢이다. 호주는 775만㎢으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다. 실감나지 않는다고? 한반도 면적의 약 28배고 대한민국의 77배에 달하는 대륙이다. 이 호주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다. 역사학자들은 약 3~5만 년 전에 호주 원주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호주가 세계사적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때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대항해, 식민지 쟁탈 경쟁에 돌입한 시기다.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에 상륙하면서 호주는 유럽에 알려졌다. 당연히 제임스 쿡의 항해 비용을 부담한 영국은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물론 호주 대륙은 그 전에도 몇몇 모험가에게 상륙을 허락했지만 본격적인 ‘침략’으로서의 유럽인 진출은 1770년대로 본다. 그리고 1788년 뉴사우스웨일스의 식민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한 아서 필립이 11척의 선단을 이끌고 호주에 상륙했다. 그때 이 땅에 들어온 이들의 대부분은 선원과 영국에서 쫓겨난 범죄자들이었다. 그때부터가 호주 근현대사의 시작인 것이다. 당시 호주 대륙의 ‘원주인’이던 원주민의 숫자는 30~80만 명 선. 이들은 이주민들에게 쫓겨 척박한 서부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유럽인이 갖고 온 바이러스 감염, 학살 등으로 급격히 그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호주에 뿌리를 내린 영국계 이민자들은 계속 이동했다. 남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여러 원주민 부족의 집합체인 ‘쿨린의 땅’이던 지금의 멜버른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근사하게 영어 이름을 지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버른 경의 이름을 하사 받아 이 지역이 ‘멜버른’이 된 것이다. 이때가 1837년이다.

그저 그런 도시 멜버른에 하늘의 선물이 주어졌다. 바로 1850년 빅토리아주 한복판에서 발견된 금이다. 이른바 ‘호주판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멜버른은 급격하게 세를 불렸다. 당시 멜버른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사람도, 도시도 그리고 건축물마저. 멜버른은 부를 이용해 ‘런던’을 옮겨 왔다.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 양식이 멜버른 시내를 가득 채웠다. 멜버른 시내의 명물인 세인트 폴 대성당도 그때 건축된 것이다. 멜버른은 ‘남반구의 런던’으로 불리며 대영 제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이때가 멜버른 제1의 전성기다. 그러나 자원은 유한한 것. 금은 곧 바닥이 났다. 1901년 호주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고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했을 때도 호주의 수도는 멜버른이었다. 그 무렵 호주의 신흥 강자 시드니가 급부상했다. 1927년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로 제정되었다. 전통 강호 멜버른과 신예 시드니가 서로 수도를 차지하겠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툼을 하자 그 대안으로 제3의 도시가 수도가 된 것이다.

멜버른이 도시로서 또 한 번 확장한 것은 전쟁 당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유럽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호주로 왔다. 대부분이 영국과 아일랜드계였지만 동유럽과 특히 그리스계 이민자 수십만 명이 멜버른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멜버른에 정착한 그리스계 이민자 수는 약 15만 명으로 그리스 본토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그리스계가 거주하는 곳이 멜버른이 되었다. 광활한 호주 대륙 동남쪽에 있는 빅토리아주의 주도인 멜버른은 호주에서 시드니 다음으로 큰 도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주의 도시는 이 두 도시 외에 수도인 캔버라, 서부의 대도시 퍼스 정도일 것이다. 멜버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꼽을 때 항상 상위권에 오르는 아름다운 도시다. 호주 전체 인구의 약 20%인 500만여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는 ‘정원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자연 친화적이다. 호주 사람들은 멜버른 시민들을 ‘멜버니안’이라고 부른다.

