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학교](8)메트스쿨엔 선생님이 없다..일하며 배우는 프로비던스 아이들

프로비던스(미국)|노도현 기자 2018. 7. 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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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메트스쿨에서 학생들과 한 어드바이저가 토론을 하고 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속도를 즐기기 딱 좋은 로드아일랜드 주의 한적한 도로.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만큼 조용하고 아담하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시골향기 가득한 피자가게를 지나면 유명 자동차브랜드 로고들이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나타난다. 닛산, 혼다, 재규어, 벤틀리, BMW, 벤츠.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에 자리잡은 자동차 정비소다.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인 오후 12시30분, 메트스쿨 12학년 알렉스 휘튼(18)은 보스턴 남서쪽의 작은 도시 프로비던스에 있는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이니 의자와 한 몸이 돼야 할 시기다. 알렉스는 SUV 차량의 쿨링호스를 손보고 있다. 차 주인은 날이 더워졌는데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아 정비소를 찾았다. 알렉스는 고장난 쿨링호스를 뚝딱 고치더니 다른 승용차로 옮겨가 엔진오일을 갈았다. 작업을 마치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들어올렸다. ‘해냈다’는 뜻이다. 알렉스에게 이곳은 일터이자 교실이다. 졸업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인턴십을 하는 중이다.

■ 자동차광 알렉스 알렉스는 일주일에 사흘씩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한다. “여기가 두번째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정비소에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몽키스패너가 그려진 검은 후드티는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다. 처음 인턴을 시작할 무렵에는 엔진오일 가는 법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웬만한 작업은 다 할 수 있다. 전날에는 트랜스미션을 갈아끼웠다고 했다. 코앞에 놓인 목표는 자동차정비자격증을 따는 것이고, 앞날의 꿈은 자신만의 정비소를 운영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했어요. 내가 멍청한 것 같이 느껴지고 수업도 못 쫓아갔죠. 그때 상담 선생님이 ‘너는 차를 좋아하니까 메트스쿨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어요.” 알렉스는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소년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기 때문이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무표정하던 얼굴이 밝아지면서 혈색이 돌았다. 다섯살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정비소의 주인이자 ‘멘토’인 딘 프래튼이 ‘아빠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프래튼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던 알렉스 아버지와 오래 전부터 알고지냈다. 메트스쿨에 들어간 알렉스가 프래튼을 찾아와 부탁한 이후로 5년째 멘토를 맡고 있다. 딘은 알렉스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고 했다. “나도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양복을 입고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난 자동차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알렉스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흔쾌히 멘토가 됐어요.”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메트스쿨 12학년 알렉스 휘튼(왼쪽)은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 멘토인 딘이 운영하는 정비소는 알렉스에게 ‘제 2의 교실’이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알렉스는 일을 마치면 딘의 집에서 바베큐를 함께 먹곤 한다. 그곳에 갈 때면 딘의 차고는 자연스레 교실이 된다. 알렉스의 가족과 딘의 가족이 뭉칠 때도 종종 있다. 죽이 잘 맞는 멘토와 멘티는 프로비던스 시내에 작은 자동차 용품점을 열었다. 두 사람은 “작은 부업일 뿐”이라고 멋쩍어했지만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과였다. 알렉스는 “멘토를 갖는다는 건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관심사가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다.

■ 제이다의 텃밭 로저윌리엄스 공원에 있는 실내 식물원은 뉴잉글랜드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식물원 한편에는 텃밭들이 모여있다. 봉사자들이 노숙자 쉼터에 갖다주기 위해 돌보는 텃밭, 근처 식당에서 키우는 텃밭 앞에 메트스쿨 11학년 제이다 거즈먼(17)의 텃밭이 있다. ‘메트스쿨 정원’이라고 쓴 팻말이 제이다의 텃밭임을 알린다. 7평 남짓한 직사각형 텃밭에는 상추, 당근, 시금치, 히비스커스 따위가 자란다.

