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빛 진흙 기와 여전히 생생.. 이곳은 '중세본색'
낮 12시 반. 메가스타호는 예정대로 헬싱키 남방 80km 탈린항(D터미널)에 정박했다. 이 두 시간의 배 여행. 특별했다. 배에 탄 사실을 잊고 지내서다. 정숙한 운항과 쇼핑몰에 온 듯한 착각이 핵심. 열두 갑판(12층)에 승객 2800명을 태우는 대형 여객선(길이 212m, 폭 30.6m)에선 진동조차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선실(2개 층)은 수십 개의 식당과 술집, 상점 그리고 라운지로 꾸며졌다.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맥주 홀짝이고 쇼핑에 열중하면 거기가 배란 걸 잊을 수밖에 없다.
탈린항은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동서 무역 거점. 13세기 십자군전쟁기에 예루살렘의 관문 아코(이스라엘) 수호를 기치로 창단한 튜턴기사단(예루살렘 성모마리아의 독일형제회)이 탈린을 교화시킨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 탈린에선 중세건축이 온전한 올드타운이 곧 역사. 한자동맹 도시에서 교회는 상인조합과 길드(장인공동체)의 활동 중심. 그 도시를 2.1km 성벽(최고 15m)으로 요새화한 건 축적된 부를 지킬 필요성의 산물이다. 그런 교회가 42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시대별 문화양식으로 그리스와 러시아정교회, 로마가톨릭, 루터교 등 신구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가 앞다퉈 건축한 것이다. 그런 올드타운을 상징하는 색상은 주황빛. 중세건물 지붕의 진흙을 이겨 구운 기와에서 발산되는 중세본색(中世本色)이다.
탈린과 헬싱키는 ‘탈링크’(여객선사)로 인해 형제처럼 지낸다. 국가 교통망에서 본토와 섬을 잇는 뱃길은 ‘다리’ 개념이다. 그래서 민족, 언어, 국가가 달라도 두 도시는 하나처럼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달 9일(일요일) 탈린마라톤대회 출발선에서다. 국가가 연주되는데 핀란드 국가였다. 알고 보니 두 나라는 그 음률을 공유한다. 에스토니아 최대 규모 습지 수마(Soomaa)국립공원과 핀란드어의 핀란드 국명 수오미(Suomi), 핀란드 최대 호수 사이마(Saimaa)도 그렇다. 그 뜻이 모두 ‘젖은 땅’이다. 핀란드의 허다한 호수(18만7888개)와 섬(17만9584개)도 섬·호수의 나라 에스토니아와 마찬가지. 역시 빙하의 산물이다. 수돗물을 안심하고 마시는 것 역시 공통점인데, 두 나라 모두 물로 축복받았다.
물이 좋으면 발달하는 게 있다. 양조 과정에 병입량의 7배에 달하는 물을 쓰는 맥주다. 에스토니아라고 예외일까. 이곳 맥주 역시 오랜 역사로 정평이 났다. 1000년 이상 수출된 보리, 밀, 호밀(맥주와 위스키의 원료인 볏과 1년생 작물) 산지란 게 근거다. 양조 역사는 민족 기원과 동일시할 정도로 유구한데, 맥주를 뜻하는 ‘비루(Viru)’가 그 증거. 핀란드어로는 이 비루가 에스토니아를 지칭한다. 그건 고대국가 ‘비루마’(Virumaa·비루의 땅)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주민 ‘비로니안(Vironian)’은 핀란드 민족인 핀(Finn)족의 일단. 두 나라는 언어(우랄알타이어족)도 조상도 한뿌리다. 올드타운의 중심 문 ‘비루게이트’(Viru Gates·14세기 축조된 요새 일부), 그 문을 지나는 올드타운 중심가의 비루 스트리트 모두 비루마에서 왔다. 맥주 비루도 거기서 왔으니 ‘민족=맥주’인 이곳이 맥주의 땅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타르투(제2 도시)에서 양조되는 맥주 중엔 ‘비루(Viru)’란 브랜드까지 있다. 여기선 유럽에서 가장 깊은 곳 샘물로 만든다고 광고한다. 내가 묵던 소코스와 연결된 쌍둥이 호텔도 이름이 비루다.
탈린(에스토니아)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 정보
에스토니아 유로화 사용 유럽연합(EU) 국가. 탈링크 승객은 출입국 검사 면제. 탈린에서 곧장 귀국하려면 예약(핀에어)할 때 탈린∼헬싱키(구간) 추가.
탈린 에스토니아 수도. 헬싱키∼탈린 여객선(80km 2시간 소요·하루 6회 왕복) 운항. 항공기는 30분 소요. 물가는 헬싱키에 비해 저렴한 편. 대개 2개 언어(에스토니아어, 러시아어)가 통용된다. 탈린 시내는 교통패스로 전차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올드타운의 비루게이트 앞 소코스호텔에 묵을 경우 24층 테라스에서 올드타운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인근 래디슨 블루스카이호텔의 ‘라운지24’는 야경 전망소. 올드타운의 전망대는 톰페아 언덕(고도 47m)에 두 곳. 주황색 지붕의 올드타운 전경이 발트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유럽 최고(最古)약국 레아프테크(Raeapteek)는 올드타운 중심 타운홀 광장에 있다.
텔레스키비 폐허가 된 구소련 치하 공장(탈린역 앞)을 개보수해 식당 쇼핑센터 아트스튜디오로 활용 중인 지역. 휴일엔 벼룩시장이 선다. ‘텔레스키비 창조 도시(Teleskivi Creative City)’가 공식 명칭. ‘F-Hoone(에프호네)’는 그런 바람을 이끈 선도적인 레스토랑. 구소련 시대의 암울함이 여전한 공간에서도 안락감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실내디자인이 핀란드 못잖은 디자인 국가라는 칭찬이 과찬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음식도 훌륭하다. 비루게이트 앞에서 전차(1·2번)로 13분.
식당 ◇레이브 레스토랑:올드타운 내 성벽 감시탑의 벽 밑 정원에 위치. ‘레이브(Leib)’는 에스토니아인이 즐겨 먹는 검은 빛깔의 호밀빵. 따끈할 때 소금버터와 함께 낸다. ◇파유빌라(Paju Villa): 페스퀼라보그 숲 부근의 고급주택을 개조한 식당. 소뺨 살(Beef Cheek)이 압권. 비루게이트에서 전차(18번)로 21분(택시 8km·11분). 페스퀼라보그에서 3.5km(택시 8분).
핀에어 유럽 최단거리 항로인 인천∼헬싱키를 매일 직항(8∼9시간 소요). 기내판매 면세품에 무민 캐릭터 및 마리메코, 이탈라 디자인 브랜드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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