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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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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⑧모네와 색채 혼합 인상주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에서 몇 걸음 물러나야 한다.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혼란스러워 보이던 색점들이 제자리를 찾아 생기를 띠며 기적과 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색채 혼합의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작업이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였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 1872년 작.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19세기 유럽은 과학 혁신의 중심이었다. 과학자들은 빛의 본질을 탐구하여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예술가들은 빛의 순간을 포착하여 자연의 본질을 화폭에 옮긴 인상주의를 태동시켰다. 1865년 맥스웰은 패러데이 실험과 아이디어를 엄밀한 수학 방정식으로 통합하여 전자기 원리를 완성한다. 그는 빛의 본질과 인식 과정을 동시에 연구했다. 젊은 시절 색채 인식 작용을 보여주는 색팽이를 고안해, 여러 색이 배열된 색팽이를 빠르게 돌리면 우리 눈이 색을 혼합해 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색채 과학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태동과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예술가들은 팔레트에 직접 물감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색을 병치하여 색상을 재현했다. 캔버스 위에 공간적으로 평균화된 색은 시간적으로 평균화된 색팽이 색보다 선명하고 다양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 혼합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기본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1]

물감이나 빛을 섞을 때 작용하는 색채 혼합 원리는 두 가지가 있다. 물감은 섞일수록 검정이 되는 ‘감산 혼합’을 하고 빛은 섞일수록 백색광이 되는 ‘가산 혼합’을 한다. 물감과 빛의 색채 혼합 원리를 처음 알아낸 과학자는 독일 생리학자며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였다. 색채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미국 물리학자 오그던 루드는 1879년 색채 혼합을 비롯한 당시 최신 광학 연구를 정리하여 예술가와 기술자를 위한 책을 출판했다. 그의 책은 1881년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전해졌으며 점묘화로 유명한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피에르 쇠라와 인상주의를 개척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에게 결정적 기여를 했다.[2]

인상주의 아침이 밝아오다

19세기 미술사는 혁신의 시대였다. <서양미술사>를 집필한 곰브리치는 ‘19세기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했다.[3]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 피렌체에서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 파리로 이동하면서, 몽마르트르 카페에는 미술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몰려들었다. 19세기 미술 흐름을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전환하도록 기여한 선구자는 에두아르 마네였다. 보수적인 미술가들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경의 혼란 속에 드러난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하는 정도로 빛과 속도, 운동감의 인상을 탁월하게 엮어냈다. 그의 그림은 혁신에 목마른 젊은 화가들의 눈을 뜨게 했다.[3]

인상주의를 개척한 젊은 화가들 중 단연 두드러진 화가는 모네였다. 그는 프랑스 르아브르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젊은이였다.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가 있는 자연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도록 앞장섰다. 야외에서 작업하기 좋은 작은 배를 한 척 마련해 강가 풍경을 탐색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3]

1874년 무렵, 마네는 작은 배에서 작업하고 있는 젊은 모네를 찾아와 모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우정을 표현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모네는 미술계의 오랜 관습에 변화를 촉구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동료들이 1874년 한 사진작가 스튜디오에 모여 전시회를 가졌다. 모네는 여기서 <인상, 해돋이>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그림을 본 한 비평가는 전시회에 참가한 모네와 동료들을 ‘인상주의자들’이라 조롱했다. 이것이 ‘인상주의’ 미술의 시작이었다.[3]

인상주의 탄생을 알린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좀 더 살펴보자. 모네는 이 작품에서 아침 안개가 깔린 프랑스 북부의 르아브르 항구 풍경을 그렸다. 텍사스 주립대 물리학자 도날드 올슨은 그림을 주의깊게 연구해 그림에 포착된 시간을 ‘1872년 11월13일 아침 7시35분’이라 특정하기도 했다.[4] 해가 뜨는 아주 짧은 순간에 대상의 특별한 인상을 놓치지 않으려 화면 전체의 효과를 강조하고 세부 묘사는 덜 신경 쓰며 빠른 붓질로 캔버스를 칠했다. 거친 붓질로 완성한 그의 그림은 당시 사실주의에 익숙한 비평가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모네는 이렇듯 빛과 구름이 보여주는 마술적인 빛의 효과에 이끌렸다. 다채롭게 변하는 빛에 따라 언제나 다양하게 변하는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려면 색채 혼합을 활용한 인상주의 기법이 적합했다.

