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물감과 종이의 사랑을 도운 '화학'..다양한 염료들의 같은 근원 '원자'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

김상욱·유지원 2018. 11. 1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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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재료

현대미술가 로니 혼의 ‘리멤버드 워즈(Remebered Words)’ 연작 중 한 점. 바닥에 농도가 다른 푸른 원들은 수채 물감과 아라비아 고무, 덧바른 붉은 원들은 불투명 수채인 과슈를 사용했다. 글자를 쓴 재료는 연필의 흑연이다. ⓒ Roni Horn/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물감과 종이가 변치 않고 서로를 붙들려면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 마주 보며 천천히 다가간다. 그들의 신체가 마주 닿는다. 아마 ‘사랑’이라 이름 붙은 감정이 만든 행동이리라. 감정의 ‘화학반응’ 없이, 그들이 그저 질량을 가진 두 물체로 ‘물리적인 작용과 반작용’을 하고 만다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끌리고 밀어낸다. 누군가에게 더 끌리면 이미 끌렸던 상대를 아프게 끊어 내기도 한다. 이른바 ‘선택친화성’이다. 괴테의 소설 제목인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은 이 선택친화성을 뜻하는 화학용어다.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화학반응의 결합성에 빗대는 계기를 제공한 제목이 됐다. 괴테는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동판화와 스케치도 배웠다. 그는 색채론을 연구한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색의 재료는 대개 동물과 식물, 특히 광물이다. 동물학과 식물학·광물학·화학에 대한 괴테의 관심은 이렇게 연결된다.

머릿속에서 미술작품을 구상하는 아이디어가 다분히 플라톤적·수학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실행’은 재료의 영역인 물리와 화학의 세계다. 종이나 캔버스 등의 바닥재에 원하는 색을 내려면 색료를 그 위에 옮겨 잘 붙어 있게 해야 한다. 색채의 재료들은 일종의 접착제가 돼야 한다.

색을 내는 아주 미세한 알갱이들이 서로를 붙들려면 어떻게 할까? 손을 잡거나 팔로 안을 수 없으니, 색알갱이들을 둘러싸 연결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을 미디엄이라고 한다. 물감마다 색을 내는 재료는 비슷하지만 이 미디엄이 수채화·유화·아크릴 등 그 ‘성질’을 결정한다. 미디엄은 결합한 색알갱이들을 바닥재에도 부착해준다. 마를 때는 공기와 화학작용을 함으로써 색과 공기의 접촉면에는 튼튼한 필름막이 형성된다. 이런 일련의 화학작용을 재료들이 결속하는 ‘사랑’이라고 상상해도 좋겠다. 색채의 재료 속 여러 성분들은 색이 바닥재 위에 꼭 붙어 오래오래 변치 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버티도록 돕는다.

두 사람의 사랑에도 주변 사람들이 작용을 하며 그 사랑에 영향을 미친다. 사랑에 질투나 회한, 권태 같은 여러 불순한 감정이 섞일 수도 있다. 색료와 바닥재가 결합하는 이 ‘사랑’이 불순물이나 변질없이 세월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노력한 이들이 있다. 화가들과 화학자들이다.

화가 얀 반 에이크는 템페라 물감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미디엄으로 기름을 섞어 보다가 유화의 길을 열었다. 19세기 초반의 프랑스 화학자들은 주요 색의 합성색료들을 개발해 냈다. 비싼 천연색료의 생산단가를 낮추고 독성을 없애며 작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게끔 내구력을 높였다. 이제 물감은 햇빛의 자외선에 잘 변색되지 않는다. 빛에 대한 인상을 담고자 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야외로 거침없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술적 발전에 힘입은 것이 아닐까?

종이·캔버스에 원하는 색 내려면 색채의 재료들은 ‘접착제’가 돼야 색알갱이 둘러싸는 ‘미디엄’들이 수채화·유화·아크릴 등 성질 결정

20세기 중반에는 공업용 합성수지인 플라스틱을 미디엄으로 쓴 물감이 등장한다. 아크릴 물감이다. 유화처럼 깊고 은은한 광택을 가지진 못했지만, 아크릴은 내구성과 접착력 측면에서는 제왕이다. 아무 바닥재에나 잘 붙고, 궂은 환경에서도 오래 버틴다. 이제 화가들의 그림은 거리의 벽까지 뛰쳐나갈 수 있게 됐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와 자연 속 물질과 그 작용의 아름다움을 규명해왔다면 화학자들은 이를 일상 속에서 실제 작동하게 했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보다 잘 창출할 수 있도록 기여한 것이다. 공학자들은 내구성 높은 공업물질을 재료로 생성했다. 화가들이 아름다움을 대중화하는 데에 공학자들도 함께 공헌한 셈이다.

