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제주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자연을 닮은 사람들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2018. 12. 27. 21:1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멋진 여행을 마치며

제주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에게 제주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을 부탁했다. 그는 동틀 무렵 백록담에서 찍은 한라산의 그림자 사진을 보내줬다. 강정효 제공

조류학자·지질박사·화산학 스승·지질공원해설사·기록 작가…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도를 제 몸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들 섬의 구석구석까지 탐구하며 살뜰히 아끼는 그들이 있기에 세계자연유산 제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섬이다

제주의 탐험가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제주도에는 탐험가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탐험가는 포괄적 의미다. 과학적 발견을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부터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도를 아끼는 사람들을 모두 칭한다. 이번 제주도 탐험을 통해 만난 탐라도의 탐험가들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소개하려고 한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김완병 박사는 조류학자다. 그는 새 울음소리만 듣고도 둥지의 위치를 찾아낸다. 이렇게만 보면 천생 조류학자지만 전부가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제주도를 구성하는 여러 학문과 맞닿아 있다. 제주도의 새는 숲에 살고 숲을 이루는 나무는 용암대지 위에 뿌리를 내렸다. 관점을 확장해보면 조류학은 지질학, 생태학, 문화까지 연결돼 있다. 처음 그와 만나던 날을 기억한다. 박물관 카페 뒤편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짧은 시간에 제주도 전체를 내 머릿속에 그려줬다. 자칫 지질학이 제주도 과학의 전부로 인식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균형감을 심어줬다. 그와 함께 한라산 조릿대 숲을 헤치고 만난 숨은물벵듸습지의 장엄함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의 동료인 김현경 학예연구사는 지질 분야 연구와 전시를 담당한다. 박물관에 들를 때마다 제주도 탄생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아니었다면 설문대할망의 제주 탄생 설화 이면에 제주도 섬 모양이 좌우로 길게 늘어진 게 판구조론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제주도청 세계유산본부 전용문 박사는 나의 화산학 스승님이다. 검은색 용암대지를 떠올리면 그의 얼굴이 첫 번째로 떠오른다. 지난 10년간 국내외를 탐험하며 많은 지질학자를 만났다. 야외 답사에서 그처럼 명료하게 지구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제주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했고,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현장심사단 위원으로 활동하며 제주는 물론 우리나라 지질공원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지질공원해설사들 사이에도 그는 인기 최고다. 전 박사가 등장하면 해설사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내용이지만 허투루 듣지 않고 받아 적는다. 만약 화성탐사에 함께할 지질학자를 선발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그를 뽑는다. 태양계 화산활동의 비밀을 밝혀낼 최고의 적임자다.

화산지층으로 유명한 수월봉 입구에 가면 고춘자, 박정희, 장순덕 지질공원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수월봉 인근에 위치한 고산리 주민이다. 각자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은 고향의 자연을 설명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지질공원해설사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거쳐 선발한다. 지질공원의 과학적 가치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설화를 들려줄 사람들은 그들뿐이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참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김완병 박사를 통해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김찬수 소장을 처음 만났다. 식물분류학자인 그와 대화를 나눈 건 한 시간 남짓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제주도에 산림연구소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의 식물탐험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제주도에 분포하는 관속식물을 연구하는 그는 제주도와 식생이 비슷한 몽골 알타이 지역 탐사를 통해 제주에 서식하는 식물의 기원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그는 정년퇴임을 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식물탐사에 꼭 동행해보고 싶다.

제주생태관광협회 이성권 보전국장은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그는 사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제주의 식물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을 한다. 김완병 박사와 숨은물벵듸습지에 가던 날 그를 처음 만났다. 민망한 자세를 하고 식물의 이름을 부르며 사진을 찍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몇 달 후 우연히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 그와 조우했고, 집필한 책을 받아 읽어봤다. 책에도 식물과 대화하던 그의 푸른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송시태 박사를 알기 전까지 곶자왈이 공원 이름인 줄 알았다. 지금이야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그의 호기심과 열정이 없었다면 곶자왈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2017년 11월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함덕중학교 도서관에서 두 시간쯤 대화를 나눴다. 그가 이토록 끊임없이 제주의 허파인 곶자왈을 연구하고 보전하려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나는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도를 몸의 일부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제주사람들은 제주를 그렇게 여겼다.

