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왜 이럴까?] 쇠똥구리에겐 똥이 복지고, 권리다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2019. 2. 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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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마음을 읽는 법

동물의 마음을 읽는 법

동물도 마음이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알고 보면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 논란의 한쪽 끝에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에게는 마음 같은 것이 전혀 있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직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가깝다는 것이죠. 그러나 정반대의 주장도 있습니다. 파도를 따라 출렁거리는 해파리를 보면서 ‘즐거움에 겨워 춤을 추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심지어 식물도 생각할 힘이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습니다. 아마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는가

동물도 인간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느낀다고 여기는 보편적 심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지 경향은 아마도 타인과 생각을 나누고 느낌을 공유하기 위한 공감 능력이 진화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내 머릿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마음읽기 모듈은 기본적인 인간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읽기는 종종 동물을 인간처럼 의인화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담배 피우는 호랑이, 쑥을 먹는 곰'처럼 동물도 인간과 질적, 양적으로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각자의 진화적 적응 환경에 적합한 신경인지적 모듈을 진화시켰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방식으로 판단하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쇠똥구리는 똥을 동그랗게 만들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걸 먹고 삽니다. 이런 지저분한 습성을 가진 쇠똥구리는 오늘도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똥이나 굴리는 내 팔자야!’라고 한탄하고 있을까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구역질을 참아가며 냄새나는 똥을 억지로 먹고 있을까요? 자식을 보면서 ‘다음 생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물로 태어나길’ 바라며 슬픔의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쇠똥구리는 똥을 볼 때마다 아주 기뻐할 것입니다. 오히려 똥이 없는 곳은 그들에게 척박한 사막입니다. 쇠똥구리에게 ‘똥은 비위생적이니 더욱 교양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더러운 똥 같은 것을 먹고 사느니 그냥 죽는 편이 낫다’며 쇠똥구리를 안락사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잘못입니다. 쇠똥구리에게는 똥이 복지이자 권리입니다.

똥을 굴리는 쇠똥구리. 쇠똥구리도 분명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좋은지 나쁜지 알고 있고 이를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 아마 똥을 좋아할 것이다. 픽사베이

동물의 지각 능력

똥 이야기는 그만하고 개 이야기를 해보죠. 개를 키워본 분은 잘 알겠지만, 개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뛰어난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슬퍼하고 기뻐합니다.

주인이 개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자기 생각과 감정을 과도하게 ‘투사’ 해버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교한 실험을 통해서 심리적 투사의 요소를 제거해도, 동물 대부분은 여전히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물론 쇠똥구리의 사례처럼 ‘인간과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과연 동물이 지각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지각(sentience)이란 느끼고 인식하고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생각이나 느낌과는 개념이 좀 다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동물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고, 느낌을 가지는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개가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어쩄든 개는 말을 못하니까 물어봐도 답을 얻기 어렵죠. 과연 동물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지각’하고 있을까요? 혹은 단순한 생각과 느낌은 있으나 그것에 대한 주관적 지각은 없는 것일까요?

사실 지각이라는 단어가 왠지 잘 와닿지 않기 때문에, 저는 느낌이라는 단어가 더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의 감정은 단순히 자극에 대한 감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 자체를 이해한다는 뜻을 포괄하기 때문이죠. 영어의 '이모션(emotion)'과는 조금 뜻이 다른 것 같습니다. 느낄 수 있는 동물 정도라고 할까요? 이것도 아주 잘 들어맞지는 않습니다만. 일본어에서는 감각(感覺) 혹은 직감(直感)이라고 합니다. 직각(直覺 )이라고 하기도 하죠. 언젠가는 느낌, 감정, 지각, 정서, 정감, 직감, 감각, 정동, 직각 등의 우리말 단어에 대한 명확한 의미 규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좀 샜네요. 아무튼 동물의 복지와 권리를 이야기할 때는 ‘지각(知覺)’이라는 개념을 흔히 사용합니다.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감정을 말합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판단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자유를 원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 여러 연구에 따르면 동물도 이러한 자신의 내적 상황을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란

