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부터 자유·평등·박애 외치는 프랑스 교과서 공화국을 지탱하는 건 역시 교육이구나 싶어 [다른 삶]

곽원철 2018. 12. 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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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시내 도서관에서 어린이·아기 도서전이 열리고 있어 가보았다. 우리 아이도 좋아할 법한 <안녕하세요 소방관 아저씨> <모두 응가를 해요> 등의 책들이 눈에 띈다. 곽원철 제공

숨은그림찾기 책에 빠진 딸 위해 싸고 질 좋은 한국어판 책을 구입 같은 책이라도 굳이 부제를 달아 학습도서화 시킨 건 좀 아쉬워

이제 막 두 돌을 넘긴 레나가 요새는 유아용 숨은그림찾기 책들에 빠져 있다. 일상을 묘사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강아지나 기린 등 좋아하는 동물을 찾아내며 아빠에게 자랑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다. 주말이면 동네 도서관에 레나를 데려가 어린이책들을 보여주곤 한다. 무턱대고 서점에서 아무 책이나 사주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기가 그때 그때 어떤 종류의 책들에 흥미를 보이는지 관찰하고, 그중에서 엄마·아빠가 매일 저녁 읽어줄 만한 책을 고르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도서관이 있고 유아와 어린이들이 책을 읽고 고를 수 있는 공간이 잘 구비되어 있는 편이라, 근처 마을들의 도서관을 순례하고 그 동네들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알찬 주말 가족 나들이가 되고는 한다.

얼마 전에 옆 동네 도서관에서, 레나가 자기한테는 아직 좀 어려울 듯한 숨은그림찾기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림도 예쁘고 하니 나중에 커서도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아 사주기로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여 결제를 하려던 찰나, 이 책 시리즈는 원래 영국에서 출판된 것인데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한국어판도?’ 싶어서 국내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보니, 있다. 더구나 온라인 할인가를 적용하면 가격도 25%가량 더 싸다! 마침 11월에 한국에 들어가는 길에 한국 어린이책들을 많이 사두려고 하던 참이었다. 한국어판을 시리즈로 사서 다른 책들과 함께 프랑스로 가져왔다. 어차피 그림이 거의 대부분이고 글은 몇자 안되니 영어건 프랑스어건 한국어건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제지 강국인 한국에서 인쇄된 책이라 그런지 싼값에도 불구하고 종이질도 좋다.

프랑스에서는 디자인이 예쁘고 품질도 좋은 아기옷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데, 비슷한 정도 품질·디자인의 아기옷을 한국에서 사려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비싼 경우가 많다. 반면 아기책들은 한국이 대체로 싼 편이고 내용이나 품질도 좋다. 레나가 자라면서 한국어 교육도 많이 신경써야 할 터인지라, 앞으로도 한국책, 특히 우리말 어감이 살아 있는 한국 작가들의 책을 많이 사주려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아이들을 키운 다른 한인 가정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프랑스어는 학교 가면서 자연히 배우게 되니 걱정할 필요 없고, 집에서는 한국어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같은 책이 영국·프랑스·한국에서 모두 출간됐는데 한국어판에만 부제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좋아지는 숨은그림찾기’라고. 굳이 부제를 붙여서 난데없이 학습도서화시킨 것은 좀 아쉽다. 하지만 영국판과 프랑스판은 일반 명사에 가까운 ‘Look and Find(Cherche et Trouve)’라는 무성의한 제목을 붙인 데 비해, 한국어판에 ‘너도 찾았니?’라는 귀여운 제목을 궁리해서 붙인 것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고 보니 지인이 한국에 돌아가면서 물려준 전집 유아책에도, 불과 1~3세 유아를 대상으로 한 책인데도 ‘일상생활에서 놀이 하듯 수학 개념을 익혀요’라는 등의 설명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굳이 아기에게 그런 걸’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역시 아기의 지능 계발에 무감각한 아빠이기 때문이려나. 하긴 나도 이제 겨우 간단한 단어 몇개로 의사소통을 시작한 아기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킬 걱정을 하고 있으니.

레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한국인인 만큼 당연히 한국 국적을 부여받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여권도 돌이 채 되기 전에 주불 영사과를 통해 발급받았다. 프랑스의 국적법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알고 있는 미국식 ‘속지주의’와는 달리 프랑스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자동으로 국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국적과 상관 없이 프랑스 내에 거주하는 어린이는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이 나라의 이념이자 정책인 만큼, 사실 아이의 국적은 크게 의미가 없기도 하다. 아이가 10대에 이르러 5년 동안 연속으로 프랑스에서 거주하면 본인과 부모의 의사에 따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13세, 16세, 18세에 각 한 번씩). 프랑스는 의무 교육 시스템이므로 이는 곧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느냐의 여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교육에 관심은 프랑스도 못지 않아 의무 교육 이수가 국적 취득 요건 서점서 본 중학생용 윤리교과서는 평등을 위해 행동하는 법 가르쳐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전 국민적으로 지대하기로는 프랑스도 한국 못지않다. 우리나라에서의 관심은 개인의 경쟁력 향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의무 교육 이수가 국적 취득의 자격 요건일 정도로 공화국의 정체성과 동일시된다고 할까. 이는 프랑스의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들여다보면 공화국의 이념과 그 미래의 지향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프랑스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교육받고 자랄 레나에게는, 엄마·아빠를 통해 받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프랑스인의 정체성도 (국적 취득 여부와 상관없이) 스며들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는 당연히 이 아이가 받을 프랑스의 교육이 무엇을 가르칠지 벌써부터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데, 나름 ‘미리 보기’를 할 수 있었다. 지난가을 레나에게 새 동화책을 사주러 시내 서점에 갔을 때, 마침 그다음주가 개학이라 초·중·고 새 학기 교재들이 좍 깔려 있었던 것이다. 레나가 중학교에 가려면 아직 10년도 넘게 남았지만, 중학생용 윤리 교과서가 눈에 띄어 열어 봤는데 목차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다양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내용 위주로 되어 있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스스로 조사하고 직접 행동에 옮길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몇가지만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1부 중학교에서의 생활

1과 | 함께하는 중학생활

- 토론: 중학교에서의 평등이란?