제이다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제이다가 하는 일은 식물을 키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손이 필요한 일은 모두 돕는다. 식물원 옆에 사는 염소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밥을 주는 것도 제이다의 몫이다. 모처럼 날이 화창해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식물원 직원이 맨 앞에서, 제이다가 맨 꼬리에서 “이 나무 한번 만져보세요. 느껴보세요”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제이다는 매일 텃밭을 찾는다. 보통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인턴십을 하러 가지만 식물들은 매일 물을 줘야하기 때문이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있고, 나머지 날에는 20분씩 물을 주러 왔다간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다. 집에서 텃밭까지 차로 5분 정도 걸리는데, 날씨가 좋으면 걷기도 한다. 가족과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텃밭을 자랑하기도 하고, 맛보라고 잎을 떼주기도 한다.

메트스쿨 11학년 제이다 거즈먼은 건강한 도시생활, 특히 사람들이 유기농 음식을 먹게 하는 데 관심이 많다. 제이다는 매일 로저윌리엄스 공원에 있는 자신의 텃밭에 물을 주러 간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제이다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 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는 ‘비건’이다. 건강한 도시생활, 특히 사람들이 유기농 음식을 먹게 하는 데 관심이 많다. 졸업 후에는 1년 정도 해외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서 환경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인턴십 덕분”이라고 제이다는 말했다. 그는 지난해 플로리다 주에서 전학왔을 때를 떠올렸다. “학교에 처음 왔는데 어드바이저(교사)가 뭘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다른 공립학교 다닐 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꽤 놀라고 당황했었죠.”

제이다의 멘토는 이 정원의 총책임자인 리앤 프리타스다. 프리타스는 제이다가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앞에서 제이다를 이끄는 게 아니라 뒤에서 조금씩 밀어주고 있다. 제이다가 정원을 돌보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정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또 이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마음도 들어요.” 제이다는 말했다. 수십가지 종을 키우느라 매번 언제 물을 줘야 하는지, 흙을 갈아야 하는지 헷갈려 애를 먹는다. 싹이 잘 올라오지 않는 시금치는 늘 손이 많이 간다.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샐러드용 새싹. 볼 때마다 잘 자라워서 고맙다고 했다. 농약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친환경적으로 재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끔 새나 토끼들이 다 뜯어먹어서 속상해요. 화학물질을 쓸 수 없으니 로즈마리를 둬서 향으로 쫓아내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와서 봤더니 동물들이 다 헤쳐놔서 울 뻔했어요.”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기면 고구마나 호박 같이 키우기 어려운 작물도 심어보려고 한다.

■ 씨앗에서 밥상까지 제이다는 직접 키운 채소들로 학교 카페테리아 식단을 짜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메트스쿨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를 ‘씨앗에서 밥상까지’라고 부른다. 제이다는 최근 일주일에 한번 카페테리아 메뉴를 채식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메트스쿨 프로그램 매니저인 브랜든 레인과 함께 학교를 설득해 결실을 맺었다. 제이다는 “시작은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점차 늘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제 친구들이 먹을 음식에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를 쓰는 일만 남았다. GMO가 들어있지 않은 샐러드, 채소만 넣어도 맛있는 퀘사디아를 만드는 법을 담은 요리책도 만들어볼 예정이다. 제이다 머리 속에는 이미 자신만의 요리법이 꽤 여러개 있다고 했다.

