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대한의 모든 존재에게 한글 이름을 허하라"

신용수 기자 2019. 2. 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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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인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담아 285만 관객을 동원하며 잔잔한 감동을 남겼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당시 과학계에도 이들 못지않게 우리말과 우리 이름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조선박물연구회(朝鮮博物硏究會)다.

조선인으로만 꾸린 조선박물연구회

조선박물연구회는 1933년 결성된 박물학 연구단체로 이덕봉, 정태현, 박만규, 장형두, 석주명 등 박물교원(현재의 생명과학 교사)이 주축이 돼 설립됐다. 박물학은 자연물, 즉 동식물과 광물의 종류와 성질, 분포 등을 분류해 정리하는 학문을 말한다. 지금은 박물학이라는 말보다는 주로 자연사로 불린다. 

조선박물연구회가 설립될 당시, 조선에는 이미 조선박물학회라는 박물학 연구단체가 있었다. 1923년 10월 21일 창립한 조선박물학회는 주로 광물학, 생물학, 생태학을 연구한 학자들로 구성됐으며, 절반 이상이 전문학교와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원이었다. 설립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을 만큼 주목을 받았던 조선박물학회는 1926년을 기준으로 174명의 회원을 보유한 큰 단체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큰 단체를 두고 따로 조선박물연구회를 설립했을까. 두 단체의 회원 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조선박물학회는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회원 중 조선인은 10분의 1이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반면 조선박물연구회는 조선박물학회와 달리 순수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학술단체였다. 이는 명명(命名)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박물학의 특성상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 동아일보

생물학, 특히 분류학에서는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라틴어 학명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식물을 학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의 학명은 ‘Felis catus’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양이’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캣(cat)’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종이 발견되면, 학계는 새로운 학명과 함께 새로운 우리말 이름도 붙여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우리말에 대한 탄압은 매우 극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의 다수가 체포돼 옥고를 치를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 발견된 생물에 우리말로 이뤄진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박물연구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 땅에서 자란 동식물에 우리말로 된 이름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박물연구회가 발간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살펴보면 조선박물연구회의 설립 목적으로 가장 먼저 ‘박물명칭의 사정’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말로 된 동식물 명명은 이들이 마음속에 새겼던 역사적 사명이었다.

‘야인과’ 대신 ‘멀꿀’ , ‘전추라’ 대신 ‘동자꽃’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일본식 한자 이름인 야인과(野人瓜) 대신 멀꿀, 전추라(剪秋羅)라는 중국식 한자 이름 대신 동자꽃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붙였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박물연구회 연구 활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1937년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은 당시 한반도에 서식하던 식물 1944종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식물도감이다. 조선박물연구회 소속인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가 공동으로 저술했다. 이 책에는 식물종의 표준 이름과 함께 형태적 특징, 학명과 그 의미, 유래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분류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식물의 표준명을 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물을 과별 분류체계에 따라 분류해 학명과 함께 우리말 이름과 로마자 발음표기를 일본 이름과 함께 표기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자료를 직접 수집했다는 점에 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박물연구회가 조선 각지에서 수집한 실제 향명(예전부터 민간에서 불러 온 동식물 따위의 이름)을 기준으로 작성됐는데, 이외에도 기존 문헌에 기재된 내용을 참고했다. 한글 이름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들이 어떻게 이름을 붙였는지는 당시 발표된 한 편의 논문에서 잘 드러난다. 1937년 발표된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라는 논문은 저자 중 한 명인 이덕봉이 조선식물향명집이 발간되기 직전 조선어학회 학회지인 ‘한글’에 발표한 것이다. 

논문에는 국화과 139종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널리 쓰이는 향명을 기준으로 표준명을 정했고, 이외에도 이명(異名)과 지방명을 따로 표기했다. 또한 조선박물연구회 식물부에서 새로 명명한 이름의 경우 신칭(新稱·새로 일컬음)이라고 따로 명시했다. 조선박물연구회가 새롭게 명명한 것들로는 ‘괴불주머니’ ‘새모래덩굴’ ‘금낭화’ ‘애기똥풀’ ‘바람꽃’ ‘놋젓가락나물’ ‘감태나무’ ‘흰새더기’ 등이 있다.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3호(2018년)에서 조선식물향명집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아마추어 식물학자 조민제 씨(법무법인 시공 소속 변호사)는 “근대 분류체계가 도입되기 전에는 주로 기능에 따라 식물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여러 종이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경우가 많았다”며 “당시 조선인이 실제로 부르는 이름을 일일이 채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되, 다음은 옛 문헌을 찾고 그래도 이름이 없는 경우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조 씨는 “새로 붙인 이름은 기존에 사용되던 이름에 접두사 등을 붙여 차별화하는 방식으로 많이 명명됐다”며 “일부 이름은 형태적 특징, 설화와 학명 등을 고려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던 식물의 이름을 표준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일률적으로 서울말을 따라 표준화한 것이 아니라, 각 식물이 서식하던 지역을 기준으로 표준 이름을 정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큰쥐방울’ ‘긴쥐방울’ ‘등칡’ ‘칡향’ ‘통초’ 등으로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던 식물(Aristolochia manshuriensis)은 강원도에서 많이 자란다는 이유로 강원도에서 부르던 이름인 ‘등칡’이 표준명으로 정해졌다.

