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잘못된 논문에.."슬라임 유해성 과장됐다"

송경은 기자 2019. 1.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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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기준치 7배" 주장 서울대 논문, 표준문서 기준치 오인해 과장된 결론 얻어

삼켰을 때 몸에 남는 붕소량을 제품에 함유된 붕소량으로 오인
실제보다 부풀려진 붕소 화합물 유해성… 공포감 부추겨

슬라임(액체괴물). 어린이는 물론이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슬라임이 유해성 논란에 휩싸였다. - 동아사이언스DB

어린이는 물론이고 성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슬라임(액체괴물)에서 유럽연합(EU) 기준치의 최대 7배에 달하는 독성물질이 검출됐다고 밝혀 슬라임 불매 운동에 큰 영향을 준 서울대 논문의 분석 결과가 실제보다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EU 기준은 슬라임을 삼켰을 때 몸에 남는 붕소의 양(예상 섭취량)에 대한 기준치인데 연구진이 슬라임 속에 든 붕소 전체의 양(함량)을 기준으로 삼은 결과다. 국책 연구비를 써 얻은 연구 결과가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만 준 셈이다.
   

앞서 이기영 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팀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슬라임 제품의 붕소 함량을 분석한 결과, ㎏당 75~2278㎎(평균 1005㎎)의 붕소가 검출됐고 30개 중 25개(중국산 21개, 국산 4개)가 EU의 완구 내 붕소 함량 기준인 ㎏당 300㎎을 초과했다”고 지난해 12월 18일 ‘한국환경보건학회지’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지난해 11월 30일 학회지 측에 제출된 지 18일 만에 게재됐고 이달 초부터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구진이 논문에서 언급한 EU 표준문서인 ‘장난감안전기준(EN 71)-3: 일부 원소의 용출에 관한 사항’ 원문에 따르면, ㎏당 300㎎은 장난감 속 붕소 함량이 아니라 ‘입으로 삼킨 장난감이 위 속에서 2시간 동안 방치됐을 때 위산에 의해 녹아 나올 수 있는 붕소의 양’에 대한 기준치로 확인됐다. 이는 다른 말로 ‘용출량’이라고 한다. 슬라임을 삼킨 뒤 몸에 남는 실질적인 붕소 섭취량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구진은 논문에서 “경구 노출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본보가 대한화학회와 함께 이를 확인하고 이 교수와 통화한 결과 이 교수는 “연구진이 이런 얘긴 하지 않았다”며 “사실이라면 용출량을 다시 계산해야겠다.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뒤 이은 통화에서는 “사전에 EU 표준문서에 나온 분석법을 알고 있었지만, 규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구이기 때문에 돈이 덜 드는 비슷한 방법으로 측정했다”며 “결과에 큰 차이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용출량은 함량보다 훨씬 적다”며 “서울대 논문에서는 EU 표준문서를 인용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사용한 용액의 농도 등 분석방법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덕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장(서강대 화학과 교수)도 “함량과 용출량이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려면 이를 입증해야 한다. 학술적으로도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용출량을 측정하는 방식과 함량을 재는 방식에는 비용 차이가 거의 없다”며 “연구자는 국민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기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기영 교수팀은 어린이용품의 환경유해물질 연구를 위해 환경부 재원으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으로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총 13억6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 1일부터 EU와 동일한 기준으로 장난감의 붕소 용출량을 규제하고 있다. 당초 올해 도입할 예정이었던 붕소를 비롯한 유해물질 8종에 대한 규제를 업계 부담 등을 고려해 3년 뒤로 유예했었는데, 유럽을 중심으로 슬라임의 붕소 화합물 유해성이 강조됨에 따라 지난해 12월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완구 안전기준을 개정해 8종 중 붕소만 올해부터 즉시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자료: 한국환경보건학회지·EU 장난감안전기준

슬라임 유해성 논란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매 운동에까지 이어질 정도로 불거진 것은 최근 1년 사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슬라임 제품 190종 가운데 97종에서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일으킨 호흡기 질환의 원인 물질로 알려진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등이 기준치를 초과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대규모 리콜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울대 환경보건연구소 논문이 발표되는 등 붕소 화합물까지 가세하면서 슬라임은 ‘유해물질 덩어리’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슬라임 관련 업계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받은 제품’ ‘천연물질만 사용한 제품’ ‘안전 기준치 충족 제품’ 등을 내세우며 수습에 나섰지만 일부 영세 업체들은 폐업 위기에까지 내몰리게 됐다.

● 슬라임에 쓰인 '붕사'는 세제·화장품 첨가물…국제표준기구(ISO)도 규제 안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슬라임의 유해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지적한다. 유럽과 한국을 제외한 미국, 일본 등 다른 선진국은 물론이고 국제표준기구(ISO)도 가공제품에 대한 붕소와 붕소 화합물 사용을 규제하지 않고 있다. 산자부 관계자는 “EU가 붕소를 비롯한 유해물질 11종에 대한 추가 규제를 ISO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미국의 반대로 아직까지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올해 도입키로 했던 유해물질 8종에 대한 규제를 유예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붕소(B)는 자연 상태에서 그대로 존재할 수 없고 붕산, 붕사 같은 붕소 화합물 형태로 존재한다. 특히 슬라임에 들어간 성분인 붕사(Na2B4O7·10H2O, Borax)는 약알칼리성 붕산나트륨염으로 붕소 화합물 가운데서도 위험성이 낮다. 액체 물질에 점성을 주는 붕사는 돌가루의 일종으로 비누, 세제, 화장품, 항균제 등에 흔히 활용되며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붕사를 넣어 만든 슬라임 속에 극미량의 붕산(H3BO3)이 포함돼 있을 순 있지만 역시 소독제, 연고 등에 쓰이는 약산성 물질로 고농도가 아니라면 피부 노출로는 큰 유해성이 없다.

슬라임 재료로 활용되는 붕사(붕산나트륨염)는 약알칼리성 물질로 붕소 화합물 중에도 위험성이 낮은 편이다. 비누, 세제, 화장품, 항균제 등에 흔히 활용되며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 청솔제약 제공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성인은 30g, 어린이는 5~6g이 넘는 많은 양의 붕산이 체내에 유입됐을 경우 위, 소장, 간, 뇌 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고 최대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당 약 1008㎎의 붕소가 든 슬라임을 삼켰을 때 모든 붕소가 2시간 내 전부 위산에 의해 녹아 붕산 형태로 나온다고 가정하더라도 4㎏ 이상을 삼켜야 위험한 수준이다. 손으로 만지는 슬라임으로 붕소 화합물이 독성을 나타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또 삼킨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함량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이 몸에 남으며 그 중에서도 붕산은 매우 적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미국에서도 슬라임을 두고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이 붕소의 유해성이 그동안 간과돼 왔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미국화학회(ACS)의 릭 사클레벤 모멘타파마슈티컬스 연구원은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형태의 붕소가 같은 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슬라임에 쓰인 붕사는 붕소 화합물 중에서도 유해성이 매우 낮은 물질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어 “붕산의 경우에도 아이들이 섭취하지 않는 한 해를 끼칠 리 없는 물질”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가 EU의 기준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규제로서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화학회는 “어떤 물질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려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결과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국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붕소처럼 국제적으로도 규제하지 않는 물질을 ‘유럽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도입하는 것은 규제기관의 비전문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송경은 기자 kyunge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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