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총량의 법칙 [김형완의 눈]

2019. 1. 9.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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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는 ‘지랄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생경한’ 말을 오해 없도록 풀어 전해드리면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타고난 지랄의 총량이 있게 마련이다. 이 지랄이라는 것이 대개 생애주기상 사춘기 때 폭발적으로 발현되는 법이어서 아이들이 사춘기에 지랄 좀 떨기로서니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분노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통을 빗댄 이 기발한 작명을 차용해 요즘 비슷한 용어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행복총량의 법칙’ 또는 ‘고통총량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타고난 행복 또는 고통의 총량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내게 주어진 행복총량의 감소를 뜻하므로 이제 다가오는 고통에 예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지금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의 강도만큼이나 나에게 주어진 고통총량의 소진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제 곧 행복해질 징조라는 얘기다. 이런 말들에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삶이 각박하고 미래가 암울할 때일수록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생활 경구들이 회자된다. 그만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마약류 진통제처럼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뿐 아니라 마치 심리적 보상을 받는 것 같은 위로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심리적 착각에 빠진다고 현실의 고통이 사라질까. 고통의 서사와 맥락이 지워진 채 회심만을 소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비현실적 기만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단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불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으로 보상될 것이라면 이따위 고통이 뭐가 문제겠는가. 고통의 호소는 참을성 없는 엄살로 전락되고, 그 고통에 연대하는 이들의 숭고한 수고도 허망한 일이 되고 만다.

행복과 불행이 저마다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고통의 실체, 불행의 맥락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 지랄도, 불행도, 고통도 내 운명 가운데 총량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 속에 총량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회적으로 구성된 거대한 지랄, 고통, 불행들은 배설의 비상구를 찾아 배회하다가 가장 취약한 고리를 찾아 뚫고 분출된다. 불행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만, 애꿎게도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독박을 쓰는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존재 자체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이들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단지 자애와 긍휼심의 발로가 아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양심의 결단인 셈이다. 그들의 고통에 나의 책임을 묻는 것,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최소한의 도리 아니겠는가.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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