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귀여운 꼬마들의 안부를 물어달라

2019. 3. 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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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퐁니 생존자 단체사진 속 9명을 추적하다 생긴 일

다낭박물관은 다낭시 쩐푸 거리에 있다. 1989년 레주언 거리에 건립된 뒤 2011년 이곳으로 확장·이전했다. 현재 다낭과 꽝남의 문화유산, 전쟁 유물 등 2500건의 볼거리를 전시한다. 이중 베트남전 기록물은 1975년 미군 철수 뒤 다낭시가 미국 총영사관을 접수해 미군 전쟁범죄 전시관으로 운영할 때부터 소장해왔다. 1989년 전시관이 해체된 뒤 다낭 박물관으로 이관해왔다.

이채롭게도 다낭박물관의 최대 방문자는 한국인이다. 2010년 이후 다낭 직항 노선이 개설되고 한국 관광객이 급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낭박물관장 후인딘꾸억티옌(43)은 “한 해 방문객 27만여 명 중 한국인이 45%”라고 말했다. 거의 2명 중 1명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올해 말부터 한국어 안내문과 오디오 가이드북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제4화는 다낭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한 장에 관한 이야기다.

다낭박물관 2층에 전시돼 있는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의 모습. 생존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흔치 않은 사진이다.

다낭박물관에서 그 사진을 처음 본 때는 2017년 2월이었다.

2층 베트남 전쟁범죄 코너에서였다. 손으로 밀면 천천히 돌아가는, 세로로 긴 전시판 아래쪽에 다른 사진들과 함께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에 9명의 인물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긴 수염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 머리에 수건을 쓴 할머니, 중년, 청년, 사내아이가 골고루 섞였다. 나무가 무성한 숲이 배경인데 언뜻 보면 산 같기도 하다. 설명문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베트남어와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68년 1월(음력) 미군과 남한군에게 127명이 희생된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학살 생존자들.” 놀랐다. 미군을 포함시킨 점이나 희생자 숫자는 부정확하다 치더라도 여기가 정말 퐁니라고?

나는 2000년 5월부터 2019년 1월까지 퐁니를 총 10차례 드나들며 생존자를 만나왔다. 퐁니는 바로 옆 퐁넛까지 붙여 퐁니·퐁넛 학살이라 한다.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사에 속한 곳이다. 1968년 2월12일 한국군 청룡부대(해병제2여단)에게 노인, 여성, 어린이가 무더기로 피살된 이 사건은 참전 소대장의 관련 진술과 미군 문서가 나왔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띤다. 당일 미군 병사가 찍은 현장 사진 20장은 미군 당국 기밀 수사문서에 첨부됐다가 2000년 비밀해제됐다. 이 사진을 언론에 처음 보도했던 나는 이듬해인 2001년 퐁니·퐁넛에 가서 사진 속 주검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일부 유가족을 인터뷰했다. 12년 뒤인 2013년부터는 매년 퐁니·퐁넛을 방문해 좀더 자세히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소장한 1960~70년대 사진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나마 미군이 주민관리용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1장 있었고, 대부분 증명사진이었다. 퐁니 생존자가 한꺼번에 등장한 사진은 다낭박물관 전시물이 처음이었다.

사진 속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알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날 마을이 완전히 파괴됐기에 이 정도 사람이 모이려면 1975년 이후였을 거라는 추정만 가능했다. 궁금했다. 진짜 퐁니 사람들일까. 이름은 무엇일까. 사진은 누가, 왜 찍었을까. 2017년 만난 박물관 관계자도 정보를 몰랐다. 2011년부터 전시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사진을 들고 퐁니에 가는 것.

백일 된 아기 생존자

만 1살도 되지 않았을 때 엄마 품에서 살아난 레딘먼. 들고 있는 사진 앞줄 왼쪽에 있는 아이가 그다.
한국군이 퐁니에 진입했다가 빠져나간 뒤 구조하러 갔던 미군이 찍은 사진에 레딘먼의 엄마 하티지엔(아래)이 찍혔다.

