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어들이 떼춤으로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듯 우리 연구소 '다우어'들도 함께 뭉쳐 힘든 시기를 견딘다 [다른 삶]

이대한 2019. 2.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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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나는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아주 작은 벌레의 색다른 삶을 연구하고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꼬물거리는 모습이 겨우 보일 만큼 자그마한 이 벌레는, 우선 사람과는 사뭇 다른 성별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예쁜꼬마선충의 성별은 암수로 나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수컷 벌레는 있지만 암컷 벌레는 없다. 대신 암수한몸 벌레가 존재한다. 암수한몸 벌레는 스스로 난자와 정자를 모두 만들어내고, 몸 안에서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혼자서도 번식을 해낸다.

초파리의 날개 위에서 히치하이킹 춤을 추고 있는 예쁜꼬마선충의 다우어 유충을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예쁜꼬마선충이 발생하면서 거치는 여러 시기 중에 오직 다우어 시기에만 이런 춤을 보인다. 덕분에 다우어는 다른 동물에 히치하이킹해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 떠날 수 있다. 이대한 제공

어른이 된 암수한몸 벌레는 이틀이면 많게는 300여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사흘이면 성장을 끝내고 번식을 시작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 한 마리가 300마리로, 300마리가 9만마리로 불어나는 데 산술적으로 열흘이면 충분한 것이다.

만약 이 작은 벌레가 같은 속도로 계속 번식한다면, 9만마리가 열흘 뒤면 81억마리가 되어 인구수를 넘어서고, 한 달 만에 729조마리가 되어 머지않아 지구를 뒤덮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예쁜꼬마선충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먹을 게 없어지면 예쁜꼬마선충은 성장도 멈추고 생식도 멈춘다.

예쁜꼬마선충은 썩은 과일 같은 곳에서 자라는 미생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번식 초기에 벌레가 몇 마리 되지 않을 때는 벌레가 자라는 속도보다 미생물이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먹을 게 충분하지만, 벌레가 순식간에 불어나 수만마리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벌레가 번식하는 동안 썩은 과일이 지니고 있는 영양은 계속 소모되어 미생물의 증식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결국 벌레의 증식 속도가 미생물의 증식 속도를 역전하면 재앙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불어난 숫자의 벌레들은 마치 메뚜기떼가 휩쓸고 간 들판처럼 황폐해진 서식처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쁜꼬마선충은 이 과정에서 그저 비참히 굶어 죽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 작은 벌레들은 진작 지구에서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 예쁜꼬마선충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삶’을 선택한다. 먹이가 풍족할 때 벌레들은 네 단계의 유충 시기를 거쳐 사흘 만에 성충이 되는데, 만약 환경이 열악해지면 성충으로 진입하지 않고 ‘다우어(dauer)’라고 불리는 특수한 휴면 단계에 들어간다. 보통 예쁜꼬마선충의 수명은 한 달 정도 되는데, 독일어로 ‘견고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다우어 유충은 먹지도 않고 몇 달을 버틴다. 심지어 온갖 독극물과 스트레스에도 내성을 보인다.

내 박사 연구 주제는 바로 예쁜꼬마선충이 다우어 시기에만 보이는 신기한 춤에 대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바닥을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다른 시기와 달리 다우어 시기에 벌레는 가만히 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가끔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가느다란 실 같은 물체나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나면 그걸 기어 올라가 몸을 세운다. 그리고 격렬하게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이따금 수백마리의 다우어들이 뭉쳐서 거대한 기둥을 이루며 떼춤을 추기까지 한다. 신기하게도 오직 다우어만이 이런 춤을 춘다.

현미경으로 다우어들이 가냘픈 몸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에게 간절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이런 다우어의 절박한 몸부림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이 춤사위는 예쁜꼬마선충을 종말에서 구원할 희망의 몸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썩은 과일에서 살아가는 것은 예쁜꼬마선충뿐만이 아니다. 초파리도 있고, 쥐며느리도 있고, 노래기도 있고, 달팽이도 있다. 몸을 세워 흔드는 것은 바닥에만 붙어 있는 것보다 지나가는 이웃 동물에 우연히 올라탈 가능성을 높여 준다. 마치 히치하이커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다우어는 온 힘을 다해 자기 몸을 흔들어 다른 동물에 올라탄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다우어는 밥도 굶으며 몇 날 며칠을 춤을 춘다. 그래야 다른 동물에 올라타 새로운 서식처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새 터전서 휴면을 풀고 다시 성장을 한다. 단 하루면 어른이 되고 폭발적 성장. 그렇게 썩은 과일서 성장, 정체, 파멸을 되풀이.나의 삶은 다우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는 박사를 위한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박사후연수’를 위해 미국서 터를 잡고 살고있다. 나 같은 다양한 국적의 다우어들은 연구소의 동료를 넘어 친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한다. 덕분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고 견디는 삶을 이어간다.