영화 ‘샤인’의 주인공 데이비드 헬프갓의 아버지 피터 헬프갓은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나치의 학살에 가족을 잃은 피터는 호주로 건너와 멜버른에 정착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847년 데이비드 헬프갓을 낳았다. 데이비드는 타고난 음악 천재였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그는 신동 소리를 들으며 실력을 키웠지만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아버지 피터의 강압적인 교육은 헬프갓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결국 헬프갓은 피아노 앞에서 쓰러졌다. 헬프갓에게 아름다운 도시 멜버른은 그저 태어난 곳이라는 것 외에는 아픈 기억의 도시가 된 셈이다. 물론 그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독선에 아픈 피아노 천재

호주의 작은 도시, 비가 내리는 밤. 남루한 차림의 한 남자가 카페에 들어온다.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비를 맞은 초라한 차림의 남자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지만 이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남자는 이끌리듯 카페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제야 카페 안 사람들은 그를 쳐다본다. 피아노를 쓰다듬던 그는 건반에 손을 올려놓는다. 사람들의 눈에는 의심이, 입에는 비웃음이 가득하다. 심지어 야유까지 터져 나온다. “피아노를 연주하시려고? 하하하.” 이윽고 남자의 손이 피아노 건반 위를 춤추기 시작한다. 정제되고 간결하지만 화려한 기교를 품은 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진다. 카페는 순간 정적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 집중한다. 피아노 연주가 어느 순간 끝났다. 카페의 모든 사람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입을 다물고 그 남자를 쳐다본다. 그리고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남루한 차림에 두꺼운 안경을 쓴 이 남자는 데이비드 헬프갓(제프리 러시, 청년 시절 노아 테일러)이다. 그는 한때 천재 소리를 들었던 피아니스트. 정신 병원에 입원한 지 12년 만에 세상에 나와 첫 피아노 연주를 한 것이다. 시간은 데이비드 헬프갓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호주 멜버른. 데이비드 헬프갓은 제2차 세계 대전이 갓 끝난 1947년 태어났다. 아버지 피터 헬프갓(아르민 뮐러 슈탈)은 유럽 폴란드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유대인이다. 피터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의 학살을 직접 겪었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 부모와 형제들이 가스실에서 처형당한 것을 목격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그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곳 호주로 왔다. 피터는 항상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가족과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수용소에서 밖으로 나간 가족, 그는 잠시의 이별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별 즉 죽음이었다. 그때부터 피터는 가족 누구도 이 집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특히 외아들인 데이비드가 잠시라도 자신의 눈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지 못한다. 강박증이다. 피터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연주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꿈을 접었다. 피터는 어린 데이비드에게서 음악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피터는 네 살의 데이비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자신의 꿈을 대신하게 한다. 엄격하고 독선적인 피터는 데이비드에게 성공과 재능을 강요한다. 소심하지만 착한 데이비드는 하루를 온통 피아노 앞에서 보낸다. 연주회를 나가고, 경연 대회를 나간다. 하지만 매번 1등을 할 수는 없다. 데이비드가 1등을 놓치면 피터는 노골적으로 데이비드에게 독설을 하고 더욱 강한 채찍을 든다. “데이비드, 이겨야 해. 1등을 해야 해. 강자만 세상에 살아남고 약자는 벌레처럼 짓밟히는 거야.” 데이비드의 작은 실수도 아버지 피터는 용납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그런 아버지가 두렵기만 하다. 데이비드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아버지의 꿈은 거의 집착이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비싼 레슨을 받을 수 없지만 피터는 호주에 있는 유대인 사회의 도움을 얻어 가면서 데이비드를 가르친다. 어린 데이비드에게는 이 또한 부담이다. 그 무렵 데이비드에게 친구(?)가 생긴다. 바로 캐서린 수재나 프리처드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류 작가다.
캐서린은 데이비드와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데이비드를 격려한다. 캐서린 역시 데이비드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호주가 아닌 미국이나 영국 유학을 권한다. 캐서린의 주선으로 데이비드는 당시 세계적인 음악가 아이작 스턴을 만난다. 그는 데이비드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한다. 얼마 후 미국에서 편지가 도착한다. 음악 학교의 입학 허가서다. 하지만 피터는 꿈에 부푼 데이비드 앞에서 그 허가서를 찢어 버린다. 피터는 데이비드가 피아니스트로 대성하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 떠나는 것이 몹시 두렵다. 그에게 이별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행동과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캐서린은 방황하는 데이비드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 데이비드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이번에는 영국 런던 왕립음악대학에서 입학 허가서가 왔다. 데이비드가 아버지 몰래 입학 지원서를 낸 것이다. 데이비드는 캐서린의 조언을 받는다. “데이비드,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 이번에도 역시 아버지는 반대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반대를 정면에서 반박한다.