귀여운 강아지에게 예방접종을 해주려고 동물 병원에 갑니다. 종종 난리가 납니다. 예방접종의 의미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쇠바늘이 몸에 들어오니 고통스럽다고 여길 것입니다. 분명 동물은 사고 능력이 떨어집니다. 주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추론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인간보다 열악합니다. 그러니 장기적인 미래의 건강을 고려하여 지금 주사의 고통을 참아내는 수준의 인지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일단 동물에서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판단할 때는 자연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수준에서 바라볼 때 예방접종은 단지 고통일 뿐이니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오랜 진화적 적응 환경 내에서의 자연적 삶을 강조합니다. 모든 동물을 인간 세상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과연 그 ‘자연’이 무엇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생 동물이라면 좀 간단한데, 가축은 애매합니다. 개는 약 3만6000년 전에 인간의 친구가 됐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개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같이 살았습니다. 사냥을 돕고 종종 식량이 되어 주었죠. 대신 안전과 먹이를 대가로 받았습니다. 《침입종 인간》의 저자인 인류학자 팻 시프먼은 개와 인간이 사냥을 매개로 일종의 전략적 동맹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동맹 덕분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인간은 70억 명으로 늘었고 개는 9억 마리로 늘었습니다. 양쪽에게 모두 ‘윈윈’이었죠. 그러니 개에게 ‘이제 동맹을 끝맺겠으니 다시 늑대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인간과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이 개에게는 이미 수만 년 동안 이어온 ‘자연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 예방접종은 고통을 주는 행동이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결국 잠재적인 질병의 고통을 줄여줄 테니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상의 논란은 있더라도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목표는 같습니다. 고통 최소화 주장은 종종 행복 최대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마치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이라는 공리주의를 동물의 세계까지 확장한 것 같습니다. 종종 요즘은 개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낫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곧 모순에 부딪힙니다. 쾌락과 행복의 기준이라는 것이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데다가 그 자체가 오히려 동물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향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사경을 헤매는 연어에게 심폐소생술을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기진맥진하여 도무지 가망이 없으니 안락사를 해야 할까요? 분명 연어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자연의 법칙입니다. 게다가 강 어귀를 가로막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가는 십중팔구 죽을 테니 그냥 산란을 포기해라’라고 설득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뭐. 설득할 방법은 없겠습니다만.

마다가스카르의 인도흑소(Zebu)와 농부. 소를 이용해서 논을 갈고 있다. 제공 박한선

동물의 지각과 동물의 권리

사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동물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줄여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처럼 대우해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물의 말을 번역해주는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뭐 그런 기계가 나올 리도 만무합니다.

지금까지는 동물의 지각 능력을 기준으로 동물의 복지와 권리를 판단하자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자신의 진화적 적응 환경 내에서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지 무엇은 좋지 않은지 알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동물의 지각 능력 수준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기준은 바로 생존과 번식입니다. 즉 동물이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영향의 좋고 나쁨에 대해 즉각적으로 느끼는 기준에 따라서, 동물에게 어떤 대우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한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썩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에게는 ‘썩은 고기’가 좋은 먹이입니다. 썩은 음식이 하이에나의 생존을 도울 뿐 아니라 그런 먹이를 볼 때 좋아하는 자신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하이에나에게 갈비구이나 햄버거를 주어도 생존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썩 좋아할 것 같지 않네요. 반대로 썩은 맛이 나는 플라스틱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좋아하겠지만 생존을 돕기는 어렵겠네요. 

가축은 인간과 공생하며 살아왔습니다. 인간은 70억 명인데, 닭은 200억 마리가 넘습니다. 아마 수천 년 후에는 ‘닭이 지구를 지배한 시대’로 오늘날을 규정할지도 모릅니다. 개, 고양이, 말, 소, 양, 낙타, 염소 등 다양한 반려동물과 가축은 인간과 일종의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소와 말에게 야생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곧 죄다 죽을 것입니다. 또한, 최대의 쾌락을 제공하게 위해서 떠받들고 살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닭을 네 마리씩 나누어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들을 지각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 하에서 그들이 지각할 수 있는 수준의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현재까지는 동물권을 규정하는 가장 납득할만한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을 하는 소가 불쌍하니, 소를 농사일에 쓰지 못하게 하자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소는 인간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야생의 소보다 더 나은 생존과 번식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유 없이 소에게 채찍질하는 것은 권리를 해하는 것입니다. 소를 학대해봐야 생존과 번식을 돕지 못하며, 소도 그런 행동을 바람직하게 지각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닭을 잡아 먹는 것도 비슷합니다. 물론 잡아먹힌 닭은 생존권을 잃은 셈이지만, 그런 방식을 통해서 훨씬 큰 번식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닭이 스스로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으로 느끼는 환경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너무 좁은 케이지에서 밀집 사육을 하거나 다른 닭이 다 보는 앞에서 도살하거나 수컷 병아리를 산채로 갈아서 처분하는 것 등입니다.

에필로그

사실 동물권에 대한 논란은 아주 복잡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존재성 자체에 의미를 두는 철학적인 입장부터 고통 최소화에 초점을 준 입장, 어느 정도 이성을 가진 동물만 권리를 인정하자는 입장, 인간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입장, 인간처럼 대우해주어야 한다는 입장 등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축을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있고, 동물 실험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영원히 결론짓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생존과 번식은 모든 생물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살고 싶어하고 새끼를 낳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욕구를 촉진하는 상황을 좋아하고, 이를 스스로 금방 알아차립니다. 특히 인간과 가축은 오랜 기간 서로 협력해왔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지만 수천수만 년간 공생해 온 가축에게 최소한의 존엄을 누리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각을 가진 존재로서 동물의 생존권과 번식권을 최대한 존중하고,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이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때문이야》를 썼다.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parkhans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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