“맨 왼쪽은 찐티티엣 할머니네요. 그 옆은 도안티쿠옹 할머니. 어? 앞줄 꼬마들은 하나도 모르겠네.”(응우옌탄꺼·1957년생·퐁니 거주)

“맨 오른쪽은 응우옌득상이에요. 왼쪽 네 번째는 득상의 친척 형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누구지?”(쩐지옙·1953년생·퐁넛 거주)

“왼쪽 세 번째는 제 외할머니 응우옌티소안이에요. 오른쪽 첫 번째는 제 오빠 응우옌득상 맞고요. 두 번째는 응우옌판, 세 번째는 응우옌브어이. 앞줄 왼쪽 꼬마는 레딘먼이네. 그 옆은 판머우 아들인 것 같은데, 이름이 뭐더라…. 아 이제 한 명 남았나요? 뒷줄 가운데? 아, 맞아요. 저의 먼 친척 아저씨예요. 남쯔엉이라고.”(응우옌티탄·1960년생·퐁니 거주)

싱거웠다. 2018년 2월25일 퐁니와 퐁넛에 갔다. 그동안 인연을 맺어온 생존자 3명에게 도움을 청하자 사진 속 주인공 이름이 줄줄 나왔다. 9명 중 뒷줄 노인 4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가운데 선 남쯔엉은 소재와 생존이 불확실했다. 나머지 4명은 살아 있었다. 그중 2명은 퐁니, 2명은 호찌민에 살았다. 2명은 이미 내가 긴 인터뷰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름을 듣고 사진을 보니 그제야 감이 왔다. 사진 속의 귀여운 꼬마들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퐁니에 사는 레딘먼.

“맞아요. 왼쪽 꼬마가 저예요.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제 할머니에요. 도안티쿠옹. 1988년에 돌아가셨는데.” 그와는 구면이다. 이번이 다섯 번째 만남이다. 레딘먼은 백일 정도 된 최연소 생존자였다. 엄마 젖을 먹다 살아났다. 한국군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자신을 품에 꼭 안고 있던 엄마 덕분이다. 구조를 하러 갔던 미군이 찍은 사진에서 그의 어머니 하티지엔(당시 34살)은 젖가슴을 내보인 채 누워 있다.

“서양 사람이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나요. 베트남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해요.” 촬영 장소는 현재의 디엔안사 인민위원회 자리인 것 같다고 했다. “이곳에는 원래 사당이 있었어요. 해방 직후였을 걸요.” 레딘먼은 1967년생이니 1975년이라면 만 8살이다. 사진 속 몸집으로 봐서는 딱 들어맞는다. “제 옆은 동갑내기 친구 판반한이에요. 걔 집에서는 그냥 랑이라고 불렀죠. 호찌민에 살아요. 가끔 고향에 올 때마다 저랑 술 한잔 하는데.”

랑의 가족은 아직도 퐁니에 산다. 같은 날 그의 형 판반탄(1954년생) 집을 찾았다. 판반탄은 사건 당일 엄마가 죽어 자신이 동생을 키웠다고 했다. 생계를 잇기 힘든 극빈층이었다. 결국 랑은 13살 되던 해 호찌민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 보내졌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오토바이 수리기술을 배웠던 랑은 한때 수리점을 운영하다가 현재는 오토바이 택시(세움) 일을 하며 먹고산다. 랑을 타향으로 보냈던 아버지 판머우는 거실에 앉아 큰아들 탄이 인터뷰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만 봤다. 1928년생으로 거동이 온전치 않았다.

랑 역시 레딘먼과 같은 아기 생존자였다. 똑같이 엄마 젖을 먹다가 살아났다. 다른 점도 있다. 그의 어머니 응우옌티리에우(당시 40살)는 총이 아니라 수류탄에 폭사했다. 방공호에 함께 숨어 있던 랑의 큰누나 판티홍(당시 8살)과 작은 누나 판티다오(당시 6살)도 희생됐다. 판반탄은 “랑은 엄마가 품에 안고 엎드렸기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고 말했다.