작은 몸으로 멀리 기어가지 못하는 예쁜꼬마선충과 달리, 쥐며느리 같은 동물은 금세 새로운 과일을 찾아갈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자동차로, 기차로, 비행기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듯이, 예쁜꼬마선충 또한 쥐며느리나 달팽이 택시를 타고 고향을 탈출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다. 밥도 굶으며 몇 날 며칠을 춤으로 지새우다가 끝끝내 동물 택시에 탑승한 다우어는, 택시가 데려다준 새로운 서식처에서 휴면을 풀고 다시 성장을 시작한다. 다우어 시기에서 빠져나온 벌레는 단 하루면 어른이 되어 폭발적인 번식을 시작하고, 썩은 과일에선 성장, 정체, 파멸의 과정이 다시 되풀이된다.

이런 다우어의 삶을 연구하다 보면 종종 다우어에게 감정이입이 될 때가 많다. 다우어는 비슷한 시기의 보통 유충에 비해서 가늘고 길고 까맣다. 나도 적잖이 그렇다. 생긴 것만 비슷할 뿐 아니라 사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다우어처럼 견디는 삶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운 좋게도 또래 중에 일찍 박사를 받은 나도 학위를 마치는 데 7년 가까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연구도 쉽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도 팍팍했다. 한동안 반지하방을 전전해야 했고 늘 통장 잔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다. 학생식당의 저렴한 식대 덕분에 다우어처럼 굶진 않아도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우어의 삶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박사학위는 나를 풍요로운 곳으로 데려다주는 그런 달팽이 택시가 아니었다. 박사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한 고도성장기와 달리 지금 한국엔 박사는 넘쳐나는데 박사를 위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박사들은 끊임없이 계속 배출되어 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수요가 많은 몇몇 인기 분야를 제외하곤 긴 학위과정을 버텨낸 ‘박사님’이 갈 수 있는 자리는 대부분 단기 계약직에 연봉도 터무니없이 적은 경우가 많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 독립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교수직이나 연구원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일종의 추가적인 학위과정처럼 되어버린 박사후연수(포닥)를 생물학 분야의 경우 보통 5년 이상, 길면 10년 가까이 해야 한다. 특히 이때 많은 국내 박사들이 해외로 떠난다. 몇 안되는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나가는 연구실에서 우수한 연구 성과를 올려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달팽이 택시를 타고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 떠나는 다우어처럼, 많은 국내 박사들이 언젠가 자신의 연구실을 꾸릴 꿈을 품고 수준 높은 연구실을 찾아 해외연수를 떠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 연구자가 되기 위해 견뎌내야 할 다우어 시기 덕분에(?) 젊은 박사들은 꽤 긴 기간 동안 타국에서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를 얻게 된다. 나도 미래에 내 연구실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자 현재 있는 연구실에 포닥으로 합류하게 되었고, 덩달아 미시간 호숫가에서 미국이라는 흥미로운 나라의 한 조각을 겪어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보는 특별한 경험은 내가 과학이라는 달팽이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쉽게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 연구실은 ‘다른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다우어들의 보금자리 같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태평양을 건너온 외국인 다우어들도 있고,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아이다호 등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 하는 멀리 떨어진 주에서 온 미국인 다우어들도 있다. 생물학에 매료되어 과학자에게 주어진 ‘견디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다우어들이 이룬 연구실 공동체에는, 어쩌면 연민에서 비롯되었을 온기가 훈훈하게 흐른다.

팍팍한 연구실 생활 속에서도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동료를 넘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따뜻하고 포근한 경험이다. 서로를 잠재적 경쟁자로 보기보단 진심을 다해 서로를 돕고, 엇비슷하게 주어진 삶의 퍽퍽한 자리들을 나누고 공감하면서 위로를 얻는다. 마치 혼자 추는 춤보다 함께 추는 춤이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다우어의 춤처럼, 함께 최선을 다해 힘든 시기를 견뎌나가는 연구실 공동체 덕분에 나는 오늘도 희망을 놓지 않고 ‘다른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주엔 한국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역사적인 추위가 내가 있는 시카고 지역을 강타했다. 영하 30도, 체감기온으로 따지면 영하 50도까지 내려간,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혹한이었다. 학교를 폐쇄시킨 북극의 찬 공기는 다행히 이틀 만에 물러갔고, 나는 검정치마의 ‘Antifreeze’를 귀에 꽂고 하얗게 얼어붙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오늘도 연구실로 향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면 봄이 올 것이다. 견디는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그래야만 한다.

“숨이 막힐 것같이 차가웠던 공기 속에/ 너의 체온이 내게 스며들어 오고 있어/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검정치마, ‘Antifreeze’ 중)

▶필자 이대한

벌레 유전학자. 예쁜꼬마선충(노벨상도 여럿 배출한, 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벌레다)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여전히 벌레를 연구하고 있다.』

이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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