제주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의 제주사랑은 한라산을 닮았다. 한라산에 대한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그의 책 <한라산 이야기>를 꼽는다. 한 권의 책에 한라산과 제주에 얽힌 이야기의 정수가 담겨 있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한라산과 제주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제주사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는다. 아름다움 이면에 새겨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인 4·3사건을 널리 알리고 치유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올해는 4·3사건 70주기여서 더 그의 역할이 컸다. 12월 초 한라산이 보이는 그의 작업실 이소재에 다녀왔다. 제주와 한라산에 대한 보석 같은 기록물들이 서가를 가득 메웠다. 그는 “제주도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누군가의 노력도 있겠지만 그만큼 제주의 자연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만큼의 가치를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고의 세월 동안 제주의 자연을 보전하고 지켜온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인이 주목하는 자연유산이 됐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형을 기록 중인 김기삼 작가도 내게 큰 울림을 줬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해녀계로 함께 촬영을 나섰다. 해녀계에 도착한 그는 촬영 얘기는 하지 않고 해녀 삼촌들의 물질 준비를 거들었다. 촬영 시간은 5분 남짓했지만 촬영이 성사되기까지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해녀계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5분이었다. 40여년 가까이 제주인의 삶과 자연 그리고 무속신앙을 기록해온 그는 “제주의 원형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나시기 전에 필름으로 기록해 두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이 맞다. 제주의 원형을 기억하는 ‘기억자’들이 점점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제주는 기록만 하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탐험이 끝나갈 무렵 71년 전 만장굴을 발견한 김두전 선생님(85)을 만났다. 담임교사인 부종휴 선생님과 함께 횃불을 들고 만장굴을 발견한 주인공이다. 만장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짧은 대화를 나눴다. 두 가지가 가슴 깊이 남았다. 전문가가 아닌 초등학생들이 짚신과 횃불에 의지해 세계 최대 규모의 용암동굴을 발견한 경우는 없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발견은 디지털 환경에 잠식된 우리가 자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더불어 누구라도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스승을 꼽는다. 하지만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각나는 스승이 있냐고 되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김두전 선생님이 기억하는 부종휴 선생님은 사제관계를 넘어선다. 횃불에 의지해 미지의 세계로 함께 들어간 스승이자 동료로 기억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 내딛는다는 것의 의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서울사대부고 학생들이 제주도 환경보호캠페인에 참가한 뒤 제주 여행자들에게 보내는 삼행시. 임세화 제공

제주도 여행자들에게 보내는 삼행시

올 한 해 제주를 주제로 강연을 많이 했다. 기억에 남는 두 학교가 있다. 책을 내고 첫 강연을 했던 서울사대부고 임세화 교사로부터 지난 9월 연락을 받았다. 지구과학 교사로서 강연을 듣고 제주를 답사하고 싶은데, 조언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잠시 잊고 지내다가 11월쯤 다시 연락이 왔다. 학생들과 함께 ‘제주도 환경 보호 캠페인’ 활동을 했고, 그중 학생들이 직접 쓴 ‘제주도 여행자들에게 보내는 제주도 삼행시’가 있다며 보내왔다. 10대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느껴져 지면에 소개한다. 조혜빈 학생은 “(제)비야 제비야, 소식을 전해주오. (주)위를 돌고 세상을 돌아 나에게 다시 올 때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제주의 가치를 모두에게 알렸음을”이라고 했고, 김초원 학생은 “(제)주는 세상에 있는 섬 중 가장 아름다운 섬입니다. (주)로 동식물의 삶의 터전이자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곳이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유산을 품고 있는 소중한 제주를 마음 모아 보호해주세요”라고 적었다.

지난 10월 제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양산 서창고 아이들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연초 서창고 박지윤 교사로부터 장문의 e메일을 받았다. 제주도 수학여행을 앞둔 2학년들에게 특강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타 지역에 비해 여행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라 수학여행에 큰 기대를 하고 있어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수학여행을 두 달 앞둔 9월에 서창고를 찾았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와서 강연 내내 행복했다. 몇 달 뒤 제주 수월봉에 근무하는 고춘자 지질공원해설사로부터 “서창고 아이들이 얼마나 수월봉에 대해서 공부를 해왔는지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질문을 받았다”고 연락을 받았다. 그렇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 얼마 전 제주에 첫눈이 내리던 날 제주생태관광이 운영하는 동부관광지순환버스투어에 참가했다. 렌터카 대신 버스를 이용해 동백동산곶자왈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다시 주차장까지 걸어야 하는 불편함은 기우에 불과했다. 느리게 이동하니 더 자세히 보였다. 곶자왈 탐방을 마친 후에는 선흘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도토리 칼국수를 직접 만들어 먹는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제주생태관광에 근무하는 윤선주씨는 “여행의 수익이 지역주민들에게 돌아가는 형태가 여행자와 지역주민, 자연 모두가 지속 가능한 여행”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제주의 관광자원인 자연이 건강하려면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지역주민의 삶이 건강해야 한다. 이런 작은 움직임들이 제주의 여행문화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는 제주도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나도 이번 탐험을 통해 제주도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란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알게 됐다. 더불어 제주도를 아끼고 보전하려는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가 제주도의 과학자와 탐험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의 목소리를 내 가족에게, 친구에게 전달하는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작은 행동이 모인다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 제주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인이 제주의 가치를 알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제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섬이다.

< 시리즈 끝 >

▶필자 문경수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이 있다.』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