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복지관·밤엔 쉼터..에어컨 찾아 떠도는 노인들

2018. 8. 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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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울 노원구 야간 무더위 쉼터

에어컨 튼 구청 강당·경로당 8곳
저소득층 1박2일 쉼터로 운영

폭염에 초열대야 이어지자
"집은 지옥..도저히 잘 수가 없어"

낮엔 복지관·밤엔 쉼터
에어컨 찾아 하루종일 떠돈다

[한겨레]

지난달 30일부터 서울시 노원구청 대강당에서 운영되고 있는 야간 무더위 쉼터.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고 있는 저소득 노인들을 대상으로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운영되고 있다.

“넌 좋겠다, 집에 에어컨 있어서….”

지난 2일 저녁, 서울 노원구에 마련된 야간 무더위쉼터 남성용 5번 텐트 안에서 쉬고 있던 나아무개(66)씨가 통화 중이던 친구에게 부러운 듯 말했다. 보증금 240만원에 월세 5만7000원짜리 중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나씨는 기초생활수급비 30만원과 노령연금 20만원이 한달 수입의 전부다. 나씨는 더운 바람이 나오는데다 전기요금 때문에 선풍기도 잘 틀지 않는다고 했다. 한낮 집 안 온도계는 36도를 가리켰고, 저녁에도 집 안은 30도가 넘었다. 전날인 1일 낮 기온이 1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이날 저녁은 밤사이 최저기온이 30.4도로 ‘초열대야’(최저기온 30도 이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던 때였다.

초열대야가 보름 가까이 이어진 폭염은 저소득층에게 더 가혹했다. 나씨는 올여름 대부분을 집 화장실에서 지냈다고 했다. 집 안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 화장실이었다. 낮엔 수차례 샤워를 하고, 밤엔 쫄쫄거리도록 틀어놓은 샤워기 물이 흐르는 욕실 바닥에 몸을 누였다. 겨우 잠들었다가도 몇번씩이나 깼다. 주민센터 직원 소개로 이날 쉼터에 처음 나온 나씨는 “코를 많이 골아서 폐 끼칠까봐 망설였는데, 화장실에서 자니 허리도 아프고 더워서 염치불구하고 왔다”며 “다른 사람들도 이용해야 하니 이틀에 한번이라도 쉼터에 와서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원구청은 지난달 30일부터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저소득 노인들을 대상으로 야간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일부 무더위쉼터에서 폭염특보 발령 때 야간까지 개방 시간을 연장한 적은 있었지만, 저녁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무더위쉼터를 운영하는 건 전국에서 처음이다. 노원구의 야간 쉼터 운영 첫날엔 신청자가 19명이었으나 이틀 뒤 45명으로 늘었다. 이용자가 늘자 노원구는 야간 쉼터를 6곳에서 8곳으로 늘렸다.

야간 쉼터 중 한 곳인 구청 대강당엔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줄 폭염 텐트 20여개가 깔렸다. 텐트 안에는 매트와 이불, 베개가 준비됐다. 강당 앞쪽으로 손마사지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더위에 지친 노인들을 위해 손바닥을 주물렀다.

해가 조금씩 떨어지던 이날 저녁 7시께, 노원구 상계2동 주민센터 바깥 온도는 36도에 달했다. 강아무개(87) 할머니는 주민센터에서 구청 야간 쉼터로 자신을 데려다줄 자원봉사자 박영안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할머니는 부채를 연신 흔들며 “집은 지옥이야, 지옥”이라고 했다. 강 할머니에게 손선풍기를 쥐여드리자 “이게 그렇게 시원하더라고…. 집 선풍기에선 뜨거운 바람만 나와”라며 고마워했다. 상계2동 지하 단칸방에 사는 80대 후반의 강 할머니는 태어난 이래 제일 더운 여름을 실감하고 있다. 낮 동안 달궈진 지열을 고스란히 받는데다 환풍이 안 되는 집에서 강 할머니는 “종일 누워만 있는다”고 했다.

노원구청 야간 무더위 쉼터 실내 온도.

자원봉사자 박씨를 애타게 기다리는 건 강 할머니뿐이 아니었다. 허아무개(84) 할머니는 차라리 집보다 바깥이 낫다고 했다. 박씨를 만나기로 약속한 저녁 7시30분보다 10여분 일찍 나와 있던 허 할머니는 쉼터로 향하는 박씨의 차에 타자마자 “어휴~, 이놈의 더위, 징그럽다, 징그러워”라고 연신 말했다. 다리가 불편한 허 할머니는 주민센터 직원의 권유에도 이틀 밤을 집에서 보내다가 야간 무더위쉼터 개소 3일째인 지난 1일에서야 노원구청 대강당에서 잠을 청했다. 허 할머니는 “낮엔 병원에 간 김에 찬 바람이라도 쐬는데, 밤엔 도저히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더위를 온몸으로 버텨내던 두 할머니에게 야간 무더위쉼터는 “천국”이었다. 강 할머니는 “처서(8월23일)까진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아”라고 했다. 쉼터의 실내 온도는 27도, 여성용 5번 텐트에 자리를 편 강 할머니는 그제야 부채를 접어 자신의 지팡이에 걸었다.

쉼터를 찾는 이들은 더위를 피해 널뛰기하듯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이른바 ‘폭염 난민’이었다. 상계1동에 사는 김아무개(82) 할머니와 이아무개(77) 할머니도 낮엔 에어컨이 있는 복지관에서, 저녁엔 구청 야간 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 할머니의 남편은 섬유사업을 하다 외환위기 때 ‘사업이 망한’ 충격으로 뇌경색이 왔고 이후 병원을 오가다 6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 할머니는 차비를 아끼려 구청 대강당까지 지하철을 타고 온다. 노인 무료인 지하철을 타려고 35도가 넘는 날씨에도 버스정류장 세개 거리를 걷는다. 이씨는 “지옥이 따로 없었는데 여기 오니 잠을 잘 수 있다. 구청에서 이런 지원을 해주니 고맙다”고 말했다. 두 할머니는 여성용 2, 3번 텐트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저녁 7시 반께 10개 정도 찼던 ‘폭염 텐트’는 저녁 8시가 넘어서면서 20개가량 대부분 주인을 맞았다. 남들보다 훨씬 고단한 여름을 나는 저소득층 노인들은 밤 9시쯤 되자 텐트 문을 닫고 그동안 못 잤던 잠을 제대로 자기 시작했다.

글·사진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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