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차인홍 "무엇을 선택하든 묵묵히 나아가면 누군가 도움 손길.. 기회 오더라"

김석 기자 2018. 10. 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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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홍 미국 라이트 주립대 음악과 교수가 지난 17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나가는 ‘묵묵함’이 중요하다는 말을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민자 선생이 성세재활원에서 차인홍 교수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하는 모습.

2018 펩시 음악상 2부문 수상 차인홍 美 라이트주립大 교수

음악가 강민자 선생님 도움받아

재활원서 우연히 바이올린 접해

지역 콩쿠르 1등… 재능 꽃피워

집안 어려워 ‘기술 배우러’日로

귀국 뒤 장애 탓 일자리 못 구해

합숙 연탄창고서 바이올린 연습

부인이 뒷바라지 어렵게 美 유학

대전시립교향단 악장 ‘금의환향’

83대1 경쟁 뚫고 美교수 자리에

“자존감·성실함·겸손 잃지 말고

선택한 삶 가면 사회가 외면 안해”

2018 펩시 음악상 시상식에서 클래식 분야 ‘올해의 베스트 음반’ 상과 ‘올해의 베스트 아티스트’ 상을 수상한 차인홍(60) 미국 라이트 주립대 음악과 교수의 삶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대전 대동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가난한 가정의 6남매 중 막내,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게 된 뒤 학교 대신 맡겨진 재활원 생활, 먹고살 기술을 배우기 위해 16세 때 택한 일본 연수생 시절. 음악과는 접점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은 배경을 갖춘 차 교수가 미국 주립대 음악 교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데는 바이올린과의 첫 만남 이후 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쏟아부은 노력, 그리고 자신의 일에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높게 평가한 이들의 조력이 함께했다. 지난 17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만난 차 교수는 “힘들었지만 그런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저의 힘만으로는 올 수 없는 길을 올 수 있었던 데서 사람들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말문을 열었다. 차 교수가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은 두 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이다. 이따금 몸에 열이 났지만 당시 차 교수 부모는 소아마비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한의원을 찾아가는 등 치료를 했지만 치료비만 불어났을 뿐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성치 않은 몸, 가난한 집안, 사회적 분위기 탓에 차 교수는 초등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 나이를 넘긴 9세가 돼서야 성세재활원이라는 장애인 시설에 맡겨졌다. 120여 명의 어린이가 머물다 보니 정부 보조금으로는 운영비가 모자라 겨울 난방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도 어려웠다. 차 교수는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방 안에서만 지내던 것과 달리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감사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내 “바이올린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차 교수가 6학년이 되던 어느 봄날 유성온천을 들렀던 바이올리니스트 강민자 씨가 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우연히 성세재활원 부근을 산책하다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흙 마당에서 뒹굴며 놀던 차 교수 등 아이들을 본 강 씨는 재활원에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의했다. 차 교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강 씨에게 바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없었다. 막내아들의 떼 섞인 부탁을 못 이긴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사주면서 6개월이 지난 뒤에야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차 교수는 연습에 더욱 매달렸다. 숙제로 내준 연습곡을 셀 수 없이 연습했다. 차 교수는 “4년가량을 강 선생님에게 배웠다”며 “논밭 한가운데 지어진 건물, 개구리 소리만 들리는 환경,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서 음악은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1년쯤 지나자 강 씨는 차 교수에게 충남도에서 개최하는 음악콩쿠르에 출전해 보자고 제의했다. 차 교수는 비발디 협주곡을 연주했고 1등을 차지했다. 이후 그는 여러 연주회 무대에 설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바이올린을 계속해 나가기 힘들었다. 차 교수는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돼 재활원에 남아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는데 정식과정은 아니었다”며 “그때 일본 장애인 단체 태양의집에서 1년간 연수 기회를 5명에게 준다는 연락이 왔고, 재활원에서 ‘일본어 잘하는 사람을 보내겠다’고 해 일본어를 급하게 배워서 일본에 가게 됐다”고 말했다. 1974년 일본에 도착한 차 교수는 1년간 목공소나 인쇄소 일을 배웠다. 1년 후 목공과 인쇄일을 배워 귀국했지만 한국에는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정식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했다. 차 교수는 “바이올린과 직업 등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때 강 선생님 후배로 대전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고영일 전 목원대 교수가 오시더니 ‘이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음악을 하자’고 말씀하시면서 현악 4중주단을 만들자고 제안하셨다”며 다시 바이올린을 잡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1976년 차 교수 등 성세재활원에서 음악을 함께했던 이들로 결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은 대전 용두동의 한옥에 전세를 얻어 합숙하며 연습을 했다. 연습 공간이 없어 연탄창고와 부엌, 마당, 방에서 따로따로 개인 연습을 했는데 차 교수는 주로 연탄창고에서 했다. 여름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겨울에는 손이 어는 환경이었다. 차 교수는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연탄창고에 가서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베데스다 4중주단 구성은 차 교수에게 다시금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의 도움으로 서울에 숙소와 연습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열고 여러 교수에게서 레슨도 받았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독학으로 통과했다. 차 교수는 “아마 대전에만 있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베데스다 4중주단을 하면서 지금의 부인인 조성은(58) 씨와도 만났다. 당시 고 전 교수에게서 비올라를 배우던 조 씨는 이후 경희대 음대로 진학했는데 차 교수가 서울로 옮겨오면서 재회했고 사랑이 싹텄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차 교수는 아내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사랑을 결혼으로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정립회관에서의 생활은 차 교수가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동욱 서울대 교수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음악교수들로 구성된 라살 4중주단에 베데스다 4중주단을 소개해준 것이다. 신시내티대는 차 교수 등 베데스다 4중주단의 입학을 허락했고 학비까지 면제해줬다. 신 교수와 친분이 있는 장정자 아산재단 이사의 배려로 미국에서 생활비 일체를 지원받으며 유학을 가게 됐다. 미국 유학생활은 공부에 대한 즐거움도 컸지만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아내 부모님의 반대라는 벽에 부닥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신시내티대 유학 2년 차가 되던 무렵 조 씨가 차 교수와 결혼하기 위해 핸드백 1개만 들고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 몰래 집을 나와 미국으로 왔다. 1984년 12월 두 사람은 미국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시내티대를 졸업한 차 교수는 음악 공부를 더 깊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뉴욕 브루클린대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장학금 혜택은 있었지만 뉴욕 물가 때문에 생활비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차 교수는 “결혼 전에는 돈이 있든 없든 살 수가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니까 다른 문제가 되더라. 집사람이 아는 분들 도움으로 만삭의 몸으로 가발 가게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며 “뉴욕에서의 생활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일을 하고 싶은데 제가 몸이 불편하다 보니까 일을 구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음악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제가 앞날의 보장이 없는데도 음악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다”고 회상했다. 음악에 매진하는 차 교수를 음대 학장이자 대학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도로시 클리츠먼 교수가 각별한 애정으로 도와줬다. 연주회에 솔리스트로 설 기회를 자주 준 것은 물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차 교수에게 1대1로 지휘법을 가르쳐줬다.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차 교수에게 전달한 셈이다.