빛의 탐구, 인상주의 발전을 이끌다

모네가 인상주의 기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과학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그는 과학자들의 색채 분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빛의 변화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탐구하고 싶어 연작을 시도한다. 그는 1883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근처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농가를 구해 자신만의 특별한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정원 건너편 늪지대를 사들여 엘트강 지류 물줄기를 돌려 작은 연못을 만들고 일본식 다리도 만들었다. 작업 공간을 확보한 이후인 1890년대 초반, 연작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그에게 연작은 빛의 변화에 대한 과학 탐구 같았다. 이 무렵, 유명한 <건초더미> 연작을 제작하며 색채 혼합 이론을 캔버스 위에 직접 실현했다.

그가 그린 30점 이상의 <건초더미>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890년 겨울 지베르니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 내린 석양 속에서 빛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초더미를 그려 이듬해 완성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201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145만달러(현재 환율로 911억원)에 낙찰되었다.[5] 연작을 통해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동일 사물에서 다채롭게 연주되는 색채 혼합의 교향곡을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인상주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에서 몇 걸음 물러나야 한다.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혼란스러워 보이던 색점들이 제자리를 찾아 생기를 띠며 기적과 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몰랐다. 색채 혼합의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작업이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였다.[3]

모네의 <건초더미>(Meule) 1891년. 개인 소장

이렇게 감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눈이 색채를 인식하는 원리 때문이다. 눈은 자연에서 대상이 갖는 고유한 색을 뒤섞어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으로 인식한다. 두 색이 배색되어 있을 때 두 색을 구분하지 않고 제3의 색으로 인지하는 현상을 ‘색채 동화’(color assimilation)라 한다. 예를 들어, 가까이에 있는 초록색과 노란색을 멀리서 보면 연두색으로 보이는 게 이 때문이다. 인접한 색이 서로 영향을 주어 전체 면적에서 각 색이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병치 혼색’(juxtapositional mixture)이 일어난다. 컬러 사진은 세 가지 염료를 섞어 색상을 재현하고 텔레비전은 빛의 삼원색을 혼합하여 컬러 영상을 만든다.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을 확대해 보면 엄청나게 많은 세 가지 색점(픽셀)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원색을 적절히 혼합하여 컬러를 재현하는 원리가 바로 병치 혼색에 의한 색채 동화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경험하는 색채 동화는 오늘날 첨단 디스플레이 소자에도 활용된다.[6]

인상주의 작품은 색채 혼합의 과학적 원리와 잘 맞는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투쟁은 힘겨웠지만 승리는 시간 문제였다. 모네는 승리의 결실을 만끽하며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고 부자들이 탐내는 소장품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비평가들을 이긴 인상주의의 승리는 혁신의 예로 자주 회자된다.

모네는 끊임없는 자연 탐구와 실험적 연작을 통해 인상주의 작품의 아름다움을 입증했다. 1912년 백내장 진단을 받고 시력이 악화되는 상황에도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3년 수술을 받고 자신감을 잠시 되찾은 동안 1925년 파리 뒬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거대한 수련 연작을 제작했으며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7] 그에게서 시작한 인상주의는 음악과 문학으로 이어졌고 고갱과 세잔에게 계승되어 후기 인상주의를 열며 현대 미술의 초석이 되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새로운 혁신으로 안내한다.[8] 모네의 평생에 걸친 끈질긴 자연 탐구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에게 훌륭한 귀감이다.

[참고 자료]

[1] 프랭크 윌첵, <뷰티플 퀘스천>(흐름출판)

[2] M. Kemp, Nature 453, 37 (2008)

[3] 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예경)

[4] https://nyti.ms/1thF06h

[5] http://fw.to/I4eZgCF

[6] 석현정 외, <빛의 공학>(사이언스북스)

[7] J. G. Ravin, JAMA 254, 394-399 (1985)

[8]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과학자의 생각법>(을유문화사)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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