드디어 데이비드는 영국 유학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와 이별한다.“데이비드, 정말 가족을 버리고 가려는 거냐. 가지 마라. 지금 가면 다시는 못 볼 것이다. 데이비드, 이 세상에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단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떠난다. 데이비드에게는 피아노를 더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두렵고 독선적인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그는 해방감을,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강박과 죄책감에 미쳐버린 천재

런던 왕립음악대학. 데이비드는 이곳에서 사고로 팔을 다친 일명 ‘외팔이 선생’ 세실 팍스에게 피아노를 배운다. 세실 교수의 지도는 제대로 체계적인 피아노 교습을 받지 못했던 데이비드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세실 교수는 데이비드에게서 천재성을 넘어 광기를 발견한다. “데이비드, 악보를 일단 외우고 잊어버려야 돼. 정확한 음정을 손에 익힌 다음 머릿속에서 악보를 지워 버려. 가슴에서 악보가 우러나와야 해. 데이비드,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연주하게.” 왕립음악학교 옆에는 로열 앨버트 홀이 있다. 데이비드는 이곳을 보며 ‘언젠가 이곳에서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데 그 상상이 현실로 다가왔다. 로열 앨버트 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위한 연주자 선발 오디션이 열리게 된 것. 데이비드는 오디션 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준비한다. 이 곡은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악마의 곡’으로 불리는, 그래서 ‘코끼리를 위해 준비한 곡’이라는 말을 듣는 어려운 곡이다. 신체적 조건, 체력, 테크닉, 감정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완벽한 연주가 가능한 것이다. 세실 교수는 데이비드를 걱정한다.

“데이비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곡을 준비해?”

“교수님, 저는 충분히 미쳤어요. 보시기에 제가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데이비드, 피아노를 사랑하도록 해 봐. 피아노를 길들여. 아니면 피아노는 괴물로 변해버리지. 피아노를 길들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네가 피아노에 리드 당하게 돼.”

연주회 날. 데이비드는 피아노에 앉아 숨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한다. 서정적이고 달콤한 멜로디로 시작한 곡은 걷잡을 수 없는 격정과 폭풍 같은 음을 객석에 공급한다. 마치 숨이 끊어질 듯 멈춤 없는 연주가 계속되다 한순간 차가운 얼음 같은 끝맺음으로 연주가 마무리된다. 데이비드는 연주를 끝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부모를 떠나왔다는 죄책감,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항상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것이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며 폭발한 것이다. 데이비드는 정신 분열증에 걸린다. 그리고 호주로 돌아온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데이비드는 정신 병원에 입원한 환자일 뿐이다. 한때 촉망받던 피아노의 천재는 먼 과거의 이야기다. 그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무려 12년을 병원에서 보낸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데이비드는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한다. 손님들은 데이비드의 연주 솜씨에 탄복하고 데이비드는 카페의 명물이 된다. 피터는 한 천재적인 연주자가 카페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그가 아들 데이비드라는 것을 직감한다. 연주하는 데이비드를 보는 피터.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 자신이 가르치던, 어린 시절의 데이비드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때 데이비드는 15살 연상의 질리언(린 레드그레이브)을 만난다. 데이비드는 질리언의 헌신적인 애정과 도움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질리언은 천천히 데이비드의 재기를 돕는다. 두 사람은 결혼한다.

1984년, 데이비드는 카페 연주자 생활을 청산하고 그 옛날 각광받던 피아니스트로 돌아온다. 데이비드는 정식 콘서트를 연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만의 연주를 한다. 그의 연주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사랑, 헌신, 노력, 고통, 인내, 그리고 아버지. 데이비드는 재기에 성공한다. 데이비드와 질리언은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다. 그곳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재기를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제는 죄책감도, 강박감도 모두 내려놓는다. 데이비드와 질리언은 천천히 걸으면서 대화를 한다. “자신을 탓하면 안 돼. 아버지는 안 계시니까. 아버지도 비난하면 안 돼.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도 멈추지 말고 살아가야 해. 그러니 포기하면 안 돼. 중요한 건 인생은 멈춰 있는 게 아니란 거야. 모든 건 다 때가 있어. 항상 이유도 있고. 우린 순간에 맞는 이유를 찾아야 해. 영원한 건 없으니까.”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

