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아닌 집'에 사는 가구 40만..화마는 이들을 먼저 삼킨다

2018. 11. 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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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국일고시원 화재로 돌아본 비주택 화재
노후 시설·안전대책 미비로 빠르게 불길 휩싸여
"올해 화재 사망자 3명 중 1명 비주택 사망자"

[한겨레]

올 초 화재가 나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 종로5가 ‘서울장여관’(사진 왼쪽)과 지난 9일 화재로 7명이 숨진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 현장. 김성광 박종식 기자.

#1.

2014년 1월13일 새벽 6시께 경기도 고양시의 한 주거용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 일가족 4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비닐하우스에는 박아무개(77)씨와 당시 97살이던 박씨의 장모, 아내 정아무개(65)씨, 큰아들(40)과 작은아들(37)이 함께 잠을 자던 곳이었다. 불이 나자 박씨는 수돗물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영하 13도의 날씨에 수도관이 얼어붙으면서 불길을 잡지 못했다. 비닐하우스는 대부분 불에 취약한 소재인 샌드위치 패널로 골조를 세우기 때문에 불이 빠르게 번진다. 이 사고로 중풍을 앓고 있어 거동이 불편한 아내와 고령의 장모, 할머니와 어머니를 구하려던 두 아들은 불길을 피하지 못해 숨지고 박씨만 덩그러니 살아 남았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추위를 막고자 틀어놓은 기름보일러 주변에서 불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2.

지난해 12월15일 밤 2시께 부산 사상구의 한 공업사 컨테이너에 불이 나 이 컨테이너에 거주하던 베트남 이주노동자 ㄴ(35)씨가 숨졌다. 컨테이너는 고주파 장비를 생산하는 공업사 컨테이너로 야외 화장실 건물 2층에 놓여있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화재의 유력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전기장판을 지목했다. 수은주가 영하를 밑도는 강추위가 이어지면서, ㄴ씨가 외벽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고자 전기장판을 과도하게 사용했다가 불이 났다는 것이다. 변변한 난방시설과 소방시설도 갖추지 못한 이곳에서 ㄴ씨는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려다 변을 당했다. 이주노동자주거권 개선 네트워크는 당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지내도록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며 “우리 모두에게 고된 노동을 마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람의 집’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9일 발생한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 화재사건을 계기로 ‘비주택 화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주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주택이라고 볼 수 없는 곳을 말한다. 2009년 한국도시연구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제출한 ‘비주택 거주민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비주택은 ‘사회적으로 주택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의 열악한 곳’으로서 비닐하우스, 쪽방, 여인숙 등 숙박업소, 고시원, 컨테이너, 판잣집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국도시연구소는 보고서에서 “(비주택 거주자들은) 거주지의 설비가 안전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몰려 생활하므로 화재에 대한 걱정을 보편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비주택 거주자들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를 보면, ‘주택 이외의 기타 거처’에 산다고 사는 가구가 39만1245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센서스에서 같은 가구 수가 12만8675개였다는 점과 견주어보면, 5년 새 3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지난달 24일 국토교통부도 통계청 등과 함께 지난해 5월부터 올해 6월까지 수행한 ‘주택 이외의 거처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비주택에 거주하는 이는 37만 가구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11일 오전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의 화재현장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비주택 가구 40만, 하지만 안전 사각지대 놓여있어

최소 40만 가구가 비주택에 사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비주택은 늘 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건물이 노후했거나 불에 타기 쉬운 소재로 만들어진 비주택은 그 특성상 화재에 취약한데, 안전 관련 법을 적용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 변변한 화재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1983년 설립신고를 한 국일고시원은 1992년 개정된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이 법은 연면적 600㎡ 이상 복합건축물에 소방안전관리자를 의무적으로 선임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국일고시원 건물은 연면적이 614㎡임에도 법이 소급 적용되지 않으면서 소방안전관리자를 선임할 의무가 없었다.

스프링클러 설치도 마찬가지였다. 국일고시원은 2007년 지어진 통에 ‘고시원에도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바뀐 2009년 7월 건축법 시행령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2015년 서울시의 고시원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 지원 사업에 선정돼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도 있었지만, 건물주의 반대로 설치되지 않았다. 해당 사업은 서울시가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주는 대신 건물주가 ‘5년간 임대료를 동결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

국일고시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 초 발생한 서울 종로구 종로5가 ‘서울장여관’ 화재도 국일고시원 참사와 닮아있다. 이 여관에 자주 머물렀던 유아무개(53)씨는 1월20일 새벽 3시께 ‘여관 주인이 성매매 여성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관에 불을 질렀고, 이 화재로 6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여관 또한 노후한 건물인 데다 마땅한 소방 장치가 없었다. 1964년 지어진 이 여관은 나무로 된 방문, 연소하기 쉬운 이불 등으로 불이 나면 순식간에 탈 수 있는 구조였지만, 스프링클러 등 화재에 대비한 장비가 거의 없었다. 연면적 400㎡ 이상인 건물들은 스프링클러, 경보 벨 등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데, 이 여관은 연면적 103.34㎡로 규모가 작아 스프링클러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11일 오전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의 화재현장 모습. 경찰의 명부를 확인한 한 생존자가 고시원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어디론가 옮기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올해 화재 사망자 3명 중 1명 비주택 사망자”

시민사회단체는 “고시원, 여관 등 주거빈곤계층 거주시설에 대한 화재 안전 점검과 관리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거권 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10일 국일고시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소방청 화재통계 현황에 따르면 올해 화재 사망자 306명 중 96명이 고시원, 쪽방, 여인숙 등 비주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안정적인 집 없이 주택 아닌 곳을 거처로 삼는 이들이 취약한 안전대책 때문에 계속 희생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토교통부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취약계층·고령자 주거지원 방안’도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국토부는 올 하반기 노후 고시원을 매입해 1인용 소형주택으로 리모델링하고 저소득 가구에게 공급하겠다는 ‘고시원 매입형 공공리모델링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도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정부 대책에 따르면 고시원에 있는 주민들의 일부만 매입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일부를 매입임대주택으로 이전하는 것은 손쉬운 대책이지만, 현재 고시원 문제의 전반적인 대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해당 사업이) 시범사업이란 이름을 걸고 있다. 시범사업 결과를 놓고 이후 추진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윤지민 종로주거복지센터 팀장은 “(고시원 등은) 주택법상에 주거 주택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서 상당히 관리가 허술해져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관리·감독할 의무도 없고, 소방서에서만 소방안전 차원에서 점검하는 수준”이라며 “사실상 여기가 주거 공간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정부가 인지하고 여기 사시는 분들이 최저 주거기준에 미달하지 않도록 집다운 집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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