화가들은 여전히 재료들로 귀납적인 실험을 한다. 샤갈은 한 가지 익숙한 재료에 머무르지 않고, 템페라와 과슈·아크릴 등 둘 이상의 재료를 혼합하는 기법을 꾸준히 탐색했다. 미니멀리스트 작가 로니 혼의 ‘리멤버드 워즈’ 연작은 마치 수채화와 과슈의 ‘재료 인덱스’처럼 보인다. 그는 투명한 수채화와 그 미디엄인 아라비아 검으로 얼룩과 번짐, 거품, 농도 등이 다른 원을 그렸다. 때로는 불투명 수채인 과슈의 은폐력을 달리해 그 원을 덮기도 했다. 과슈를 너무 두껍게 덮으면 갈라져 떨어지기도 한다. 그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명상적으로 이 원들을 채워나가고 관찰했다. 이 재료들이 미세하게 화학 작용한 결과인 원들에, 작가는 느슨한 연상을 반영한 단어들로 이름을 붙였다.

화학자들, 여러 합성색료 개발해 천연색료의 내구성과 접착력 향상 아름다움을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

화가는 마치 나비처럼, 적절한 미디엄이 섞인 색알갱이들을 붓으로 날라 종이나 캔버스에 결합하게끔 해 마침내 작품을 수정시킨다. 이 관계가 오래 변함없이 지속되게 하는 데에 화가를 둘러싼 환경 전체가 작동해 때로는 돕기도, 방해하기도 한다. 공기 속의 성분, 수분, 온도, 햇빛과 바람의 강도…. 이 모든 것이 화학 작용을 한다. 작품은 이렇게 재료들의 결속으로 특정 환경 속에서 탄생한다. 그렇게 결합된 생을 힘껏 버텨내며 마주 보는 우리에게 감정의 작용을 일으킨다.

유지원

유지원은 타이포그래퍼로 홍익대 겸임교수다. 서울대와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전시, 북디자인, 저술과 번역을 하고 있다.

■ 물감과 종이가 서로 다르지 않은 까닭은

가장 오래된 유화작품의 하나이자 수많은 상징이 담긴 것으로도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오크 화판에 유화, 82.2×60㎝, 런던 내셔널갤러리

미술의 역사는 선사시대 동굴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에게 시각예술품이란 자신과 나란히 직립한 벽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리라. 지금도 미술작품은 벽에 걸려 있다. 아이들도 새로 도배한 벽에 그림을 그려 부모를 분노조절 장애에 빠뜨리지만, 그 그림은 머지않아 사라지게 마련이다. 프레스코는 벽화를 오랫동안 보존하는 방법으로, 기원전 3000년 전 미노스문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프레스코는 석회석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용한다. 생석회와 물을 섞은 석회반죽이 굳으면 단단한 석회석이 된다. 석회반죽이 굳기 전에 염료로 그림을 그려 넣으면 단단한 석회석의 일부가 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벽화가 프레스코의 예다. 이 기법의 단점은 석회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는 속도도 습도·장소에 따라 다르다. 하루에 그릴 수 있는 분량만큼만 석회반죽을 벽에 발라야 한다. 다음날 그린 부분과 전날의 것 사이에 불연속이 생기는 것도 문제다.

석회에 의존하지 않고 그림을 벽에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을까? 템페라다. 일종의 접착제를 염료에 섞어 벽에 바르는 셈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템페라로 그려진 예다. 대표적인 접착제는 계란 노른자였다. 아교, 벌꿀 등도 사용했다니까 템페라 그리다가 배고프면 재료를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세 유럽에서 계란은 귀한 재료였을 거다. 계란 없이 식물성 기름만으로도 그림이 고착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화가 표준이 된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유화 중 하나다.

