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 옛 중앙정보부 강당 개방, 장희빈 장남 경종묘 옆

이수지 2018. 9. 2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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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강당이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사적 제204호인 서울 의릉에 자리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강당'인 등록문화재 제92호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을 역사문화예술공간으로 바꿔 10월13일부터 국민에게 개방한다.

1972년 7월4일 이곳에서 남북 화해를 위한 정부의 첫 번째 시도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이 강당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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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제 제92호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강당이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사적 제204호인 서울 의릉에 자리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강당'인 등록문화재 제92호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을 역사문화예술공간으로 바꿔 10월13일부터 국민에게 개방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염원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다는 취지다. 이미 2007년 한시 개방했었다. 1995년 11월 문화재청은 국가정보원에게서 의릉을 인수했다. 훼손된 능역 일부를 복원, 이듬해 5월1일 국민에게 선보였다

'7·4남북공동성명 발표 강당'은 1962년 건립 당시 중앙정보부 강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설계했다. 철근 콘크리트 2층으로 1962년 건축된 강당과 1972년 건축된 회의실로 구성됐다.

1972년 7월4일 이곳에서 남북 화해를 위한 정부의 첫 번째 시도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이 강당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 됐다. 2004년 이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로 등록, 보존하고 있다.

사적 제204호 '서울 의릉'

이곳에 역사 강좌를 개설하고 영화도 상영한다는 계획이다. 지역주민과 단체가 요청하면 대관도 할 수 있다. 올해는 우선 '왕릉에서의 역사강좌'와 '왕릉에서의 영화제'를 운영한다.

'왕릉에서의 역사강좌'는 10월13일 오후 2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길목에서', 11월3일 오후 2시 '조선왕실과 왕릉', 12월8일 오후 2시 '조선왕실의 장례'를 준비했다.

'왕릉에서의 영화제'는 10~12월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6시30분 시작한다. 10월1일 '신기전', 11월28일 '사도', 12월26일 '덕혜옹주'를 상영할 예정이다.

'왕릉에서의 역사강좌'와 '왕릉에서의 영화제' 참여 희망자는 10월1일 오전 9시부터 10월2일 오후 6시까지 조선왕릉관리소 웹사이트(http://royaltombs.cha.go.kr)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180석 선착순이며, 181번째 신청자부터는 대기자로 분류해 좌석이 생길 경우 우선 배정한다.

한편, 보안상 이유로 공개되지 않던 의릉은 국가정보원이 옮겨간 뒤인 22년 전 개방됐다. 의릉은 묘명 그대로다. 크고 아름다운(懿) 무덤(陵)이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어딘가 어색하다.

왕과 비의 봉분이 좌우로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배치된 쌍릉이다. 앞쪽이 왕비묘, 곡담에 둘러싸인 뒤편에 왕묘가 터를 잡았다. 풍수지리적 이유에서라고는 한다. 그러나 경종 부부는 죽어서도 살가울 수 없는 모습이다.

의릉은 묘 뒤편에 천장산이 솟아 있고 아래쪽에는 인공 연못이기는 해도 물이 있다. 명당의 전제인 배산임수의 모양은 갖춘 꼴이다. 하지만 명당의 또 다른 기본인 좌청룡·우백호는 사정이 다르다. 경종의 '양쪽 팔'이 국가정보연수원 등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깔려 고통을 당하는 형세다.

경종은 살아서도 고통스럽고 불행한 왕이었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장남으로 세살 때 왕세자에 책봉됐고 33세에 즉위했다가 4년 뒤 승하한 왕이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세제(世弟)로 봉할만큼 건강이 몹시 나빴다. 경종이 돌아간 지 6년 후 왕비 선의왕후도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소생 없이 별세했다.

역사는 경종을 병들고 허약했던 왕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 왜 병약했는 지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야사는 생모 장희빈이 사약으로 죽기 직전 어린 세자의 신낭을 해친 이후 경종은 쇠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suejeeq@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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