메트스쿨 E센터 전경. 이곳에서 학생들은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창업으로까지 연결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공부한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제이다는 주로 메트스쿨 캠퍼스 안에 있는 ‘E센터’에서 프로그램 메니저인 브랜든 레인과 프로젝트를 논의한다. E센터의 ‘E’는 ‘사업가(Entrepreneur)’에서 땄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창업으로까지 연결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공부한다. 미국 정부에서 정하는 식단 영양소 규정이 있기 때문에 채식 식단을 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제이다와 같은 채식주의자인 브랜든이 말했다. “제이다의 프로젝트는 아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창업보다 개혁 쪽에 중심이 맞춰진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식재료를 재배하고 소비하는 것까지 정형화된 패턴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올해로 문을 연지 6년이 된 E센터가 추구하는 가치는 ‘혁신’이다. 9학년들은 이곳에서 ‘창업의 기본’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한다. 실제 창업에 성공한 이들이 조언을 해주러 오고, 학생들이 창업가의 회사에서 인턴십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엔 학생들이 팝업 스토어를 열어서 직접 만든 마스크팩을 팔기도 했다. 포스터를 만들고, 인쇄하고, 자동차에 붙여 홍보하는 일도 전부 아이들이 했다. 결과는 ‘완판’이었다. 지역주민들에게 인기가 꽤 좋았다고 한다.

제이다와 브랜든이 E센터의 탁 트인 테이블에서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동안 9학년 가브리엘 물리(15)는 방 안에서 종이공예에 한창이었다. 종이공예가 그의 창업 아이템인 것이다. 선반에는 각양각색 작품들이 전시돼있었다. 가브리엘은 얼마 전 지역대회에 나가 850달러(약 95만원)의 사업자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을 주문하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가장 잘 팔리는 것은 장미꽃 모양이다. 하나 만드는 데 13시간이 걸리고, 14만원 정도 받는다. 최근에는 꽃모양 작품에 라벤더향이나 로즈마리향도 입힌다고 한다. 그저 개구쟁이 같아 보이는 작은 소년에게 이런 손재주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9학년인 가브리엘 물리의 창업 아이템은 ‘종이공예’다. 얼마 전 지역대회에 나가 850달러(약 95만원)의 사업자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E센터 곳곳에는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한 스니커즈가 눈에 띄었다. 직접 프린팅한 티셔츠와 가방도 보였다. 실제로 판매되는 상품이라고 브랜든이 전했다. 다른 방에서는 한 학생이 재봉틀을 만지며 봉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년에 재단사 인턴십을 앞두고 있는 남학생이다. 브랜든이 남자바지를 만들 수 있냐고 물었다. “아뇨”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브랜든은 “그걸 만들 수 있게 돕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했다.

■ 선생님이 아닌 ‘조언자’ 1996년 처음 문을 연 메트스쿨은 공립학교이지만 일반적인 학교들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이곳에선 교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조언자라는 뜻의 ‘어드바이저(advisor)’라고 부른다. 어드바이저 한 명은 학년 구분 없이 16명 정도의 학생을 맡아 ‘어드바이저리(Advisory)’를 이룬다. 일종의 학급 개념인 어드바이저리는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학생들이 “어드바이저리 안에서는 모두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끈끈하다.

자동차광 알렉스는 자신의 어드바이저인 샘 밥티스트에 대해 “믿을 수 있고 언제든 뭐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샘은 “알렉스가 내 자동차를 고쳐줄 정도로 나는 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멘토와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 뭘 배우는지 살피며 아이가 목표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E센터에서 만난 한 남학생은봉재 연습에 한창이었다. 아직 옷을 만드는 재주는 없다. 내년이면 재단사 인턴십을 통해 옷 한 벌을 뚝딱 만들게 될지도.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어드바이저리 9개 정도가 모여 한 학교가 된다. 메트스쿨은 저스티스(정의), 유니티(통합), 이퀄리티(평등), 리버티(자유), 피스스트리트(평화의 거리), 이스트베이(동쪽 만)라는 6개의 작은 학교로 구성돼있다. 학생들이 투표해 직접 학교 이름을 지었다. 담장이 없어 학생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메트스쿨은 20여년 동안 공립학교 교사로 일한 엘리엇 워셔와 데니스 리트키가 1995년 비영리단체 ‘빅픽쳐 컴퍼니’를 설립한 것에서 출발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교실에만 가두는, 일방적으로 지식만 주입하는 공교육을 바꿔야겠다는 의지로 학교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이들 교육 방식의 핵심이다. 공싱명칭은 ‘대도시 지역 기술직업센터(The Metropolitan Regional Technical and Career Center)’인데 줄여서 메트스쿨이라 부른다. 2000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라틴계와 흑인 학생이 대부분이던 졸업생 가운데 98%가 대학에 진학해 화제가 됐다. 그 후 미국 공교육의 개혁 모델로 주목받았고, 세계에서 100곳 넘는 학교들이 이 학교의 교육방식을 배워갔다.