어려운 한자 이름이나 일본 이름만 갖고 있던 식물에게 우리말 이름을 붙여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들은 일본식 한자 이름인 ‘야인과(野人瓜)’를 제주 방언에서 ‘멀꿀’을 찾아 대체했고, ‘전추라(剪秋羅)’라는 중국식 한자 이름으로 불리던 식물에는 전설에서 유래한 ‘동자꽃’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또한 일본어로 ‘미야코히고다이(ミヤコヒゴタイ)’로 기록된 식물에는 ‘분취’라는 우리 이름을 되찾아줬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일본인이 잘못 명명한 우리말 이름을 바로잡기도 했다. 조선박물학회 소속이었던 일본인 식물학자 모리 다메조(森爲森)가 지은 ‘조선식물명휘’를 살펴보면, 참나무속(Quercus)에 속하는 식물(Q. variabili)을 ‘갈참나무’로 기록했다.

굴참나무와 떡갈나무의 사진. ‘조선식물향명집’은 일본 학계가 잘못 명명한 두 나무의 우리말 이름을 바로잡았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하지만 조선식물향명집은 수피에 굴(골)이 지는 특징에 주목해 이를 ‘굴참나무’로 바로잡았다. 또 조선식물명휘는 참나무속에 속하는 식물(Q. aliena) 이름을 ‘떡갈나무’로 기록했으나, 조선식물향명집은 떡갈나무라는 이름이 큰 잎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주목해 다른 식물(Q. dentata)을 떡갈나무로 명명했다. 대신 기존 (Q. aliena)은 ‘갈참나무’로 불렀다.

일각에서는 조선식물향명집을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간주하기도 한다. 조선식물향명집 속 한글 이름이 단순히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는 “조선식물향명집이 조선식물명휘 등 일본인이 발간한 식물도감을 참고한 것은 맞지만, 조선박물연구회의 활동은 일제에 맞서 과학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저항 운동”이라며 “대만 등 다른 일본 식민지에서는 이런 독자적인 학술 활동이 없었던 만큼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 과학자들이 독자적인 연구 성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이 국내 생물학 연구에 미치는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해방 이후 조선박물연구회의 후신으로 창설된 조선생물학회는 1949년 조선식물향명집을 개선한 ‘조선식물명집’을 발행했다. ‘목본편’과 ‘초본편’으로 구성된 조선식물명집은 식물 이름을 3000종 이상 정리했으며, 이 책은 이후 국내 식물 이름의 기준이 됐다. 

나비 종 연구에 통계학 도입한 석주명  

석주명이 1939년 발간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 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 과학자가 영문으로 집필한 유일한 책이다. 국회도서관 제공

‘나비 박사’로 유명한 석주명도 조선박물연구회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조선박물연구회 창립 회원인 석주명은 1929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송도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나비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1950년 사망할 때까지 나비 연구에 매진했다. 