조개 수천개의 체액으로부터 겨우 1g 얻을 수 있던 보라색 19세기엔 석탄에서 추출해내 만물이 원자라는 사실을 알면 인공염료의 원리도 파악 가능

염료의 색을 내기 위해 무수한 물질이 사용됐다. 붉은색은 연지벌레, 노란색은 치자나무, 보라색은 조개…. 특히 고대 로마시대 ‘티리언 퍼플’이라 불린 보라색은 ‘무렉스 브란다리스’와 ‘푸르푸라 하이마스토마’라는 조개의 체액에서 얻었다. 조개 수천개에서 겨우 1g을 얻을 수 있었기에 엄청나게 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보라색은 황제만이 쓸 수 있었다.

1856년 영국의 생화학자 윌리엄 퍼킨은 석탄에서 나온 콜타르에서 추출한 물질로 ‘아닐린 퍼플’이라는 보라색 염료를 만들었다. 머지않아 보라색은 유럽 사교계에서 크게 유행하고, 퍼킨은 떼돈을 번다. 석탄에서 나온 물질이 어떻게 조개에서 나온 체액과 같을 수 있을까? 석탄은 무생물이고 조개는 생명체다. 석탄도 생명체와 관련이 있기는 하다. 3억년 전 식물이 죽어 쌓인 것이 석탄이니까.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과학이 알아낸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우주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 그 재료는 원자다. 석탄도, 조개도 원자로 되어 있다. 석탄을 이루는 탄소와 조개를 이루는 탄소는 완전히 똑같다. 화성에 있는 탄소나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탄소도 똑같다. 세상이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만 안다면 석탄이나 석유로 인공염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양은 수소와 헬륨으로 되어 있다. 빅뱅의 결과 가장 많이 만들어진 두 원자다. 지금도 우주의 75%가 수소, 25%가 헬륨이라고 보면 된다. 수소가 모여 별이 되면 핵융합 반응을 통해 점점 무거운 원자들이 만들어진다. 리튬, 베릴륨, 붕소의 순이다. 하지만 이들의 원자핵은 불안정하여 방사능을 띤다. 붕괴하여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다음 무거운 원자들은 탄소, 질소, 산소다. 지구상 생명체의 경우, 몸의 99%는 탄소·질소·산소·수소로 되어 있다. 헬륨이 빠진 것은 이 원자가 반응성이 거의 없어서다. 헬륨은 홀로 존재할 뿐 다른 원자들과 결합하지 않는다. 결국 생명의 원자는 우주에 흔한 것들로 되어 있다. 아이들이 아무 데나 그림을 그리듯 선사시대 사람들도 자신이 살던 동굴의 벽, 즉 주변 아무데나 그림을 그렸다. 지구상의 생명도 그냥 주변의 아무것이나 집어다가 조립하여 만든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도 원자로 되어 있다. 지구 표면의 70%는 바다다.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며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육지는 산소·규소·알루미늄·철 등의 원자로 되어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갖 종류의 ‘것’들이 보이지만 이들은 잘해야 10여종의 원자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결합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템페라 물감의 재료인 달걀과 인공태양의 노란색은 다르지만 원자 수준에선 큰 차이 없어

템페라에 쓰이는 달걀 노른자(왼쪽 사진)와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 ‘날씨 프로젝트’의 인공태양(오른쪽)의 전구는 노란색이지만 재료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원자라는 점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 않다.

오늘날 미술의 재료는 다양해졌다. 덴마크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은 영국 테이트모던 뮤지엄에 ‘날씨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거대한 인공태양을 설치했다. 이것은 노란색에 가까운 단파장 전구 200개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으로 보더라도 실제 거대한 태양이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더구나 여기에 수증기를 뿌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템페라의 달걀 노른자와 인공태양의 전구는 모두 노란색을 내지만, 완전히 다른 재료다.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되지만, 인간과 흙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원자 수준에서 보면 석회석, 달걀, 식물성 기름, 석탄, 인간, 흙, 태양은 서로 다르지 않다. 아니,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다양한 것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상욱

김상욱은 물리학자로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다. KAIST를 졸업하고 독일 막스플랑크 복잡계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김상욱의 양자공부> <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을 펴냈다.』 김상욱·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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