클리츠먼 교수의 영향 때문에 석사과정을 마친 차 교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전공을 지휘분야로 택했다. 뉴욕 카네기홀,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 마이애미 등에서 100여 차례 실내악 및 협주를 연주했고 아스펜 국제음악제, 안톤 베베른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제 등에도 나섰다. 하지만 아들 둘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안정적 직업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그러던 중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자리 제안이 왔고 차 교수는 박사학위를 미루고 귀국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지 6년 만인 1996년 12월 차 교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차 교수는 “알면 놓지 못한다는 지휘의 매력에 빠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지휘대에 오를 때의 어색함에 익숙해지지 못해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지휘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이 강했다”며 당시 미국행을 설명했다. 가족들의 생활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여름 학기 수업을 들어가며 4년 걸리는 박사학위를 2년 반 만에 따기는 했지만 이제는 일자리가 문제였다.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 라이트 주립대에서 ‘바이올린 전공자, 현악 4중주 경험자, 지휘를 할 수 있는 자’라는 차 교수와 딱 맞는 지원자격을 건 교수 채용 정보가 나왔다. 차 교수는 “매일 50~100여 개의 일자리 소개가 화면에 뜨니까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그날은 라이트 주립대 교수 채용 정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력서를 냈는데 교수 채용에 낸 유일한 이력서였다”고 말했다. 경쟁률은 83대 1이었지만 차 교수는 2000년 그 경쟁을 뚫고 라이트 주립대 바이올린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차 교수는 “제가 교수가 된 뒤 교수 채용에 참가해 보니 제가 교수가 된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83명 중에 제가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났겠느냐?”며 겸손함을 보였다.

대학 교수가 된 뒤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연주회 일정도 많아졌고, 미국 내 전역에서 연주회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또 대학 재학생과 일반인으로 구성된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차 교수는 이런 활발한 활동과 교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교수 부임 7년째가 되던 해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라이트 주립대 종신교수에 임명됐다. 2년 전에는 정교수로 승진도 했다.

차 교수의 펩시 상 수상 역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경탄을 일으키는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차 교수는 한국과 베네수엘라 수교 기념 오케스트라 공연에 지휘자로 초청받아 베네수엘라에 갔는데 그 자리에 와있던 베네수엘라 국립오케스트라 단장이 차 교수에게 객원 지휘를 요청한 것이다. 차 교수는 2017년 봄 베네수엘라 국립오케스트라와 음악 녹음을 했다. 이 음반은 18회 라틴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에 나온 2500개 음반 중 최종 후보 5개에 올랐다. 비록 라틴 그래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2018 펩시 상에서 ‘올해의 베스트 음반’ ‘올해의 베스트 아티스트’ ‘올해의 베스트 테마’ 등 세 부문에 후보로 올라 두 부문을 석권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차 교수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장애인들과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강연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요청해오는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차 교수는 최근에는 충북교육청의 초청으로 충북에 있는 시골 학교들을 다니며 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차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삶이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나가는 ‘묵묵함’을 가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존감과 성실함, 겸손함을 가지고 묵묵하게 일을 하면 사회가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주며,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고 조언했다.

콜럼버스 = 글·사진 김석 특파원 su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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