유니티 학교 교장인 아일린 베넷은 “모든 학생들에게 좋은 학교이지만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공립학교 시스템은 실패했다. 200년 전 백인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교육은 흑인이나 라틴계 배경을 가진 친구들에게는 뒤떨어진 수업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5~35명씩 한 교실에서 가르치는 교육방식도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메트스쿨의 학교들은 일주일에 두세번 ‘픽미업(Pick me up)’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아침을 연다. 교사와 학생이 자유로운 주제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각 학교는 일주일에 두세번 ‘픽미업(Pick me up)’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아침을 연다. 교사와 학생이 자유로운 주제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취재진이 방문한 날 저스티스 학교는 미투 운동과 관련해 ‘성관계는 동의 하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건물 1층 탁 트인 공간에 모인 70여명의 학생들은 성관계를 차 마시는 것에 빗댄 동영상을 함께 봤다. 성폭력방지센터에서 인턴십을 한 미칠렛은 4월이 ‘성폭력 자각의 달’임을 알리면서 성폭력에 관한 통계를 보여줬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에서 인턴십을 하게 된 학생을 박수로 축하하기도 했다. 벽면에는 “끈끈한 공동체는 함께 성공한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픽미업을 마친 뒤 앤드류 코번의 어드바이저리가 쓰는 205호에 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누군가 주말에 영화 ‘어벤져스’를 봤다고 말을 꺼냈다. 아이들은 “안 본 사람도 있으니 결말 얘기하지 마!”라고 서로 아우성을 쳤다. 며칠 뒤 동물원에 가는 일정도 짜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이 모이면 소란스러운 건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어드바이저리 친구들이 진짜 가족처럼 느껴져요?” 노랗고 회색 빛이 도는 오묘한 염색머리가 인상적인 11학년 클리판 스미스에게 물었다. 그는 “100%죠”라고 답했다. “가족이고 말고요. 서로 농담하고 웃다가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도 가족의 일부잖아요.”

■ 학교와 지역이 하나로 ‘한번에 한 아이씩.’ 메트스쿨의 정체성을 표현한 문구다.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흥미와 진로에 맞는 교육을 한다. 취재진이 눈으로 본 인턴십 활동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실 안 수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평생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맨 처음 이 학교에 와서 흥미를 찾을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단다. 하지만 흥미가 없어도 괜찮다. 메트스쿨이 쌓은 오랜 경험은 학생들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도록 돕는다.

