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하는 배우 남명렬, "편식 없는 책 읽기는 내 연기 밑바탕"

김시균 2018. 7. 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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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주형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18] 나이 서른 셋에 남들 다 좋다는 제약회사를 그만뒀다. 1년 벌어 모은 돈으로 부모 도움 없이 결혼하고 가정도 일군 제법 능력 있는 남자였지만, 이 모두 스스로 박찼다. 때는 1991년, 입사한 지 6년째. 결행의 이유는 간명했다. 연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대학 시절 교내 동아리에서, 직장인일 땐 극단에 반쯤 몸을 걸친 채로 본업과 병행해오곤 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언제고 그렇게 어중간한 좌표점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결국엔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오롯한 스스로의 의지로.

'나답게' 살고 싶었다. 남들 하라는 대로, 부모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부추기는 모양과 형태대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삶. 그런 삶은 지금껏 해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러니 더는 지연시킬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때늦은 후회에 시달리기 전에 정말 내가 즐길 수 있는 이 '길'로, 잘할 수 있는 '배우'라는 길로 직행해야 했다.

주변의 소란을 감내하며 그렇게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인생 2막의 시작. 무대 위에서의 삶은 판이했다. 소모되는 것이 아닌 채워지는 삶. 하루하루 내적인 충만감에 부풀어 올랐다. 회사원의 삶이 타의에 의해 살아지는 삶이었다면, 배우로서의 삶은 달랐다. 제 삶의 지평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모종의 흥분과 설렘.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하지만 인생은 한편으로 공평한 것이었다. 경제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이 있었으므로 가장으로서의 책무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곤궁한 삶이 이어졌다. 아내는 "2년간 생계를 책임질 테니 그사이 승부를 걸어달라"며 지지해줬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에 그녀는 떠났고, 그렇게 덩그러니 혼자로 남겨졌다. 긴긴 세월, 새 아내를 맞기 전까지 고독한 예술가로서의, 수행자로서의 삶이 지속됐다.

/사진=한주형 기자

돌아와 앉으면 습관처럼 책을 읽었다. 문학, 예술, 사회과학, 자연과학, 역사, 심리, 철학 등 분야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책은 황폐한 내면을 메우는 비옥한 거름이었다. 삶의 커다란 자양제였다. 그리고 구원의 한 양식이었다. 처한 현실이 비록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면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물질이 비워질수록 내면은 채워졌다. 내면이 채워질수록 연기는 더더욱 빛이 났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25년.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그를 '가장 지적인 배우' 중 한 명으로 부른다.

배우 남명렬(59)의 '현재'를 이룬 소이연을 거칠게나마 스케치해봤다. 필모그래피를 되짚지 않은 건 부러 의도한 것이다. 그의 숱한 출연작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이미지를 축조해 보려는 건 대개 부질없는 시도로 끝날 공산이 커서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되기 힘든 배우다. 천 개의 배역이 있다면 그는 아마 천 개의 이미지를 선보일 것이다. 그는 주어진 배역을 자신에게 꿰맞추지 않는다. 아예 그 인물로 들어간다. 그런 다음 새롭게 재탄생시킨다.

영화 `탐정: 리턴즈`에서 배우 남명렬은 반전 캐릭터 우원일 원장을 열연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최근 출연작인 '탐정:리턴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연기한 우원일 원장은 세상이 부여한 도덕적 가치체계로는 다분히 광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입각해 악행을 벌이는 히틀러형 범죄자이지만, 스스로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아마도 이런 인물이야말로 배우로선 가장 난감할 것이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어도 사적 윤리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해낸다. 카메라가 들이미는 그 순간 그는 적어도 우원일 원장 자체가 된다. 인간 남명렬을 잠시 지우고, 스스로를 아예 새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물론 이것은 당면한 배역에 대한 치밀한 탐구와 이해에 바탕한 것이다. 그가 '스타 페르소나'와는 거리가 먼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이 원하는 하나의 가공된 이미지, 구성된 이미지가 아니여서다. 매순간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는 무정형의 배우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우로서 표본일 지도 모른다.