초연한 모성의 현장

호찌민에서 만난 랑. 들고 있는 사진 앞줄 오른쪽 꼬마가 1975년의 그다. 권현우 팀장 제공
랑을 안고 엎드린 채 수류탄을 맞고 폭사했던 랑의 엄마 응우옌티리에우.

2013년 레딘먼의 사연을 처음 들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아기의 운명에 경탄하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 뒤 여러 생존자를 두루 만나면서 젖먹이의 극적인 생존은 학살에서 대단히 흔한 경우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퐁니·퐁넛 사건에서만 레딘먼, 랑을 포함해 타이터이(디엔프억사 라호아 마을·1966년생)까지 세 명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죽은 엄마 옆에서 아기만 살아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기가 죽은 엄마의 몸 위에 올라가 젖을 빨려고 했다는 증언도 많이 들었다. 4·3항쟁의 아픔을 형상화한 화가 강요배의 ‘젖먹이’는 바로 그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그만큼 학살 현장에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살육이 벌어진다.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위대한 모성의 본능은 초연하다.

호찌민에 사는 랑을 2018년 5월12일 만났다. 그는 약속 장소인 7군의 후인떤팟 거리 커피숍에 오토바이를 몰고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10월로 기억나요.” 랑의 생일은 1967년 2월20일이다. 계산해보면 1975년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이 잠시 밖에 다녀오라고 했어요. 베트남 사람 4명과 외국인 2명을 만나 사진을 찍었죠. 제가 학살 생존자라서 찍는다고 했어요.”

랑의 기억은 레딘먼보다 상세했다. 어릴 적 아버지 판머우와 대화를 나눈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카메라를 든 외국인은 아시아계였던 것 같아요. 필리핀 국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 뒤 다낭전시관에 견학 갔는데 이 사진이 있었던 기억도 나요. 친구들과 함께 관람했죠.”

사진의 배경은 산 같지만 마을이다. 레딘먼은 인민위원회 자리라 했고, 랑은 마을의 다른 장소 같다고 했다. 디엔반시 문화통신청 공식기록에 따르면,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과 그보다 서쪽에 있는 퐁룩 사람들까지 74명이 죽었다. 초가는 다 불에 타서 남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이 하나둘 돌아올 땐 인적이 끊겼던 자리에 나무와 풀만 무성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불하받고 집을 지었다. 마을을 재건했다.

그 남자의 후유증

호찌민에서 만난 응우옌득상. 들고 있는 사진 맨 오른쪽 청년이다. 사건 당시 최악의 부상을 당했던 그가 7년간 병원에 있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권현우 팀장 제공
다낭시 쩐푸 거리의 다낭박물관.

사진 속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응우옌득상이다. 1975년이라면, 22살의 새파란 청년일 때다. 그는 최악의 부상자였다. 사건 당시 동생 응우옌티탄과 함께 총을 맞았고, 배와 엉덩이를 심하게 다쳤다. 대변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똥이 배꼽으로 나왔다. 1년간 병원 신세를 진 동생과 달리, 7년이나 병원에 있다가 1975년 4월 퐁니로 돌아왔다. 그는 2013년과 2017년 인터뷰에서 “다낭병원과 독일병원선, 뚜이호아병원, 미국 17병원선, 호찌민의 병원을 거치며 수술을 11번이나 받았다”고 말했다.

2018년 4월17일 호찌민시 북서쪽 외곽 12군에 있는 응우옌득상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처음엔 사진 찍은 연도가 1969년인 것 같다고 했다가, 마침 오빠 집에 들른 동생 응우옌티탄의 타박을 들었다. 자신의 기억이 부정되자 안절부절못하며 불안 증세를 보였다. 1969년이면 병원에 있을 때다. 1967년생인 레딘먼과 랑이 사진에서처럼 성장했을 리 없다. 응우옌득상은 1975년이 맞는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도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응우옌득상은 사건 후유증이 커 보였다.

이제 사진 속 마지막 생존 인물을 만날 차례다. 1975년에 54살, 맨 왼쪽에 서 있는 여인, 찐티티엣 할머니다. 레딘먼이 최연소 생존자이고, 응우옌득상이 최악의 부상자라면, 찐티티엣은 최고령 생존자다. 1921년생. 한국 나이로 98살이다. 2018년 2월25일 집을 찾았다.

