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황칠나무, 감탕나무.. 보길도의 천연기념물 3종을 만나다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2018. 11.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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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은 무려 7개나 되는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도 상록수림(제28호), 예송리 상록수림(제40호), 예작도 감탕나무(제338호), 미라리 상록수림(제339호), 맹선리 상록수림(제340호), 대문리 모감주나무군락(제428호), 정자리 황칠나무(제479호)가 그것입니다.

완도항

이 중 3종 세트로 묶어서 한 번에 돌아보기 좋은 곳을 다녀왔습니다. 예송리 상록수림과 예작도 감탕나무와 정자리 황칠나무로, 모두 완도군 보길면에 있습니다.

완도까지는 전남 해남군의 땅끝마을 가는 것만큼이나 멉니다. 그래도 완도 땅에 발만 디디면 위의 세 가지 천연기념물을 쉽게 볼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행정구역상 완도군에 속할 뿐 위의 세 곳은 모두 보길도에 있으므로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수고가 더해져야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보길도까지 가는 일이 그리 쉬운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나마 교통 사정이 좀 나아져 얼마 정도의 시간과 경비를 더 투자하면 됩니다. 일단 완도군의 화흥포항에서 1시간 10분마다 있는 페리호를 타고 뱃길로 40분 정도 가면 노화도의 동천항에 닿습니다. 페리호를 타고 가라는 건 차를 갖고 들어가면 좋다는 뜻입니다.

노화도로 들어가는 배

동천항에 내린 후 장사도라는 작은 섬을 징검다리 삼아 두 개의 주황색 보길대교를 이용해 건너면 바로 보길도에 이릅니다.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선도(1587~1671)의 유적이 많은 곳입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낸 그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1637년에 제주도로 내려가 살기로 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머물게 된 곳이 너무 좋아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는데, 그곳이 바로 보길도입니다. 그의 나이 65세 되던 해인 1651년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어 우리에게 국어시간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하는 여음(후렴)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완도 정자리 황칠나무(천연기념물 제479호)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질지 모르겠으나 윤선도는 보길도 백성에게 좋지 않은 인물로 기억된다고 합니다. 섬 전체를 자신을 위한 조경 장소로 삼아 부용동이라는 정원을 꾸미기 위해 섬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외에 여러 악행을 저질러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보길도에는 윤선도와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천연기념물 제479호인 황칠나무가 있는 정자리라는 지명도 윤선도가 정자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정자리에는 황칠나무 고목 한 그루가 점점 어두워져 가는 숲을 조용히 지키고 있습니다. 키는 15m이고 나이는 약 150년 정도로, 우리나라의 황칠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입니다.

황칠나무의 열매 달린 모습

황칠(黃漆)나무는 이름 그대로 노란 칠감의 나무입니다. 보통 칠(漆)이라고 하면 옻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인 옻을 일컫습니다. 칠이 곧 옻입니다. 옻은 처음에는 회색을 띠지만 점차 검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옻은 나전칠기에서 보듯 검은색으로 칠해집니다.

황칠나무에서 나오는 액도 색이 변합니다. 처음에는 우윳빛이지만 공기 중에서 산화되어 황금빛을 띱니다. 양은 매우 적습니다. 값이 비싼 건 당연합니다. 비싼 값에도 예로부터 황칠은 귀족들의 고급 칠감이었습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황금빛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황칠은 목기는 물론이고 금속이나 가죽 그리고 종이에도 칠이 가능해서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방수가 잘 되고 열에 강하며 내구성이 좋은 장점을 지녔습니다. 그러니 주변국에서 끊임없이 탐낼 만합니다.