호주 출신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를 다룬 영화 ‘샤인’은 그해 호주 아카데미를 휩쓸었고 골든 글로브에서도 5개 부분을 수상했으며 데이비드를 연기한 제프리 러시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1947년생으로 올해 72세인 데이비드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지만 강박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20대를 정신 병원을 드나들며 보내다 1984년 재기에 성공한 피아니스트다. 영화 속 아내 질리언 역시 실제 인물이다. 재기 이후 데이비드 헬프갓은 미국에 정착해 세계를 다니며 연주회를 하는 중이며, 한국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그의 일생은 천재, 완고한 부모, 정신병 그리고 아름다운 재기 등으로 채워져, 무척 드라마틱하다. 굴곡진 개인의 삶이 그의 재능을 훨씬 돋보이게 했다는 평도 있다.그가 실제로는 천재급 연주자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이 겪은 고통과 그 고통을 많은 노력, 사랑 그리고 시간으로 치유한 ‘한 인간의 재탄생기’는 분명 보통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의 무대 멜버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많은 이주민이 정착한 곳이다. 거의 영국 계통의 앵글로색슨족이 이민자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동유럽계와 남유럽계도 다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데이비드의 아버지 피터인 셈이다. 영화는 한 사람의 자전적 스토리와 함께 그와 떨어질 수 없는 음악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음악적 키워드는 단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영화에서 데이비드를 광기로 몰고 간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다. 클래식 문외한도 라흐마니노프라는 이름은 귀에 익숙할 것이다. 그만큼 음악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긴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파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피아노 솜씨와 작곡 실력도 있지만 의외로 신체적 특성도 한몫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큰 손을 신에게서 선사 받았다. 피아니스트에게 큰 손과 긴 손가락은 ‘신이 준 축복’이다. 음악계에서는 ‘라흐마니노프가 한 손으로 도에서 다음 옥타브의 라까지 장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라흐마니노프가 단순히 손이 커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아홉 살부터 연주를 시작했고 이미 10대 때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당대의 거장 차이콥스키 등에게서 극찬을 들으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물론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들은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았다. 일테면 ‘교향곡 제1번’은 평단과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이 실패를 딛고 쓴 1901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다양한 작품 활동과 연주회를 가졌다. 특히 1908년 미국으로 가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며 드디어 1909년 문제의 곡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완성했다. 러시아 붉은 혁명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지주 집안 출신. 혁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그는 북유럽으로 망명을 떠나 스웨덴, 핀란드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8년 미국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이후 많은 연주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남겼지만 러시아를 떠난 뒤 그의 작품 활동은 초기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다. 항상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했던 그는 1943년 3월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했다. 음악계에서는 라흐마니노프를 이탈리아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페르초 부소니, 폴란드 출신으로 쇼팽 연주의 달인이라 불리는 요제프 호프만과 함께 20세기 낭만파 음악의 마지막 세대라 부른다.

▶피아니스트들의 무덤,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중 제2번과 제3번은 피아니스트들에게 도전 정신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 주는 작품이다. 특히 제3번은 옥타브를 넘나드는 음계의 파괴, 단 한 음의 단절도 용납지 않는 겹침이 거듭되는 음의 연속성,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지만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소리를 뚫고 나와 오히려 수십 개의 다른 악기가 내는 소리를 압도해 내야 하는 피아노 독주의 무게감 등 그야말로 피아니스트들에게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피아니스트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제3번을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호프만에게 헌정했는데 호프만이 “이 곡은 내 능력 밖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1909년 뉴욕에서 발터 담로쉬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와 공연했고 이후 구스타프 말러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후 이 곡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도전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감탄을 받은 인물은 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다. 1928년 호로비츠는 이 곡을 연주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은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라며 호로비츠를 극찬하고 이후 그와의 교류를 계속했다. 이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음반이 있다. 이 음반과 함께 음악계에서는 호로비츠의 1951년도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하는 RCA 빅터 심포니오케스트라, 1978년 유진 오르먼디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녹음반을 라흐마니노프를 가장 잘 표현한 음반으로 손꼽는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포토파크, Daum 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9호 (19.03.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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