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제노바 교량 붕괴 사고 이후..피해자들 "우리는 버려졌다"

이희경 2018. 12. 20. 14: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14일 이탈리아 제노바. 승용차 후드를 뚫을 듯이 거세게 내리는 비를 헤치며 나탈리야 옐리나는 약혼자와 함께 제노바의 모란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빗길 운전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그는 갑자기 다리가 선박 통행을 위해 열리는 도개교처럼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는 승용차와 함께 30m 아래로 떨어졌고, 차가 뒤집힌 상태로 콘크리트 더미와 함께 묻혔다.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그는 차량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경적을 울렸다. 옐리나는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절망적인 순간이 흐른 후 옐리나는 자신의 차량을 덮친 다른 차량에서 구조대가 한 남성을 구조하는 것을 알게 됐다. 4시간여 동안 다리 잔해 속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구조되는 순간이었다.

옐리나는 이탈리아 재난 역사상 가장 큰 비극으로 불리는 지난 8월 제노바 다리(교량) 붕괴 사고 생존자 16명 중 한 명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사장교로 제노바의 브루클린 브릿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모란디 다리는 상판 200m 구간이 무너지면서 43명의 사망자를 냈다. 다리 붕괴를 둘러싼 원인 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외신은 옐리나와 같은 생존자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겪고 있음에도 이탈리아 정부가 이들의 치료 및 지원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비극의 후유증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가디언은 옐리나를 비롯한 제노바 다리 붕괴 사고 생존자 4명을 인터뷰하며 이렇게 전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며 감사했지만 사고 이후의 삶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심리적 상처를 안고 있다고 증언했다.

사고 이후 목 부상 등을 치료하며 지난달 퇴원한 옐리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약혼자와 곧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함께 미용실을 운영하며 지역 연극 동아리 단체에서 활동할 만큼 활발한 성격 때문에 곧 회복될 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신체적인 아픔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정신적 고통이 커져갔다고 옐리나는 설명했다. 그는 “신체가 아플 때는 그냥 그 아픔에만 집중하고 증상이 낫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면서 “하지만 (신체적으로 회복된) 지금은 비가 내렸고 번개가 쳤던 당시의 날씨가 떠오르고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붕괴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를 덮쳐온다”고 털어놨다.

사고가 발생한 당일 축구 경기 티켓을 사기 위해 제노바로 가다 추락한 다비드 카펠로 역시 심리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사고 당이 제노바 다리 위를 주행하다 갑자기 시야에서 차량 2~3대가 사라지자 급정거를 했지만 끝내 추락한 카펠로는 생존자 중에서도 부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전직 축구 선수로 소방관인 그는 추락한 뒤에도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고, 부상 정도를 구조대에 알릴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복직한 뒤 불면증과 잦은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카펠로는 “삶이 완벽히 달라졌다. 사고 예전의 나와 지금 내 모습은 다르다”며 “한편으론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비극적인 기억 속에서 매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궂은 날씨 탓에 해변으로 갈 계획을 접고 제노바 아쿠아리움을 보러 가다 사고를 당한 리타 지안크리토파로와 그의 남자친구 페데리코 세르네는 2개월 동안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다시 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르네는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심리적인 충격이란 측면에서 내 삶은 영원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의 삶이 이처럼 피폐해져 가고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 차원에서 이들을 위한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현재 다리 유지 및 운영에 책임이 있는 건설업체 아틀란티아는 다리 재시공과 사망자 유가족 보상금으로 3억5000만유로를 책정해놨지만 생존자들을 위한 지원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옐리나는 “우리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버려졌다”며 “정치인들이 방송에서 인터뷰를 계속 하고 있지만 말 뿐”이라고 말했다. 옐리나는 함께 사고를 당해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약혼자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병원비나 세금지원과 같은 경제적 대책도 없었다고 전했다. 지안크리토파로는 “우리가 병원을 나선 순간부터 우리는 의사의 방문 비용, 정신적 치료를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했다”며 “다리를 다시 세우고, 죽은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건 정상적”이라면서도 “정부 관계자 그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사진=AP·연합뉴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