학생들이 “어드바이저리 안에서는 모두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메트스쿨은 ‘공동체’를 강조한다. 저스티스 학교 1층 벽면에 ‘끈끈한 공동체는 함께 성공한다“는 문구가 붙어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저마다 인턴으로 일하는 현장으로 출근한다. 현장은 광고회사, 방송국, 동물원, 애완동물 가게, 로펌, 시민단체, 디자인 업체, 병원, 고아원, 출판사, 이벤트기획사 등 아이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될 수 있다. 인턴으로 일할 곳을 구하는 일은 아이들 몫이다. 학생들은 거기서 현장 전문가인 멘토에게 배운다. 어드바이저들은 아이들이 있는 현장을 점검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둘러보고 멘토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이렇다 보니 학생과 어드바이저, 지역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읽기, 쓰기 수업도 아이들 관심사를 고려해야 해요. 꼭 셰익스피어를 읽는 게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물론 역사적 콘텐츠도 살아가는데 중요하죠. 하지만 햄릿이냐, 졸업해서 무엇을 할 거냐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유니티 학교 교장 베넷의 말이다. 학생들은 같은 책을 보면서 기존 학교들이 가르치는 과목을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개인 프로젝트에 쓴다. 메트스쿨은 학생의 학습과정과 결과를 개별적으로 평가한다. 학생들은 학기마다 인턴십에서 배운 것을 작품이나 공연, 보고서로 만들어 학생, 교사, 학부모, 주민들 앞에서 발표한다. 이렇게 쌓인 경험들은 100점이나 1등급을 받는 것보다 값지다. 주 교육당국이 실시하는 시험을 치를 때도 있지만 학교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한번에 한 아이씩.’ 메트스쿨의 정체성을 표현한 문구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공립학교여서 학비는 전액 무료다. 초창기에는 빌 게이츠 같은 기업가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양질의 교육을 계속 무료로 제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메트스쿨의 공동 책임자인 낸시 베인은 말했다. “우리는 다른 학교에 다 있는 농구코치, 음악교사, 도서관 사서가 없어요. 교감도 없고 학교 구조도 달라요.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고 싶으면 나가서 기타리스트를 만나면 되니까요. 이런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습니다.”

“열정없이 하려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메트스쿨의 공동 창립자 데니스 리트키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런 문구가 보였다. 리트키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팩트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수학, 사회, 과학 등 개별 교과보다 학생의 흥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학생이 동물을 좋아하면 동물원을 찾을 수도 있고 수의사를 만나러 가도 됩니다. 학교는 아이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고 돕는 거죠. 잠깐 재미있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깊게 배우는 것이 중요해요.” 리트키와 함께 학교를 세운 엘리엇 워셔는 “일주일에 두 번 밖에 나가 인턴십을 해서 직업을 얻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직업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학교 안에서 배울 수 없는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20여년 동안 공립학교 교사로 일한 데니스 리트키(왼쪽)와 엘리엇 워셔는 아이들을 교실에만 가두는, 일방적으로 지식만 주입하는 공교육을 바꿔야겠다는 의지로 메트스쿨을 만들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공립학교인데도 전형적인 공립학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죠.” 워셔가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배우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주 정부도 학교를 믿고 아이들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책에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만 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어요.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외곽에서 중심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 “직업이 아닌 라이프스타일” 오전 10시 30분 저스티스 학교 205호 앤드류 코번의 어드바이저리 아이들이 분주해졌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학교 밖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트롤리 버스를 타고 15분쯤 지나 도착한 곳은 코번의 집. 아이들이 그의 집에서 멕시코 대표음식인 부리또를 만들어먹고 근처 동물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3층짜리 주택 옆에 딸린 작은 마당에 아이들이 스스로 의자를 찾아와 둘러앉았다. 몇몇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남기기에 바빴다. 2층 주방에서 코번의 음식 준비를 돕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들 이 집을 낯설게 느끼지 않는 듯 했다. 클리판은 코번의 집에 온 게 이번이 세번째다. “처음엔 선생님 집에 간다니 좀 이상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계속 와보니 나도 선생님을 잘 알게 되고, 선생님도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지난번엔 파스타를 만들었는데 오늘은 부리또라네요.”

이번이 두번째 방문이라는 젠틀리 토레스는 “앤드류는 매우 열성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너무 에너지가 많아서 우리가 맨날 놀린다”고 말했다. 재료가 준비되는 동안 마당에 있던 라일라 알브스에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찾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답은 단호하고 명쾌했다. “어쨌든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고민을 하게 되는데 조금 일찍 고민하는 게 더 좋죠. 6000달러(약 670만원)씩 대학 학비를 내면서 고민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다들 들어와!” 누군가 식사준비가 끝났다고 알리자 아이들은 앞다퉈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흰 쌀밥, 치즈, 올리브, 나쵸, 토마토소스가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이들은 얇은 토르티야 위에 먹고 싶은 재료를 올려 돌돌 만 뒤 한입씩 베어물었다.

