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돈 되는 '한국은행 주화세트'..사재기 난무에 무대책

박민기 2018. 7. 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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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용 한정판 주화세트를 돈벌이용으로 뒷거래
구매 장사진..하루 50세트 사들인다는 중간상도
"남대문시장 가면 화폐상들이 더 비싸게 사줘"
관계자들, 제지할 법적 권한 없어 사실상 방관
사재기 탓에 일반 구매자들 피해.."통제 필요"
【서울=뉴시스】박민기 기자 = 1원부터 5원, 10원 등 2018년에 생산된 동전 6종류를 모아놓은 ‘2018년 현용 주화세트’.

【서울=뉴시스】박민기 기자 = “주화 샀어요? 나한테 팔아요. 돈 더 얹어줄게.”

최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서 만난 두 중년 여성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방금 한은에서 나온 여성은 주변을 살피더니 자신이 산 ‘주화세트’를 다른 여성에게 건넸다. 그걸 받은 여성은 주화를 자신의 가방 속에 넣고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천 원짜리 지폐 세 장. 건물 밖에서 기다리던 여성은 다른 사람이 한은에서 1만4800원 주고 산 주화 2세트(1세트에 7400원)를 2만3000원에 다시 사들였다. 주화는 1인당 2세트만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은에서 2001년부터 매년 발행해온 ‘한정판 주화세트’는 소장가치가 높다.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1원, 5원부터 10원, 50원, 100원, 500원 등 그 해에 생산된 6종류의 동전들을 한정된 수량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주화세트 판매를 담당하는 서원기업 관계자는 “화폐박물관 방문객들이 기념으로 사갈 수 있게 처음 제작을 시작했다”며 “매년 수요가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은은 지금까지의 판매추이 등을 감안해 물량을 정해왔는데 매년 조기매진 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올해의 경우 5만개 한정으로 1차 현장판매가 진행됐고 시작 열흘 만에 매진됐다. 하지만 ‘한정 수량’이 부각되면서 ‘소장용’이라는 애초의 취지는 사라지고 이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며칠 전, 줄무늬 셔츠에 크로스백을 매고 있던 이모(여·46)씨는 화폐박물관 앞에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말을 걸고 그들이 산 주화를 웃돈을 주고 다시 사들였다. 왜 돈을 더 주고 사들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씨는 “1~2년 정도 뒤에 가격이 오르면 다시 팔거나 남대문시장에 가면 화폐상들이 더 높은 가격에 산다”고 말했다. 이씨는 “오늘 50세트 정도 사들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기자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주화세트를 되팔려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다. 한 중년 여성은 “기자야? 취재하지 마. 찍지 마”라고 말하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 여성은 그러면서도 이씨에게 자신이 산 주화세트 2개를 건네고 돈을 받아갔다. 옆에 앉아있던 이모(여·82)씨는 “돈 벌려고 하루에 주화를 4~5번씩 사는 사람들도 있다”며 “나도 진작 알았으면 계속 샀을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서울=뉴시스】박민기 기자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서 '2018년 한정판 주화세트'를 사려는 사람들이 건물 밖까지 긴 줄로 늘어서 있다.

한은에서 발행하는 주화세트가 암암리에 뒷거래 되는 건 예전부터 계속된 고질적인 문제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법적으로 제지할 권리가 없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원기업 관계자는 “사람들이 한 번 이상 못 사도록 고지도 하고 현장 직원들이 노력은 하는데 마찰이 생길 수도 있어 제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현장 감시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대학생 오모(23)씨는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오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다”며 “안다 해도 다시 사는 걸 실제로 막기는 힘들다”고 전했다. 오씨는 “오늘 한 번 이상 온 사람들만 10명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사재기로 인한 피해는 순수하게 기념용으로 구매하려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한 시간 넘게 줄에서 기다리던 한 중년 여성은 결국 사는 걸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 여성은 “손자들 주려고 한 세트 구입하려 했는데 사재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못 샀다”며 “저런 사람들을 통제해야 진짜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경북 포항에서 온 권병렬(60)씨는 “사재기 때문에 줄만 더 길어져 순수한 목적으로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고생하게 된다”고 푸념했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한정판의 희소성을 노린 리셀러(reseller·상품을 웃돈을 받고 되팔아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이 최근 많이 등장하고 있다”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 상품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 측면에서 다각적인 고려를 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짜 소장하려는 사람들이 살 수 있게끔 현장에서 철저히 관리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가치가 떨어질 걸 감안하며 물량을 더 늘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minki@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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