완도 예송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

생산에 따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됐습니다. 귀한 데다 채취량이 적다 보니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들의 농간이 심해졌고, 급기야 지방민들은 황칠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여기고는 밤마다 도끼를 몰래 들고 와서 찍어 넘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황칠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맥이 끊어지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황칠나무의 다른 가치에 주목합니다. 나무인삼이라는 별명답게 다양한 약리작용이 황칠나무에서 속속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 중 하나가 황칠나무라는 자료가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많은 연구를 통해 간 기능 개선, 혈행 개선 및 정혈 작용, 면역력 강화, 항암 작용 그리고 신경 안정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특히 천연신경안정제로 불릴 정도로 황칠나무는 안식향(安息香)이란 독특한 향기로 신경을 안정시켜 준다고 합니다.

예송리 상록수림 앞 해변 풍경

정자리의 반대편인 예송리 해변에는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완도 예송리 상록수림이 펼쳐져 있습니다. 보길도의 동남쪽 해안입니다. 약 300년 전에 태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만든 숲입니다.

길이가 약 740m에 이르는 반달 모양의 숲으로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까마귀쪽나무, 우묵사스레피, 종가시나무, 송악, 상동나무 같은 상록활엽수가 서로 어깨를 겯고 서서 몇백 년째 방풍림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예송리 상록수림 앞바다에는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작은 섬 하나가 두둥실 떠 있습니다. "할머니, 저 섬이 예작도죠?" 하고 관광객한테 미역 줄기를 파는 할머니께 여쭈니 그렇다고는 하면서 미역 팔기에만 정신을 쏟느라 어떻게 들어가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송리 상록수림 앞 바다에 떠 있는 예작도

몇 번이나 더 물어본 후에야 저쪽 부두에서 배를 얻어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바로 코앞에 떠 있는 예작도지만 너무 가까운 작은 섬이라 정기 여객선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배를 갖고 있지 않은 한 들어갈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왔기에 크게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틀을 걸려 완도에서 노화도와 장사도를 거쳐 보길도까지 내달려온 발걸음이 예작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어 아쉽기는 했습니다.

예작도는 천연기념물 제338호인 완도 예작도 감탕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변변한 예작도 감탕나무 사진을 보기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문화재청에서 올려놓은 사진 아니면 예전에 찍은 사진이 희미한 해상도로 올려져 있을 뿐입니다.

예송리 부두에서 밧줄 작업을 하고 있는 아저씨

그곳 부두에서 밧줄 작업을 하는 분께 예작도 들어가는 방법을 여쭈니 여기 돌아다니는 어선한테 5만 원만 주면 건네다 준다고 합니다. 그럼 나올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건 그쪽에서 부탁해야 한다고 합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한 번 태워다 줬으면 끝까지 책임져 줘야죠!" 했더니 빙긋 웃었습니다. 왕복 10만 원 정도가 드는 셈이었습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을 부두 끝에 주저앉힌 채 값만 알면 됐지 천연기념물 감탕나무 같은 건 안 봐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하는 식의 글을 작성해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먼 곳까지 지금 말고 언제 또 와보나 싶어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곳에 돌아다니는 어선을 붙잡아 예작도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기에는 다들 너무 바빠 보이는 데다 먼바다로 나가버리기 일쑤라 타고 돌아올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예작도의 천연기념물 감탕나무가 있는 곳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하고 일어서 가는데 아까 그 밧줄 작업하던 아저씨가 물어왔습니다. 예작도에는 뭐 하러 들어가려 하느냐고. 천연기념물 감탕나무 때문이라고 하자 제사 지내는 그 나무가 맞느냐면서 다녀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사진 찍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나무는 섬 뒤편에 있는데 저기 보이는 전봇대 옆의 소나무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가리키셨습니다.

