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를 넘어 전통과 미래의 상징으로

2018. 11. 1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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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한겨레] 브랜드 읽어주는 여자-비비안웨스트우드

지드래곤의 뮤직비디오 <삐딱하게> 한 장면.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을 입고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지드래곤 <삐딱하게>, 싸이 <강남스타일>, 소녀시대 <아이 갓 어 보이> 뮤직비디오의 공통점은? 영국을 대표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의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지드래곤의 슈트, 싸이의 셔츠, 소녀시대의 드레스를 보면 복고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차려입은 편안함’을 콘셉트로 고전적인 우아함, 현대적인 세련미를 바탕으로 시크함까지 어우러진다. 이는 ‘과거를 전통으로 미래로’ 연결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만의 특징 때문이다.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 한 장면.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을 입고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이런 콘셉트는 모든 제품에 나오는 독특한 심벌 ‘THE ORB&LING’에서도 드러난다. 십자가와 행성 등을 조합한 형태로 ‘ORB’는 전통과 과거, 주위를 둘러싼 위성고리는 미래를 상징한다. 실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새 디자인 창조는 모두 과거 전통을 살려 미래와 교류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트레이드마크인 트위드, 타탄체크, 니트 트윈 세트, (영국의) 클래식 테일러링이 대표적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심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펑크의 여왕이자 영국 패션의 대모로 불린다. 그가 창시한 펑크 문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혁신적인 하위문화 스타일로 정착됐다. 동업자이자 연인이던 맬컴 매클라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매클라렌은 1984년 결별할 때까지, 패션과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질적인 패션계 입문 역시 1971년 그와 함께 런던 킹스로드에 차린 ‘렛잇락’에서 비롯됐다.

생애와 패션계 입문

1941년 4월8일 잉글랜드 더비셔의 작은 마을 평범한 가정에서 첫째로 태어난 비비안 이자벨 스퀘어(본명)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16살 무렵 가족과 런던으로 이사한 뒤 해로아트스쿨에 입학했지만, 사범학교에 진학해 안정된 직장을 갖기 위해 한 학기 만에 중단했다. 결혼 역시 비교적 이른 21살 때 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은 1962년 댄스홀 매니저였던 데릭 웨스트우드와 결혼하면서 바뀐 성을 따른 것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패션에 대한 웨스트우드의 감각과 소질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훗날 그는 “일곱살 때임에도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선보인 뉴룩을 인상 깊게 생각했다. 뉴룩을 모방해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0대 때부터 종종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교직에 있으면서도 틈틈이 액세서리를 만들어 벼룩시장에 내다 팔며 패션을 향한 관심과 열정을 이어나갔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패션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행보는 데릭 웨스트우드와 이혼한 뒤, 18살 매클라렌을 만난 1965년 이후부터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매클라렌은 예술과 역사에 조애가 깊었으며, 예술학교 경험을 살려 섹스피스톨스 등 록그룹 매니저로 활동했다. 성과 마약에 탐닉하고, 로큰롤과 아방가르드 미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 패션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렛잇락’ 매장에서는 매클라렌의 영향으로 구제품을 DIY 방식으로 제작한 펑크풍 의상을 팔았다. 옷을 찢거나 자르고, 지퍼와 안전핀 등 금속 장식을 붙여 자유와 반항을 상징하는 식이었다. 또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등 과격한 메시지가 담긴 티셔츠를 팔아 젊은층에게 인기를 끌었다.

‘렛잇락’ 매장은 이후 여러 차례 상호를 변경한다. 제임스 딘에 영감을 받아 1072년에는 ‘투 패스트 투 라이브, 투 영 투다이’로 바꿔 가죽재킷 등 바이커 관련 제품을 팔았다. 1974년과 1976년엔 ‘섹스’와 ‘세디셔니리스’로 교체해 고무·가죽·지퍼 등 섹스, 포르노그래피, 성적 페티시즘을 강조하는 옷을 선보였다. 이처럼 1970년대 비비안 웨스트우드 의상은 기존 체제와 세대에 반감을 가진 젊은 세대의 좌절과 절망, 분노를 관통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탄생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키워드인 ‘펑크’는 1979년 매장 이름을 ‘월드 엔드’로 바꾸면서 옅어졌다. 그가 패션디자이너로서 성장하고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감과 비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운 시기는 1990년이다. 공교롭게도 1984년 매클라렌과 결별한 것을 계기로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성장한 셈이다. 새 사업 파트너인 카를로 다마리오를 만난 웨스트우드는 영국의 테일러링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 그 공로로 1990년과 1991년 연속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로 선정됐고, 영국 여왕이 1992년 대영제국 훈장에 이어 2006년 대영제국 기사 작위 훈장을 수여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1992년은 웨스트우드의 인생과 패션에 한 획을 그은 해다. 웨딩드레스를 처음 선보였고, 25살 연하의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와 결혼했다. 웨스트우드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로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듬해인 1993년, 웨스트우드는 남편 이름을 딴 ‘안드레아스’라는 타탄체크를 개발했다.

웨스트우드는 입체 드레이핑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패턴을 바닥에 그린 다음 천을 재단하고 봉제해 옷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마네킹에 천을 대고 직접 주름을 잡고 다트를 넣는 방식이다. 그래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드레스는 풍성한 주름이 들어가 화려하다. 2008년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세라 제시카 파커가 결혼할 때 입어 화제가 됐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드레스를 입은 사라 제시카 파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공.

웨스트우드는 사회활동가로도 유명하다. 2013년 코스메틱 브랜드 러시와 협업해 유기농 면으로 만든 스파크 패키지, 신발 브랜드 멜리사와 협업해 젤리슈즈를 선보였다. 다양한 프린트와 그래픽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방식으로 기후변화와 멸종위기 동물 구호를 위해서도 앞장섰다. 2018년 가을/겨울 컬렉션 ‘돈트 겟 킬드’(Don’t Get Killed)에서 전쟁 고아를 돕기 위해 클럽 모양 그래픽이 담긴 깃발 장식을 가미한 것도 그중 하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품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홍콩,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타이, 레바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80여 개국에서 판매된다. 제품군도 여성복 외에 남성복, 가죽, 액세서리, 향수, 안경류, 웨딩드레스 등 다양하다. 지금은 펑크 스타일이 많이 퇴색됐지만, 초창기 펑크 스타일은 1998년 론칭한 ‘앵글로마니아’(Anglomania) 컬렉션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알렉산더 매퀸, 존 갈리아노, 장 폴 고티에 등이 그에게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11월호 더보기 http://www.economyinsight.co.kr/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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