석주명의 가장 큰 업적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나비 종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데 있다. 그간 알려졌던 수많은 종이 사실은 동일한 종의 개체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석주명은 분류학의 새 장을 연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 이론’을 창안했다. 사람의 생김새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듯, 나비 또한 같은 종이라도 크기나 무늬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표본을 정리해 수치화했을 때 그 수치가 일정한 경향을 지닌 정규분포를 보인다면 이는 같은 종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 학계는 마쓰무라 쇼넨(松村松年) 홋카이도대 곤충학 교수의 주도 아래 나비 신종 경쟁이 한창이었다. 이 때문에 생김새가 조금만 다른 나비가 발견되면 신종으로 등록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만용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부소장은 “기본적으로 분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종 발견과 명명에 대한 열망이 있다”며 “기존 발견의 오류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건 석주명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석주명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수십만 점의 표본을 수집했고, 날개 길이 등을 일일이 측정해 표본을 수치화했다. 그의 대표적인 논문인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에서 그는 16만 마리가 넘는 나비의 형태, 무늬, 색채, 모양, 길이를 조사해 이를 수치화했다. 그리고 학계에 보고된 20여 종의 나비가 실제로는 배추흰나비의 아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석주명은 10여 년간의 변이 연구를 통해 조선 나비를 250여 종으로 정리했다. 그가 정리하기 전까지 조선 나비는 9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상당수가 동종이명이었던 것이다. 문 부소장은 “당시 일본 학계에서도 석주명의 연구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며 “사실상 자신들의 연구가 틀렸음을 시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석주명은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의 의뢰로 1940년 6월 영문으로 된 책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출간했다. 우리말로는 ‘조선산 접류(蝶類) 총목록’으로 불리는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 과학자가 영문으로 집필한 유일한 책이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신이 정리한 조선 나비 250여 종에 우리말 이름을 직접 지었다. ‘각시멧노랑나비’ ‘떠들썩팔랑나비’ ‘무늬박이제비나비’ ‘은점어리표범나비’ ‘청띠신선나비’ ‘번개오색나비’ 등 현재 순우리말 나비 이름의 70% 이상이 석주명의 손에서 탄생했다. 

문 부소장은 “당시 조선 학계에서는 그동안 빼앗겼던 우리 이름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며 “석주명이 그동안의 연구를 토대로 빠르게 기틀을 잡아준 덕분에, 우리 나비에게 우리 이름을 단시간에 되찾아 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세계 공용어로 개발돼 한창 연구 중이던 에스페란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저술하며 국내에 보급하고자 노력했고, 학회를 통해 국제적으로도 활발히 교류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논문에 에스페란토 요약을 달면서 자신의 연구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성공했다. 그 인연으로 스페인 학계와 교류했던 석주명은 1932년 스페인 발렌시아대가 화재로 박물 표본을 소실하자 이 소식을 국내 학계에 전달했으며, 1933년 조선박물연구회 회원인 조복성과 김병하가 딱정벌레 표본을 바르셀로나대로 보내며 조선 학계와 스페인 학계의 학술적 교류가 이뤄졌다. 

문 부소장은 “석주명은 조선인인 데다가 보통학교 교사로 당시 학계에서는 비주류에 해당했다”며 “그런 그가 일본 주류 학계의 틀린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며 국제 사회와 당당히 교류하는 모습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안겼다”고 말했다.

곤충의 근면성과 단결력 빗대 조선 계몽 역설

석주명 외에도 곤충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연구자들이 있었다. 바로 조복성과 김병하다. 이 둘은 모두 박물학을 통해 대중을 일깨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조복성은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예과 연구원으로 활동한 인물로, 1929년 조선인 최초로 ‘울릉도산 인시목(鱗翅目)’이라는 곤충학 논문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과학박물관장을 지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곤충기’를 발간한 인물이다. 책 자체는 해방 이후인 1948년 발간됐지만, 내용은 1930년대부터 자신이 신문, 잡지, 라디오, 강연 등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했던 곤충에 관한 말과 글을 한 데 엮었다. 조복성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곤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끊임없이 역설했다.

이 교수는 “조복성은 일본인이 주축이었던 조선박물학회에도 논문을 발표할 만큼 연구 능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며 “당시 박물학계의 석학으로서 계몽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김병하는 석주명과 함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던 교사이자 박물학자로, 석주명과 함께 학교에서 곤충연구회를 주도했다. 그는 1931년 5월 동아일보가 주최한 ‘조선곤충전람회’의 고문을 맡아 수집품을 제공했으며, 1933년과 1934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자연과학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해 곤충의 생활을 강의했다.

그는 또 1930년 12월 연재한 ‘백두산 곤충기’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에 다양한 글을 기고했는데, 곤충의 행동을 토대로 인간 사회를 투영했다. 곤충의 근면성과 단결력을 얘기하며 조선 또한 부지런히 익히고 단결해 깨우쳐야 한다는 계몽의식을 전파했다. 이 교수는 “김병하는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만든 과학지식보급회 이사로도 활동하는 등 과학을 대중화하고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활발히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1930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6일간 동아일보에 연재한 ‘백두산 곤충기’. 김병하는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 힘썼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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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수 기자 credi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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