은백색의 짙디 짙은 머릿결, 그것만큼이나 은빛으로 물든 코밑 그리고 턱 아래 수염, 은근히 양눈을 덮고 있는 작고 동그란 은테 안경, 179㎝의 마른 장신을 부드럽게 감싼 무채색 양복. 그가 자아내는 내외적 인상을 몇 마디 언어로 해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턱밑에 가만히 손을 얹을 적이면 그는 세계의 진리를 탐하는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말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땐 이편이 아닌 저편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이 잠시 포개진다. 그러다가도 일순간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미소지을 땐 호기심 많은 소년의 천진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리 말해둘 것이 있다. 그를 학자, 의사, 판사 등의 전문 지식인의 이미지로만 소비해서는 곤란하다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절반만을 알고 나머지 절반은 무시하겠다는 태도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최근 그를 만나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베일에 싸인 그의 이미지의 나머지 절반을, 그 내밀한 삶의 궤적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자기 삶이 충만한 배우일수록 타자의 삶도 훌륭히 체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그런 배우일 것 같았다(미리 말하자면 지금껏 연재한 인터뷰 글 중 분량이 가장 길다. 가급적 그의 입가로 발화하는 언어들을 최대한 그러모으고 싶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진=한주형 기자

-최근 '탐정: 리턴즈'에서 분하신 우원일 원장 얘기부터 해보죠. 캐릭터가 반전이 있어요. 그릇된 신념의 과잉이 빚어낸 어떤 뒤틀림이랄까요. 그 비밀을 감추고 있다가 종래엔 들통이 나는데,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여기진 않더군요. 매우 지적이고 품위 있는 이미지 이면에 깃든 광기, 그것을 잘 표현해주신 것 같아요.

▷제일 구제받기 힘든 게 신념에 의한 범죄일 텐데요. 이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잡혀가면서도 스스로는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어찌 보면 이것은 히틀러식 사고 체계가 아니었을까 해요. 히틀러식 사고 체계는 인종적으로는 아리안족만 우수하고, 나머지는 열등하다고 보죠. 동성애자, 유대인 등은 장애가 있는 열등 개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 사회적으로 배제시키려 했겠지요. 우 원장이 보는 것도 그런 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자라보았자 이 사회에 별반 기여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는 것. 사회의 잉여로 남을 확률이 높을 이들의 건강한 장기라도 적출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그것을 준다면, 그게 외려 좋은 일 아니겠느냐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지요. 그런 일련의 추측들을 해보면서 이 캐릭터에 몰두했어요. 재밌었어요.

-자기 신념을 맹종하는 캐릭터가 처음은 아니시죠? 워낙 분야와 경계를 막론하고 활동해오셨으니까요. 그간 연극만 80여 편, TV 드라마는 40여 편, 영화도 20여 편 출연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양에 입이 채 다물어지질 않네요.

▷처음은 아니지요. 우 원장만큼 악한 캐릭터는 아니었지만요. 자기 신념이 옳다고 맹종하는 사람은 한 적이 있는데. 음, 연극 중에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라고 있어요. 저는 이 작품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를 연기했어요. 그 아버지는 지식인이기도 하고, 교수이기도 해요. 지식인임에도 상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 꽤 재미난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제 시선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보는, 자기한테 갇힌 사람이죠. 가족에게도 끝없이 생각을 강요해요. 잔소리하고, 스트레스 주고요. 그런데 말예요. 우스갯소리인데 정말 자기 생각대로, 자기 시선대로만 살면 일상에서 스트레스는 덜 받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고민이 적어질 테니 말이죠(웃음).

그의 답변은 대체로 문어체적이었다. 오랜 독서의 세월이 그의 입가로 발화하는 언어들마다 짙게 흔적처럼 배어 있었다. 말투는 느린 편이었으나 표현은 명료했고 말마디엔 막힘이 없었다. 마치 가지런히 다듬어진 산책로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국내 배우님들 중 가장 다독하는 분 중 한 분이신 걸로 알아요. 배우님에게서 풍기는 지적인 이미지는 좀처럼 위장 같지가 않습니다. 원래 일상에서 풍겨나오는 어떤 지적인 무드가 지금의 이미지에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 같달까요. 평소 얼마나 독서를 하시고 배우에게 독서 행위란 어떤 의미를 가질지 궁금하네요.