그 정도면 얼른 후다닥 다녀오면 3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 배로 건네다 주겠다는 겁니다. 전에도 문화재청에서 나온 듯한 젊은이들이 와서 자기가 건네다 줬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5분도 안 되어 도착한 예작도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그 아저씨의 트럭으로 옮겨 타고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돈은 얼마 드리면 되느냐고요. 그때 제 지갑에는 현금이 딱 10만 원밖에 없었기에 예작도에다 내려놓고 나서 나중에 나올 때 혹시 더 달라고 꼼수를 부리면 난처해질 텐데 그땐 어쩌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그까짓 것 해주는데 돈은 무슨 돈이냐면서 전에 왔던 젊은이들도 그냥 건네다 줬으니 저도 그냥 건네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랑 다르다고, 보이는 것만큼 그리 젊지 않다고 하는데도 빙긋이 웃으면서 극구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암만 그래도 그럴 수 없다며 약간의 비용이라도 드리겠다고 했지만 하도 완강히 사양하는 바람에 일단 그냥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고사 직전인 완도 예작도 감탕나무(천연기념물 제388호)

그 아저씨의 모터 달린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하지 않고 ‘부르릉 부르릉 우왜앵’ 하면서 가니 5분도 되지 않아 예작도 부두에 뱃머리가 닿았습니다. 거기서 그 아저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나왔습니다.

천연기념물 감탕나무 찍으러 왔다니까 저쪽 골목으로 가라며 방향을 잡아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저씨가 예작도 감탕나무를 관리하는 사람이랍니다.

이대(남부 지방에 흔한 대나무 종류)로 보이는 숲 사이로 길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그리로 해서 나가 보니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감탕나무가 다 쓰러져가는 몰골로 겨우 살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열매는 없고 새로 나온 가지의 잎이 약간 남아 있다

오늘내일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와서 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게 될 줄 몰랐던 나무라 그 앞에 서니 약간의 전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돈이 좀 더 많은 사람이어서 이런 나무를 찾아가는 일을 아무 걱정 없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서둘러 찍어대는데 모기가 마구 물어댔습니다. 물어라. 나는 찍겠다. 한 방, 두 방, 세 방, 네 방. 더는 못 참겠어서 일단 숲에서 나왔습니다.

나이를 약 300살 정도로 추정하는 이 나무는 당나무로 모시기 시작하면서 새해가 되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행운과 풍어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감탕나무 위쪽에 있는 소나무에도 제사를 지내는데, 그 소나무를 할아버지당(나무)이라고 불렀고 감탕나무는 할머니당(나무)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보길도를 떠나오는 배에서 유리창에 비친 나를 찍어 보았다.

그러니 이 감탕나무는 암그루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성별 감식을 위해 다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으나 수세가 약화돼서 그런지 열매로 보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소나무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남은 할머니 감탕나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목숨이니 암수를 구별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발길을 돌렸습니다.

정확히 20분 만에 돌아오니 아저씨는 부둣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 보셨소? 몽당해졌지요?" 하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뽑아 버리고 오지 그랬소"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배를 타고 도로 나와서도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습니다. 저는 그 아저씨의 선의가 참으로 기분 좋은, 고마운 일로 느껴졌습니다. 돈을 받아도 기분 좋았을 텐데 생전 처음 보는 제게 돈을 받지 않으니 기분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겁니다. 저도 언젠가 타인한테 그렇게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전남 섬 지역은 생태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높은 곳이 많습니다. 전에는 가기를 꺼리는 유배지였지만 지금은 가고 싶어 하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홍보가 이어집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었을 때는 온갖 식물이 인간의 간섭을 피해 살기 좋았다는 뜻이고, 접근성이 좋아졌다는 것은 그 식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 됩니다. 보길도가 그러해서 아직도 해변에는 말로만 듣던 자생하는 이팝나무가 자라고 산유자나무가 널려 있으며 영주치자 같은 귀한 식물이 등산로 주변에 드문드문 보입니다.

점점이 흩어졌던 섬들을 연륙 연도교로 이어놓으면서 얼마든지 차로 들어갈 수 있게 됐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등산로나 여러 구조물을 만들면서 숲을 해치니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제주도로 가려던 윤선도가 눌러앉았을 만큼 아름다운 보길도가 앞으로도 계속 아름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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