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과 베르무트의 만남..너무 단순해서, 가장 만들기 까다로운 '클래식 마티니'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경향신문]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하던 무렵 칵테일 바에 앉는 건 조금 두려운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칵테일 바의 분위기는 어른스러운 경우가 많다. 열아홉 살을 갓 넘긴 나는 차분하고 낯선 공기에 곧잘 주눅들곤 했다. 메뉴를 펼치면 공포는 한층 깊어졌다. 높은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칵테일을 주문해보려 해도 그게 무슨 맛인지, 얼마나 센 술인지 알 수 없었다. 설명 한 줄 없이 나열된 클래식 칵테일 리스트는 오히려 나의 무지를 나무라는 듯했다. 휴대폰 검색도 불가능하던 시절, 나는 메뉴를 뚫어질 듯 쳐다본 끝에 그때그때 어감이 좋은 이름을 골랐다. 그러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라도 주문하는 날이면 영문도 모른 채 실컷 만취하곤 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칵테일은 더욱 보편적인 문화로 정착했고, 내게도 바에서 술 몇 잔은 호기롭게 주문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 클래식 칵테일의 명칭은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이제 ‘올드 패션드’나 ‘마티니’ 같은 술을 주문할 때는 10년 지기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처럼 정다운 기분이 든다.
유서 깊은 고유명사들이 대개 그렇듯, 클래식 칵테일의 명명에는 주류 산업의 역사와 전설적 유명인사의 이야기가 깃든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테킬라 칵테일 마르가리타는 첫 번째 경우다. 마르가리타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믿을 만한 이론은 20세기 초 미국 역사와 관련이 깊다. 1920년대 미국 전역에 내려진 금주령은 칵테일 역사의 큰 전기였다. 밀주의 형편없는 술맛을 감추거나 당국의 눈을 피해 주스를 마시는 척 가장하기 위해 수많은 칵테일 제조법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몇몇 지독한 술꾼들은 술을 마음껏 마시기 위해 국경마저 넘었다. 당시 미국에서 인기 높은 칵테일들 가운데 ‘데이지’라는 술이 있었다. 마르가리타의 주재료인 테킬라 대신 브랜디가 들어가는 칵테일이었다. 브랜디가 없거나 터무니없이 비쌌던 멕시코 바에서 주당들은 테킬라가 들어간 데이지를 마셨다. 스페인어로 데이지가 바로 마르가리타였다.
단단하고 품위 있는 위스키 클래식 칵테일 맨해튼의 탄생은 역사상 가장 술을 좋아한 정치가와 관련 깊다. 1874년 뉴욕 사교계의 주역이었던 제니 처칠은 새뮤얼 J 틸던의 주지사 당선 기념으로 맨해튼 클럽에서 파티를 주최했다. 당시 바텐더가 파티를 기념하며 만든 칵테일이 위스키에 스위트 베르무트와 비터즈를 섞은 맨해튼이었다. 물론 그 이름은 파티가 열린 맨해튼 클럽에서 따왔다. 틸던은 2년 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지만 파티가 열린 그때 제니 처칠이 가졌던 아이는 후일 영국 총리가 됐다.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윈스턴 처칠이 가장 좋아했던 술로 유명한 칵테일이 바로 마티니다. 진과 베르무트로 완성하는 독하고 우아한 칵테일, 마티니의 제조법은 19세기 말 출판된 바텐딩가이드에 처음 등장했다. 마티니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양하다. 이탈리아 주류 회사 마티니&로시에서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가 있고, 1920년대 초 뉴욕 니커보커 호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조금 지루하다.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마르티네스 지방에서 즐겨 마시던 칵테일을 한층 드라이하게 만들어 마티니라는 애칭을 붙였다는 설이다. 클래식 마티니는 가장 단순한 동시에 가장 만들기 까다로운 칵테일이다.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에 따라 그 풍미가 미묘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한 기자가 윈스턴 처칠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마티니에 베르무트를 얼마나 넣나요?” “저는 진만 따른 마티니를 마시며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는 걸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 처칠 마티니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장난이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오랜 술친구들 중 하나는 블랙러시안을 주문하며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랙러시안 한 잔 주세요.” 보드카를 잔에 콸콸 붓고 칼루아 한두 방울을 떨어트린 술잔을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건네받곤 했다. 글쎄, 입맛도, 원하는 취기도, 유머 감각도 저마다 다른 법이다. 설령 정체를 모른다 해도 주문하고야 마는 칵테일의 매력 또한 그 다양성에 있을 테고 말이다.
정미환|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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