▷제가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어요. 아파트 방 한쪽이 제 서재인데 책장이 7개 정도 되죠. 책상이랑 책장을 빼고 다른 가재는 없어요. 전부 책들이에요.그냥 매일 하는 취미가 독서여서 얼마나 읽는다고 말하는 건 다소간 무리인 것 같습니다. 독서 행위의 의미라. 제 말이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을 겁니다. 배우 일 자체가 다양한 분야의 배역을 맡을 가능성이 항상 내재해 있지요. 그런 것이기에 깊진 않아도 폭넓게 읽는 건 굉장한 도움이 된다고 봐요. 배우가 어떤 배역을 소화해야 할 때 그 배역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일 수가 있죠. 사실 진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리고 진짜 전문가가 된다면 되레 연기에 방해가 될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적어도 그 밑 단계까지는 필요하지 않나 해요. 앞으로 어떤 배역이 주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면 언제라도 접근 가능할 수 있도록요. 그래서 배우가 평소 다양한 분야의 책에 관심을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

-그 말인즉슨,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깊이는 그 배우가 이해하는 세상의 깊이에 일정부분 비례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오는데요. 다른 얘기지만, 6년 전쯤에 어느 문화행사에서 책 몇 권을 추천해주셨더군요. 메모해왔는데요. 리영희 선생의 '대화', 박범신 작가의 '은교', 사진작가 스콧 슈만의 '사토리얼리스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 그리고 '배우의 길' '털없는 원숭이' '만들어진 신'. 어느 한 분야에 편향되지 않은 목록이더군요. 그간 또 무수한 책들을 읽어오셨을 텐데, 인상 깊게 보신 책이 있으시다면요.

▷(고민하며) 요즘 읽은 것 중에 유홍준 교수의 '추사 김정희', 그걸 가장 최근에 읽었어요. 좋더라고요. 추사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거든요. 유 교수가 쭉 완결형으로 자기 연구를 책으로 엮었던데, 썩 재미있었어요. 글도 흥미롭게 잘 쓰잖아요. 저처럼 얇고 넓게 읽는 사람에겐 더더욱 좋죠. 그리고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몇 권 있는데, (더 오래 고민하며) 세 권 정도만 떠오르는 대로 언급해볼게요. '예술가의 나이듦에 대하여' '애도하는 사람'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이에요. 제 개인적 감상평을 들려드리기보다는 그냥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네요.

-왜인지 어린 시절부터 혼자 고독하게 독서에 전념하는 문학청년 이미지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수업 중에도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며 모종의 신비주의적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소년. 여학생들한테 편지도 제법 받으셨을 것도 같고(그는 대전 토박이다. 초·중·고교, 대학교 모두 대전에서 나왔다).

▷(웃으며) 아뇨, 전혀요. 그렇지도 않아요. 제가 늦깎이에 배우가 됐잖아요. 중·고교 이후 연락이 끊긴 동창들이 뒤늦게 제가 배우가 된 걸 알면 다들 놀라요. "네가 배우를 해?" 이런 반응이죠. 저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아이였어요. 나서지를 않았어요. 사고도 한번 안쳤고요. 한마디로 조용조용한 범생이었던 거죠. 그렇다고 성적이 아주 빼어나지도 않았어요. 우등상 주기엔 그렇고, 근데 뭔가 상은 하나 쥐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의 학생이었던 거죠. 그럴 때 주는 게 뭘까요. 선행상이죠(웃음). 선행상만 몇 번 받았던 것 같아요.

-의외네요. 어릴 때부터 키도 훤칠하셨을 것 같고,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하셔서 단연 눈에 띄는 학생이었으리라 짐작했거든요.

▷중학생 땐 제가 조그만했어요. 한 반에 60명 정도 있었는데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었죠. 중학교 때 제가 15~16번 정도였어요. 작은 축이죠. 그러다 고교 2학년때부터 확 크더라고요. 1년에 10㎝씩 자랐어요. 2학년 때 40번이 넘어가더니 3학년 땐 50번이 넘어갔어요. 그래서 중학교 동창들이 보면 "네가 이렇게 컸냐"고 다들 놀라요. 아까 제가 조용했다 그랬잖아요. 극작가 중에 김태수라고 있어요.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를 쓴 친구죠. 한때 대중연극계에 의미 있는 작품이었어요. 아무튼 태수가 제 고교 동창이에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요. 나중에 서로 얘기를 하는데 그러더대요. 제가 동창인 것도 몰랐다고요.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어요. 태수는 매일 앞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고 놀던 인기 많은 친구였는데, 저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랬으니(웃음).