메트스쿨 어드바이저 코번은 종종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코번과 아이들은 직접 재료를 손질해 부리또를 만들었다. 코번은 “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지 내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학교다닐 때 ‘칭찬 스티커’를 많이 모았다고, 모의고사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선생님께서 짜장면을 사주신 기억은 있다. 하지만 교사의 집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모습은 매우 놀라웠다. 코번은 “집으로 초대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미국 학교에서도 흔한 장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과 학생들 삶의 경계는 필요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지 내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함께 식사하는 게 아이들 정서에도 좋고 가족 같은 소속감을 느끼는 데에도 좋아요.” 15년째 메트스쿨에서 일하고 있는 코번은 자신의 일에 대해 “그냥 돈을 버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했다.

■ 체험할 ‘현장’ 없는 한국

유니티 학교의 베넷 교장은 학생 이름 뿐만 아니라 멘토의 이름까지 기억했다. 부모님 관계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도 안다고 했다. 알렉스를 아느냐고 물었다. “항상 ‘나는 차를 사랑해’라고 외치는 아이잖아요. 4년 넘게 똑같은 멘토한테 배우고 있죠. 처음엔 학교가 싫다더니 지금은 누구보다 재미있게 다녀요.” 아일린의 화이트보드는 어드바이저이던 시절 맡았던 아이들 사진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스티스 학교의 재닛 윌리엄스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메트스쿨에서 처음 가르친 아이들이 서른 살이 됐어요. 내가 자녀들 대모가 되어주기도 하고 가족 장례식에도 가요. 난 모든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항상 이 자리에 있습니다.”

매트스쿨 유니티 학교 학생들은 카메라를 보자마자 포즈를 취했다. 프로비던스|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메트스쿨의 철학을 한국에 알리려는 시도는 이미 많았다. 창립자들의 책이 번역됐고, 이들이 직접 한국에 와서 메트스쿨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들도 일찌감치 이 학교의 커리큘럼을 연구하고, 세미나나 보고서에서 벤치마킹 사례로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한국 교육에서 아이들의 흥미는 빠져 있다. ‘진로탐색 교육’ ‘개인 맞춤형 학습’ ‘자기주도적 학습’은 말로만 존재하는 듯 하다. 학교 현장에서 이런 교육이 이뤄진다고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올해부터 모든 중학교로 확대된 자유학기제는 메트스쿨과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중학교 1학년들이 한 학기 동안 진로탐색, 토론, 실습 등을 통해 꿈과 끼를 찾게 하는 제도다. 자유학기에는 시험을 보지 않으니 내신관리 부담이 줄어든다. 아이들의 꿈을 찾게 하자는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문제는 자유학기제가 메트스쿨 아이들처럼 진로를 찾아갈 기회를 줄 수 있느냐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직업분야는 다양한데 기꺼이 직업 체험을 함께 해줄 현장은 많지 않다”고 토로한다. 반나절 유명 대학을 둘러보고 나서 ‘전공탐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의 진로체험이 수두룩하다. 5년째 정비소에서 실습을 하는 알렉스와, 기업체를 방문해 두어시간 견학을 하는 것으로 끝내는 한국 학생들의 경험을 비교할 수 있을까. 메트스쿨의 모델을 한국의 교육현장에 그대로 가져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교육자들은 메트스쿨 같은 성공 사례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왔다. 이제는 한국의 교육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다. 한국사회에도 기성복을 벗은 학교가 필요하다.

■ 특별취재팀

장회정(토요판팀), 남지원·노도현(정책사회부), 박효재·심진용(국제부), 이석우·정지윤·강윤중·권도현(사진부), 배동미(디지털영상팀) 기자

■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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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비던스(미국)|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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