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미식가' 다니구치 지로, 영혼을 위로하는 만화가

조성준 2018. 9. 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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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8] 다니구치 지로(만화가·1947~2017)

◆ 보광동에 뜬 고독한 미식가

이태원과 한남동 사이에 위치한 보광동은 이웃 동네와 비교해 조용한 곳이다. 올해 5월 한적했던 보광동 한 골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돼지갈비 식당이 맛집으로 소문나면서다. 갈빗집 앞에 길게 줄을 선 손님들은 웨이팅 한 시간은 감수했다. 이 식당은 이전부터 알음알음 알려진 곳이었지만, 오래 기다리면서까지 먹던 곳은 아니었다. 그곳이 하루아침 큰 인기를 얻은 건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덕분이었다. 이 드라마가 한국 로케이션 촬영 때 보광동 갈빗집을 찾았다는 소문이 SNS를 타고 퍼진 것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에서 시즌7까지 제작될 정도로 인기 있는 TV드라마다. 주인공은 중년 영업사원 고로다. 에피소드마다 패턴은 비슷하다. 고로는 외근 중 허기를 느끼며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는다. '먹방' 드라마인 이 작품은 특별한 서사 없이도 위로, 감동, 충만함을 전달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차오르는데, 고로는 이 음식을 '맛있게 잘' 먹어주기까지 한다. 밤늦게 이 드라마를 보다가 야식을 시키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다니구치 지로가 작화, 구스미 마사유키가 스토리를 맡은 `고독한 미식가`.

◆ 프랑스가 사랑한 만화가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원작은 만화책이다. 지난해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사망했을 때 언론은 그를 '고독한 미식가' 작가로 소개하며 부고 기사를 썼다. 정확하게 이 만화는 구스미 마사유키가 스토리를, 다니구치 지로가 작화를 맡은 작품이다. 구스미가 '고독한 미식가' 기획안을 들고 만화사를 찾자 편집자가 그에게 다니구치를 소개해줬다. 구스미는 신인이었고 다니구치는 거장이었다. 둘은 '고독한 미식가' 이후 '우연한 산보'로도 협업했다.

1971년 '목쉰 방'으로 데뷔한 다니구치 지로는 1975년 발표한 '먼 목소리'로 이름을 알렸다. 오늘날 그는 '고독한 미식가'처럼 간결한 그림체로 잔잔한 일상을 묘사한 만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다니구치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탐정물, SF, 활극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공백기 없이 만화를 그렸다. 출세작은 1987년부터 연재한 '도련님의 시대'다. 일본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소설 '도련님'을 집필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메이지유신 시대상을 그렸다.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당시 활동한 지식인들의 고민과 좌절을 담았다. 이 작품으로 다니구치는 일본 만화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데쓰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받았다.

다니구치의 명성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구 세계가 더 사랑하는 만화가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다니구치를 향한 프랑스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2003년 '열네 살'로 최우수 시나리오상, 2005년 '신들의 봉우리'로 최우수 작화상을 받았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세계 최대 규모 만화축제다. 2011년 다니구치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산책`의 한 장면.

◆ 선선한 가을바람 같은 컷들

"진정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말은 다니구치의 만화를 관통한다. 그의 작품 '산책'엔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새를 관찰하고, 낯선 골목 안에서 기꺼이 길을 잃는다.

이 만화엔 글이 거의 없다. 홀로 나선 산책자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만화는 산책자가 바라본 대상과 그를 둘러싼 풍경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다니구치의 세밀한 화풍은 일상 속 마법 같은 순간을 잡아낸다. 주인공은 산책 중 곤경에 빠진 아이들을 마주한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 비행기가 나뭇가지에 걸린 것. 주인공은 나무에 올라 비행기를 끄집어내 아이들이 있는 지상으로 날려준다. 그는 나무에 오른 김에 거기에 편안히 자리 잡고 고개를 든다. 눈앞에는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이 한 컷은 여름의 끝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처럼 낙관적인 기운으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마지막 컷.

◆ 고향은 돌아온다

또 다른 작품 '아버지'는 빛바랜 가족사진에서 젊은 부모의 모습을 볼 때처럼 가슴이 저릿해지는 만화다. 주인공은 아버지 부고를 받고 15년 만에 고향에 간다. 그마저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가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부모의 이혼이 아버지 탓이라고 여겼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역사를 듣는다. 그리고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세상은 아버지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때 왜 그런 결정들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어른이 된 아들은 조금 알 것 같다. 주인공은 이 짧은 귀향으로 고향에 남겨두고 온 아버지와, 상처로 가득했던 과거와 화해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지문은 이렇다. "나는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고향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이 만화의 주인공처럼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대도시에 자리 잡은 자식은 고향과 그곳에 남은 부모를 유물로 여기곤 한다. 유물은 구시대의 산물이다. 도시가 고향이 아닌 도시인들은 자신이 떠나온 곳을 어느 정도 무시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도 살다보면 별안간 고향의 힘 앞에서 무장해제 당하는 순간들이 온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의 짜릿함, 손에 흙 묻히며 놀았던 놀이터, 친구들과 작당모의했던 골목길, 가을 운동회의 함성, 생기 넘쳤던 부모님의 모습으로 고향은 마음속에 돌아온다. 적어도 다니구치의 '아버지'를 읽는 동안엔 각자의 고향과 부모를 생각하지 않긴 어렵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한 장면.

◆ '고독'한 미식가

다니구치는 "아무 목적 없이 산책하러 나서면, 어찌된 영문인지 그 순간부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합니다. 저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도,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죠. 흐르는 구름을 보면 편안한 느낌이 들고, 길가의 잡초나 돌멩이를 보면 또 다른 감정이 솟아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사색에 잠긴다. 산책 중 사소한 풍경에서 삶의 정수를 깨닫고, 고향을 생각하며 유년시절로 향한다. 사색은 혼자 하는 것이다. 사색은 고독한 사람의 특권이다.

다시 '고독한 미식가'로 돌아와 생각해본다. 한국 편 촬영 때 이 드라마는 보광동 갈빗집만 찾은 것은 아니다. 고로는 6000원짜리 청국장 백반과 길거리 떡볶이도 먹었다. 대단한 메뉴라기보다는 정겨운 음식들이다. 일본 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여행 중 드라마에 등장했던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식당은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에 있었다. 그곳 음식은 물론 괜찮았지만, 철저히 맛으로만 따지면 미식의 도시 도쿄에 더 매력적인 선택지는 많았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헤맨 뒤 찾을 수 있었던 그곳은 차라리 오래된 동네식당에 내려앉은 아늑한 시간의 더께가 마음을 잡아끄는 곳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음식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활동이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오프닝에 고정으로 나오는 대사다. 고로는 식당을 고를 때 스마트폰으로 리뷰를 찾거나 하지 않는다. 길을 헤매다가, 북적한 시장 안을 걷다가, 출장 중 낯선 동네에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식당을 '발견'한다. 음식도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시킨다. 식당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 음식이 나오기 전 기대감은 더 커진다. 혼자라서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다니구치의 다른 작품들처럼 '고독한 미식가'의 방점은 '미식'과 함께 '고독'에도 둬야 할지 모르겠다. 느긋하게 걷고, 상념에 빠지고, 자유롭게 밥을 먹는 것. 가끔은 이 간결한 행위가 영혼을 치유한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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