/사진=한주형 기자

일탈 한번 부린 적 없는 소년이었다. 실상 사춘기랄 것도 없었다. 가지런히 갠 셔츠처럼 구김 없이 맑고 반듯했던 소년. 남명렬은 1959년 4남매 중 둘째로 대전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그는 "착하고 부모님 속도 한번 안 썩인, 이 사회의 일반적인 폼(form)에 딱 맞는 학생이었다"고 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말은 당시 그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별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여본 적 없어서였다. 충남대 농대에 간 것도 성적에 맞춘 것일 뿐이다. 제약회사 영업직도 그랬다. 임학과 졸업 후 남들 하는 대로 지원했고 한 번에 덜컥 붙었다. 1985년 봄의 일이다. 지난 시절을 회상하던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솔직히 저는 저의 20대가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죠?

▷스스로 뭔가 결정하며,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질 않아서죠. 다들 그렇듯 고교 졸업하고 예비고사 보고, 점수 맞춰 대학 가고 졸업하면 적당히 취업하는 그런 규격화된 삶이었어요. 그땐 지금처럼 취직이 힘들지 않았어요. 다들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 낳고 그랬죠. 제 20대가 그랬지요. 제가 다닌 일동제약이 괜찮은 회사였어요. 보수적인 회사인데 직원들 대우도 썩 좋았고요. 1년 번 걸로 장가 밑천을 다 마련했으니까요.

-부모님께선 자랑스러워 하셨겠어요

▷그렇죠, 걱정을 전혀 안 하셨어요. 근데 저는 심정적으로는 알았어요. 부모님이 "우리 큰아들" 하시지만, 연년생인 남동생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크다는 걸요. 남동생이 공부를 저보다 빼어나게 잘했어요. 걔는 별 문제없이 의대에 진학했고 지금 대전에서 병원장을 하고 있지요.

-임학과를 지원한 게 좀 독특하게 다가오네요.

▷(웃으며) 처음엔 아버지와 상의를 했어요. 서울에 있는 공대를 쓰겠다고요. 펄쩍 뛰시더라고요. 누님이 아직 대전에서 대학 다니던 때였어요. 연년생인 남동생은 실수가 없으면 이듬해에 의대 진학이 확실한 수재였고요. 그러니까 제가 대학 들어가는 해에 대학생이 2명이 되고, 그 다음해에 3명이 되는 거였어요. 등록금 부담이 클 수밖에요.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서울 하숙비까진 못 대준다고요. 게다가 사립은 등록금도 비싸잖아요. 결국 선택지는 충남대뿐이었어요. 입학비도 사립대보다 3배가량 싸요. 당시 충남대 입학비가 8만원이면, 서울 사립대는 25만원 정도 했거든요. 아무튼 급하게 선회해서 충남대에 간 겁니다. 그러니 약간 소심해지는 거예요. 당시 학교별로 시험 준비를 따로 해야 하는데 급하게 다른 곳을 준비하게 됐으니. 그래서 공대 말고 커트라인이 좀 더 낮은 농대를 지원했어요. 나중에 시험 성적 보니 공대 넣었어도 갔을 수준이더군요(웃음). 그리고 당시 1학년은 농업계열, 공학계열, 문학계열 하는 식으로 묶여 있었어요. 2학년부터 전공을 지원하는 거죠. 저는 애초 원하던 계열이 아니었다보니 1학년 성적이 별로였어요. 평균 C0 정도였나요. 그러다 마침 아는 형이 임학과인데 네 성적으로도 가능할 테니 써보라 해서 임학과가 전공이 된 겁니다.

-그렇게 임학과 졸업하고 6년 간 직장 잘 다니시다가 그만두게 된 계기는 뭔가요?

▷뭐랄까, 어느 순간 '더 이상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영업일 자체가 체질에 안 맞았어요. 그런 답답함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을 때 결국 그만둔 거죠. 그게 서른 셋일 때 얘기예요. 난생처음 내 인생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이었죠.

