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고지서를 반대하는 작은 목소리

반기웅 기자 2019. 3. 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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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규제 샌드박스의 ‘그늘’… 영세 인쇄업자와 우체국은 큰 타격

일러스트 김상민

이명박 정부에서 뽑아야 할 ‘전봇대’로 불렸던 규제는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서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로 비유되곤 했다. 문재인 정부는 규제를 ‘악’으로 규정하진 않았지만 별도의 ‘규제 샌드박스(모래 놀이터)’에 밀어넣고 격리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했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의 규제를 면제해준다는 것이 ‘규제 샌드박스’의 핵심이다. 규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일종의 테스트베드를 만든 것이다.

정부의 규제 샌드박스는 ‘신기술이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새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제도다. 이렇게 잉태한 신산업이 정부가 기대한 대로 고용을 창출할지, 아니면 기존 일자리를 파괴해 오히려 시장에 역효과를 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다만 기존 산업 생태계를 송두리째 흔들 만한 파급력이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규제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업자가 시장에 들어올 때 파열음이 나는 이유다.

택시업계처럼 규모가 큰 집단은 카풀을 앞세운 새로운 사업자에 맞설 수 있지만 영세한 규모의 사업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카카오페이(이하 카카오)와 KT가 진출하게 될 ‘메신저·문자 기반 공공기관 고지서 모바일 전자고지 서비스’ 시장도 그 중 하나다. 공공 고지서 시장을 잃게 된 인쇄·출력 사업자들은 생존을, 우체국은 서비스 축소와 고용불안을 걱정할 처지에 놓였다. 이들의 목소리를 변화의 물결에 함께 흘려 보내야 마땅한 것일까.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에 위치한 한 소규모 업체에서 직원이 인쇄 작업을 하고 있다. / 김천 자유기고가 제공

관련 업체 매출 감소 1000억원 예상 “요즘 누가 종이 고지서 좋아합니까. 휴대폰으로 받는 게 편하다는 거 알죠. 시대의 흐름이고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없애기로 한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전에 있는 ㄱ출력업체 대표의 말이다. 이 회사는 직원 5명 규모의 영세업체지만 20년 넘게 대전에서 출력업체를 운영해 왔다. 구청을 비롯한 지자체 고지서를 출력하고 우체국까지 배송하는 게 이들의 일이다. 해마다 편차가 있지만 공공 고지서 사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매출의 50% 정도다.

비단 이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지서 관련 인쇄·출력업체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이미 백화점, 통신사 등의 종이 팸플릿과 요금고지서가 모바일로 넘어간 상황에서 공공시장마저 잃게 되면 안정적인 매출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한인쇄문화협회에 따르면, 현재 공공 고지서 관련 인쇄·출력·제조업체는 3500여개로 모바일 고지서 전환에 따른 업계 매출 감소 규모는 1000억원에 달한다. 2만4400명에 달하는 관련 종사자가 일자리를 잃게 될 수 있다는 게 협회 측의 설명이다. 전국우정노동조합에 따르면 카카오와 KT는 이번 사업을 통해 2년 동안 624명의 고용이 창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단순 추정치 상으로는 얻는 일자리보다 잃는 일자리가 많은 셈이다.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관련 업체의 매출은 절반 이상이 줄어들 것”이라며 “가뜩이나 어려운데 아예 문을 닫으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우정사업본부 소속 우체국 노동자들도 이번 규제완화를 우려하고 있다. 통상우편 시장에서 공공기관 고지서가 빠지면 매출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지자체·공공기관 우편물(전자고지 전환 대상)은 4억6300만통. 매출액은 2085억원에 달한다. 우정사업본부는 올해 전체 공공기관 우편물의 10%가 전자화되고 2022년에는 74%가 전자고지서로 전환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공공기관 우편물 매출액은 2018년과 비교해 418억원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체 수입으로 운영을 하는 특별회계 체제인 우정사업본부의 특성상 매출 감소는 곧 경영악화로 이어진다. 해마다 약 2억통의 우편물 감소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모바일 고지 서비스는 또 다른 악재다. 지방우정청 관계자는 “통상우편 수입이 줄어들면 비용절감 차원에서 단기계약 인력부터 정리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우편서비스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철수 과기정통부(우정사업본부)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지난해 우정사업본부에서 채용한 인원만 1800명”이라며 “우체국에서 창출하는 고용효과는 무시하고 민간기업에 특혜를 주면서까지 일자리를 늘리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체국 노동자와 인쇄업계의 반발 속에서도 ‘개인정보 활용 사전 동의’라는 장벽이 사라진 고지서 시장은 빠른 속도로 모바일화가 진행 중이다. 이르면 3월부터 카카오와 KT는 우편으로 발송하던 예비군 훈련 통지와 범칙금을 비롯한 종이 고지서를 별도의 동의절차 없이 카카오톡과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번 조치에 따른 사회적 비용 절감효과는 2년간 약 900억원 정도다. 무주공산이었던 모바일 고지서 시장은 국내 메신저 시장점유율 95%가 넘는 카카오가 독점할 가능성이 높다. 카카오페이 가입과 인증이라는 ‘허들’은 있지만 관련 시장이 이미 ‘카카오화’됐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규제 샌드박스가 1등 기업 밀어주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동의 없는 연계정보 활용도 문제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비용절감을 원하는 정부와 플랫폼 확대가 필요한 카카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정부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카카오의 독점적인 지위를 더 강화시켜 준 것”이라고 말했다.

독점 논란과 함께 모바일 고지 서비스 허용은 보안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 규제완화의 핵심은 정보주체의 동의 없는 연계정보(CI) 활용이다. 주민등록번호를 가명처리한 연계정보는 전국민 주민번호와 매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온라인 주민번호와 같다. 결과적으로 카카오와 KT는 온라인 상에서 주민번호를 연계정보로 자유롭게 변환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태료와 범칙금 고지서가 모바일로 오가는 만큼 개인정보 유출이 발생할 경우 금전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은 “사전 동의절차가 없기 때문에 개인정보가 유출될 경우 자칫 보이스 피싱으로 악용될 우려가 크다”며 “카카오나 KT가 잘하겠다고 해서 믿고 덮을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사천리로 통과된 모바일 고지서 서비스는 기업 특혜 논란과 보안문제, 기존 산업 생태계 붕괴라는 과제를 남겼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경제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에 빠져 규제완화로 인한 부작용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며 “섣부른 규제완화로 인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은 규제완화로 얻을 이익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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