찐티티엣 할머니는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아 직계 가족이 없다. 조카손자 찐깝(1963년생) 가족과 5대가 함께 산다. 찐티티엣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나왔다. 증손주들의 부축을 받았지만 기력이 쇠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출력해 간 옛날 사진을 보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한국’이 어디냐고 묻기도 했다. 혹시 치매 증세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따이한’이라는 말에 금세 반응을 했다. 방문자를 힐끗 보고는 “따이한은 키가 작았어. 키 큰 사람이 없었는데”라고 운을 떼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47살 여성 찐티티엣은 사건 당일인 1968년 2월12일 오전 마을에서 친하게 지내던 판티찌(당시 34세·응우옌티탄의 엄마)와 빈디엔 시장에 장을 보러 나갈 예정이었다. 그날은 정월대보름 하루 전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참화를 피했다. 대신 그는 모든 것을 보았다. 학살과 강간과 방화 그리고 우물에 던져지던 주검. 사건 뒤 마을 주민들이 항의의 표시로 주검을 큰길에 놓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할머니의 말은 조리 있고 주장이 분명했다. 마지막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실제로는 50년) 지났는데 한국 정부에서는 우리한테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하지 않았어.” 안부나 인사는 사과를 뜻했다.

한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해 베트남에 사과해야 할까? 베트남전 파병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이들 가운데서도 정부 사과의 필요성에 회의적인 이들이 적지 않다. 베트남 정부가 내부 정치적인 부담 때문에 사과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논리도 있다. 100살을 코앞에 둔 생존자 할머니의 발언은 여기에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 같았다. 정부 대 정부의 사과 표명은 논외로 치더라도,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도의적 위로의 인사를 전하라는 이야기다. 할머니는 열사(유공자) 가족들만 챙기는 베트남 정부에 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했다.

98살 찐티티엣의 유언

97살로 최고령 생존자였던 찐티티엣 할머니의 2018년 2월 모습.
조카손자 가족과 기념촬영도 했다.
2019년 1월 다시 집을 찾았을 때는 고인이 돼 있었다.

2019년 1월2일, 1년 만에 퐁니에 다시 들어갔다. 찐티티엣 할머니만 한 번 더 만나려고 했다.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없었다. 제단의 사진 속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2018년 12월7일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정확히 26일 전이었다. 조카손자 찐깝은 “전날까지 특별히 아프지 않으셨고, 편안히 잠든 것처럼 아침에 발견됐다”고 말했다. 찐티티엣 할머니는 한국 정부를 향한 당당하고 명쾌한 발언을 유언처럼 남겼다. 문득 많은 이의 아쉬움 속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떠올랐다.

사진 한 장으로 여기까지 왔다. 등장인물 9명은 다 찾았다. 4명을 만나 확인했고, 그중 1명은 1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누가 찍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혹시 1975년 미군 학살 지역인 선미(밀라이)를 방문했던 구소련 방문단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열쇠를 풀 다낭박물관 직원이 딱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는 2년 전 50대의 나이에 돌연사했다. 다른 경로로 사진의 출처를 계속 추적할 수도 있겠으나,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같은 날, 다낭박물관 2층 전시장에 가 보았다. 한국군이 다낭 항구에 발을 디디는 대형 사진도 있고, 병사들이 휴양소를 배경으로 찍은 작은 사진도 보인다. 한국군 계급장이나 명찰, 견장도 전시돼 있다. 참전군인들은 추억에 젖을 만하다. 다낭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 옆에 있는 문제의 퐁니 생존자 사진 앞에도 서보기를 권한다. 기분 좋은 사진은 아니다.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진실의 가치를 생각하며 사진의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본다면 다낭 여행의 여운은 더 길게 남을지도 모른다. 박물관 입장료는 2만동(약 천원)이다.

다낭·디엔안(꽝남)=글·사진 고경태 <1968년 2월12일> 저자 humank21@gmail.com 호찌민=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아카이브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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