-그렇다고 갑자기 연극판에 뛰어든 건 아니실 테고요. 그 전에 쭉 연극 일을 해오셨던 거죠? 연극과의 첫 만남은 언제부터인가요?

▷충남대 1학년 때 연극반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처음엔 관현악단에 지원했고요. 이유가 있었어요. 고교 시절부터 관악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거든요. 제가 다닌 고교(보문고)에서 관현악단 '브라스밴드'가 썩 유명했죠. 저는 그 밴드가 공연하는 걸 보면 가슴이 막 뛰었어요. 그래서 1학년 때 한번은 단원 모집을 하길래 부모님과 상의를 했죠. 하지만 착한 학생이잖아요. "무슨 딴따라냐, 공부나 해라"고 화를 내시니 금방 포기했죠. 그러고 대학을 갔는데 관현악단 있길래 플루트 단원에 지원한 거예요. 저를 포함해 남자 1명, 여자 1명 해서 총 3명이었죠. 1학년들은 오후 6시부터 연습실에서 선배들이 매일 연습을 시켰어요. 첫 주는 잘 나갔죠. 그런데 말이죠. 대학 수업이 매일 6시에 끝나진 않잖아요. 낮 12시나 오후 2시에 끝나기도 하고요. 그럼 공강은 뭘로 메워요. 좀 그렇더라고요. 그러다 둘째 주에는 서너 번, 셋째 주에는 두 번 정도 갔어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나머지 두 친구는 결석 없이 계속 연습을 했는지 간단한 곡 하나 정도는 얼추 연주를 하대요. 저는 아직 스케일도 익숙지 않은데도요. 당연히 비교가 되죠. 결국 한 달 만에 그만뒀어요. 그러던 참에 연극동아리에서 하는 연극을 보게 됐는데, 순전히 그냥 재밌을 것 같아 지원을 했고요. 그게 아마 5월이었을 겁니다.

-연극반은 열심히 나갔나요?

▷일단 관현악단은 사람이 많아요. 연극은 적고요. 그러니 존재 자체가 소중해지는 거죠(웃음). 나를 필요로 하는 것도 같고요. 엄청 열심히 했던 건 아닌데 그 느낌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동아리 분위기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때였어요. 제가 78학번인데 1973년에 국문과 선배들이 만든 동아리예요. 거기 들어가 이듬 2월에 공연을 올리게 돼요. 4학년 졸업 공연이었죠. 첫 무대 경험이었고요. 그게 이강백 선생의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입니다. 허름한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그 하숙집 아들 역할이었어요. 여인숙 느낌이 물씬한 낡은 집인데 일단의 계기로 장군의 가족을 꼬셔서 묵게 해요. 그 과정에서 장군 딸과 눈이 맞고요.

-첫 연극에 주인공이었던 거네요?

▷내면적으로는 주인공으로 생각하는데, 극을 한 두 시간 정도 했거든요. 그런데도 대사가 열 마디 정도밖에 안 됐어요. 지금 느끼는 사랑을 말로 표현을 잘 못해요. 눈으로만 전하는 게 전부죠. 그럼에도 등장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무대에 계속 있어야 했어요.

-연극이 즐겁다고 느낀 건 언제였나요.

▷대학교 4학년 때였지요. 이문열 작가의 원작 '사람의 아들'을 각색한 공연을 올렸어요. 돌이켜 보면 좋은 성과를 냈기에 내가 연극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럴만도 한 것이, 그 작품이 전국 대학연극제 출품작에 올랐어요. 저는 주인공 민요섭 역이었죠. 대한 연극치고는 제법 수준 있는 작품이었어요. 대학연극제 지방심사하러 오신 심사위원분들이 유민영 선생과 돌아가신 차범석 선생 같은 분들이었어요. 그런 분들이 일개 대학연극제 심사를 했단 말이죠. 이구동성으로 그러셨어요. "일개 대학에서 이런 수준 높은 연극을 만들다니 놀랍다. 대전이 연극의 불모지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진다." 그런 칭찬을 받으니 우리 스스로도 자부심이 절로 생기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내가 한 행위에 대해 사람들이 감동하고 좋아해준다는 것, 그게 나한테 희열을 주는구나, 라는 걸 처음 느꼈어요. 그 전엔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죠. 그리고 말이죠. 그 공연이 이후부터 소문이 나서 대전 MBC 중계를 했고요. 우리 대전의 기성극단 작품도 방송 프로그램에 내는 적이 없었는데 저희 졸업작품을 찍으러 와서 녹화하고 편집해서 특집 프로그램 비슷하게 내보냈던 거죠. 하루는 시내를 걸어가는데 가전용품 가게 전시 TV에서 내 얼굴이 나오더라고요. 신기했죠.