- 알아 보자: 중학교에서 라이시테(정교분리)를 어떻게 실천하나요?

- 토론: 여자 방식, 남자 방식?

-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에 대항하는 교육 주간

...

2부 평등과 다양성

3과 | 같음과 다름

- 탐구하자: 평등이란 무엇인가?

- 조사하자: 인간과 인류

- 조사하자: 정체성, 모두를 위한 그리고 각자를 위한

4과 | 차별과 싸우기

- 조사하자: 차별이란 무엇인가?

- 우리가 나서야 할 때: 차별에 저항하기

- 조사하자: 성차별에 맞서 행동하기

3부 평등과 연대

5과 | 공화국과 연대

6과 | 사회적 불평등과 맞서 싸우는 시민

4부 평등과 책임

7과 | 공동의 안전을 위해 행동하기

역시 온갖 복잡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화국을 지탱하는 것은 교육의 힘인가’ 싶게 만드는 교과 과정이랄까.

동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고 있는 레나. 오른쪽은 테러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어린이용 그림책 <우리를 무섭게 하는 말과 장면들>.

테러에 대한 어린이용 그림책은 두려움에 맞서는 법에 대해 말해 문득 세월호를 겪은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 했나 의문

작년 가을, 당시 레나에게 슬슬 이야기와 그림이 있는 책을 사주기 시작할 때라, 시내 중심가의 도서관에서 열리던 어린이·아기 도서전에 가보았다. 전시된 책들 중에서 <우리를 무섭게 하는 말과 장면들>이라는 어린이용 그림책을 발견했다. 테러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잠든 레나를 품에 안고 서서 읽어 보았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 있지 않으니 내가 일부 번역한 내용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문득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궁금해졌다.

“가끔씩 너무 끔찍한 일이 벌어져서,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불안해져요. 그럴 때면 우리 모두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어져요. 우리가 아직 어리지만,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요. 생각을 하려면 단어(말)가 필요해요. 어떤 말들은 들으면 안심이 되고, 어떤 것들은 너무 무서워요. 중요한 건 이해할 수 있어야 얘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를 돌봐주는 어른들이 뭔가를 걱정하거나 신경 쓰고 있으면, 우리도 그걸 느껴요. 아무 말도 안 해줘도요. 우리는 어른들이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것도 듣고, 무서운 장면들을 보고 있는 것도 알아요.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요.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걸 까먹나봐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요. 아이들이 무서워한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어리지만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많아요.

테러리스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걸 참지 못해요. 그래서 그들은 폭력을 저지르고 테러를 일으켜요.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싶어 해요.

테러 공격이 있은 후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함께 1분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침묵함으로써 희생된 사람들을,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죽은 곳에 가서 꽃이나 촛불을 놓기도 했어요. 슬픈 일을 모두다 함께 나누면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져요.

우리 친구들 중에 누가 너무 슬퍼할 때,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하고 또 그 친구가 우리에게 왜 슬픈지 얘기할 수 있으면 훨씬 좋아져요. 아이들도 어른들을 위로할 수 있어요.

너무 두렵고, 너무 고통스러울 때, 너무 끔찍하고 두려운 걸 봤을 때에는, 그에 대해 얘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좋아져요. 두려움이 가시지 않으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즉 의사나 상담사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다행히 어른들은 아이들을 돌봐줘요. 엄마·아빠, 선생님, 유모, 의사 선생님들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하대요. 집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안전해요. 시내에는 우리를 보호하는 게 직업인 어른들이 있어요. 경찰, 군인, 소방관 아저씨·아줌마들이에요. 이런 어른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알면 겁이 덜 나요.

우리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게 누구인지, 데리러 오는 사람은 누구인지, 쉬는 시간에는 누구랑 뭘하고 놀 건지 알고 있으면 안심이 돼요. 어른들이 우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단어들이 있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하게 하는 단어들이 있어요. 어른들은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해 얘기해요. 그게 프랑스의 정신이래요. 이 단어들을 이해해두면 좋아요. 우리를 함께하게 만드는 말들이니까요. 우리가 함께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게 바로 테러리스트들이 싫어하는 것들이에요.

모든 사람은 생각할 자유가 있고, 원하는 걸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선택할 수 있대요. 그게 자유래요.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가진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해요. 그게 평등이래요. 우리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 돕는다는 걸 알면 기분이 좋아요. 모두가 형제 자매처럼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박애예요. 좋은 걸 보고 들으면 더 좋아진다는 게 또 좋아요.”

『▶필자 곽원철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했다. 외국계 기업의 국내 사업과 국내 기업의 해외 사업, 재벌 대기업 기획실과 스타트업의 프로젝트 팀장, 기술 기업의 엔지니어와 전통 굴뚝산업 기업의 신사업 개발 등 다양한 업무를 오가다 2009년에 아무런 기약없이 훌쩍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알프스 자락에 걸친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늦둥이 어린 딸 레나와 함께 살고 있다.』

곽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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