-그럼에도 연극 일로 뛰어들겠다는 결단은 내리지 못하셨던 거네요.

▷졸업하면서 연극하겠다는 생각까진 안 했어요. 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훈련이 안 돼 있었던 겁니다. '졸업하면 취직해야지'라는 틀에 박힌 사고방식대로 끌려간 겁니다. 연극을 한다는 건 어찌 됐든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집에서도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고 스스로도 경제적인 문제를 포기하면서까지 연극을 해야겠다는 그 정도 열망까지 불타오르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좀 더 무르익음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 자기를 맞추는 덴 익숙했지만 반대적 삶의 가능성엔 부러 눈감고 있었다. 선택하기보단 선택당하는 게 외려 편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당면한 현실에 자신을 짜맞췄다. 그렇게 졸업했고 곧바로 일동제약 영업직에 들어갔다. 6년여의 세월. 5년은 대전에서, 마지막 1년은 서울에서 보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으나 꾹 참고 버틴 나날들이다. 그나마 입사 2년 후부터 극단 일을 병행한 덕에 견딜 수 있었다.

-제약회사 영업직 일은 어땠습니까.

▷병원 담당, 그러니까 병원에 약을 파는 일이었어요. 영업직이 병원 담당, 약국 담당, 도매 담당으로 구분돼요. 그때엔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전이었지요. 직원마다 서산, 당진, 천안 등 지역별 근무지가 나뉘는데, 할당 받는 지역군마다 매월 매출 목표를 달성해야 해요.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룬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에요. 조금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죠.

-느낌상 실적이 어중간하셨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웃음). 딱 중간 정도였어요. 썩 빼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뒤처지진 않는 정도. 흥미가 없었어요. 이걸 잘하려면 도전정신과 목표의식이 굉장히 세야 돼요. 실적을 달성했을 때 희열 같은 걸 느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던 거죠. 이 회사 다니던 마지막 해에 제가 서울에 있는 병원 담당으로 옮기면서 거기 지점장이랑 같이 일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서울대 약대 출신이더군요. 보통 약대 나오면 연구 분야랄지, 자기 약국을 연달지 그렇게 사는게 보편적 행로일 텐데, 이 사람은 그럼에도 자원해서 이 일을 한다는 겁니다. 영업 일에서 오는 희열이 크다는 거예요. 너무나 행복해하고 재밌어 하는 게 제 눈에 보였어요. 신기했죠.

-영업 일을 하면서 '대전연기자그룹'을 창립하신 걸로 알아요. 창립멤버 중 배우님만 직장인이고 나머지는 전업배우였다고 하던데요. 그게 언제 즈음 일인가요.

▷입사하고 2년 지나서였어요. 대전에 당시 충남대뿐 아니라 한남대, 중경대(지금의 우송대), 대전공업전문대가 교내 연극반이 있는 학교들이거든요. 저랑 같은 학번이거나 한 학번 아래 위인 젊은 친구들이 있었어요. 이 친구들이 기성 연극은 희망이 없다, 우리는 새롭게 살아있는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며 호기롭게 연극연구모임이란 걸 만들어요. 출발은 스터디그룹이었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를 읽어내자, 어떤 연기를 하자는 각오로요. 그렇게 정기 스터디를 하고 공연도 보고 1~2년 정도 지났을 즈음, 우리도 그러면 극단 깃발 하나 꽂자 해서 만든 겁니다. 그러다 2년 후에 서울로 일터를 옮긴 거예요. 그게 1990년이었죠.

-그해에 전업 연극인으로 뛰어든 거군요.

▷12월 31일에 사표를 썼어요. 말 그대로 쉬었죠. 퇴직금을 3000만원 정도 받았어요. 당시로 상당히 많이 액수죠. 그걸로 버티다 대전을 다시 내려가요. 극단에 적을 두고 있으니까요. 동인제시스템이라 대표를 돌아가면서 했는데, 제가 내려오니 대표직을 떠넘기더군요(웃음). 아무튼 그렇게 지내다 채윤일 선생님과 연이 닿아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고요.

-채윤일 선생님은 당시 최고의 연출 중 한 분 아니었습니까. 그분과 연은 어떻게 닿은 건가요.

▷처음 뵌 건 1992년이었어요. 대전에 있는 제 극단 말고 다른 극단에 캐스팅돼서 객원 공연을 한 게 있어요. 그게 '불의 가면'(권력의 부도덕과 허망함을 보여주는 실험극이다)입니다. 당시에 그 극단 대표와 채윤일 연출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채 연출이 자문을 하러 자주 왔어요. 선생이 어느 날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불의 가면'을 내가 서울에서 하려는데 혹시 나랑 같이 할 수 있겠느냐. 개런티는 많이 못 주지만 하숙비는 주겠다." 하숙비, 개런티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야 뭐 호시탐탐 서울에서 활동할 기회를 바랐으니 좋다고 했죠. 불감청고소원이라고 하잖아요.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원했거든요. 그렇게 올라갔어요. 그게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일 때 얘기입니다.

채윤일 선생은 당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국내 최고의 연출 중 한 명. 지방의 무명 배우가 이름을 알리는데 그만 한 디딤돌이 없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채 연출과 서울에서의 첫 공연 '불의 가면'을 올린 건 1993년 마포구에 있는 산울림소극장에서였다. 그는 왕의 권력과 폭력성을 견제하는 소신파 지식인 처용을 연기했다. 두 달 하고 열흘 남짓 벌인 공연이었다. 100석 내외인 비좁은 공간에 200명을 웃도는 인파가 매일같이 북적거렸다. 압구정으로 극장을 옮겨 석 달 간 공연했을 때에도 반응은 뜨거웠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자 같이 하자는 사람은 의외로 나타나주지 않았다.

-이유가 뭐였을까요?

▷역시 연극은 대학로더군요. 신촌과 홍대 부근 산울림극장에서 하고, 다음 석 달은 압구정동에서 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연극계 관계자들이 사람 많은 곳은 잘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거리적인 면도 있고, 관계자들은 일단 대학로 위주로 가더라고요. 아무튼 공연 끝난 다음 들어오는 제안이 없고 하니 고민되더군요. 대전에 다시 내려가려니 좀 창피했고요. 사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갔을 때 나름 화제였거든요. 근데 화제가 되면 질투와 부러움이 생기잖아요. '남명렬, 서울 갔는데 하다보면 다시 내려올 거야' 이런 말이 한 번씩 들려오는 거예요. 정말 내려가면 자존심이 상하니 돈 없어도 버텼죠.

-서울서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셨고요?

▷상경할 때만 해도 남동생이 의대 졸업할 무렵이었어요. 실제로 서울서 생활할 때 대전서 남동생 내외가 장남 역할을 잘해줬어요. 제가 형인데도 가끔 용돈도 받았고요. 채윤일 연출이 절 부를 당시가 퇴사한 지 2년 지난 후이기에 여웃돈이 고갈될 즈음이었죠. 어쨌든 생계는 동생이 도와줬으나 문제는 집이었어요. 월세보증금이 없는 곳을 찾으려니 결국엔 고시원뿐이더군요. 거기서 몇 년 살았죠. 고시원 가기 전엔 후배 집에서 1년 정도 얹혀살기도 했고요. 삼선교역 인근에 있는 한옥식 가옥 곁방이에요. 그러다 이 후배가 결혼을 해서 쌍문동에 아파트를 얻었는데, 걔가 그리로 가니 제가 오갈 데가 없어서 염치없게도 그 신혼집에서도 살았어요. 그렇게 두 달을 지내니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어 고시원을 갔고요.

-서울에서 두 번째 공연은 언제 올리신 건가요.

▷첫 공연 끝내고 두세 달 빈둥거리던 차에 '불의 가면' 초연 때 같이한 선배 배우가 극단을 새로 창단했어요. 그게 '김동수 컴퍼니'입니다. 김동수 씨가 '나 이제 배우 그만하고 연출하겠다, 아카데미도 하겠다' 해서 창단한 극단이에요. 그 양반이 자기가 보기에 기량은 있는데 기반이 없는 배우들을 모은 거죠. 아직 소속이 없어서 배회하는 몇몇의 배우들을 모아다가요. 그렇게 올린 게 1994년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입니다. 이게 제 첫 대학로 입성작입니다. 당시 연극계에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창단작인 데다 배우들도 아주 유명인이었던 것도 아닌데도 말이죠. 그때 배우가 저, 박지일, 조경숙, 한경미 그리고 오광록입니다. 박지일은 부산에서 저보다 6개월 먼저, 그러니까 1993년 5월에 상경한 친구였어요. 오광록은 거의 룸펜(부랑자)이었달까. 폐인처럼 지낼 때였고, 조경숙 배우는 지금은 TV에 많이 나오는데 당시엔 동국대 영문과 졸업하고 약간의 부침이 있어서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어요. 한경미 배우는 20대 초반에 산울림에서 '홍당무'라는 공연을 해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은 촉망받는 신예였으나 그 뒤로 뒷골목 연극을 하던 때였고요. 다들 절박했어요. '아, 이거 제대로 안 하면 우리 미래가 정말 암담하겠다'는 그런 절박함 말이죠.

-연극계 안팎으로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고개를 저으며) 전혀요. 연극이 아무리 성공해도 못 알아봐요. 연극이 그래요. 총 관객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대박 난 작품이라 해도 많아야 1만명이에요. 그리고 분장을 하잖아요. TV 드라마나 영화라면 안 그럴 텐데, 당시 했던 것들이 분장이 대체로 진했어요.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에서 배우 남명렬. /사진 제공=신귀만 작가

-워낙 많은 작품을 하셨기에 일일이 짚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대신 이렇게 여쭙고 싶네요. 배우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애착이 가는,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작품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네 작품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디푸스와의 여행'(1995), '바다와 양산'(2004) 그리고 '코펜하겐'(2009)과 '알리바이 연대기'(2013)예요. 왜 이 네 작품이냐, 우선 '이디푸스의 여행'은 제가 연극을 보는 시각을 굉장히 크고 넓게 해준 작품이에요. 그전까지는 대전에서든 서울에서든 일상적인 스토리텔링 위주의 연극, 그런 범주 안에 있는 작품들 위주로 해왔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일반적인 연극 형태와 다른 아주 실험적인 성격이 짙어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럼에도 작품이 잘 나왔고, 성과도 있었고, 제 자신한테 커다란 도약의 계기였어요. '바다와 양산'은 이야기가 너무 가슴 아프면서도 인간적이었지요. 작품의 질이 아주 훌륭했고, 배우들끼리의 호흡, 연출의 합도 잘 맞았고요. 그리고 '코펜하겐'. 이건 하고 나서 스스로가 자랑스럽더군요. 고전물리학도 아니고 현대물리학 용어가 난무하는 작품이에요. 양자역학의 개념이 중심이지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에요. 고전물리학은 실제로 체험 가능한 물리학이죠.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의 세계, 원자핵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전자가 움직이는 걸 과학자들이 얘기하는데, 일단 그 개념을 우리가 습득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죠. 그걸 인식하면서 물리학 개념으로 인간관계를 얘기하는 극이었으니까. 관련한 독서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일단 알아야 동의원소니 핵 폭발 원리니 대사를 칠 수 있으니까요. 대사에 나온 용어를 이해 못 하고 내뱉는다는 건 결국 가짜라는 거거든요.

연극 `코펜하겐`에서 배우 남명렬. /사진 제공=신귀만 작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하죠, 가짜 연기는 금방 표가 납니다. 잠깐은 속여도 연기 전체를 관통해보면 들통이 나요. 연극이든 영화든 TV 드라마든 배우는 최대한 진실에 가깝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기본입니다. 모쪼록 해내고 나니 굉장히 뿌듯했지요. 마지막으로 '알리바이 연대기'는 지금껏 내가 맡아온 배역 중 가장 나 자신과 밀착돼 있어서 애착이 가요. 작가이자 연출인 김재엽 씨 아버지의 실화를 다룬 거예요. 그 아버지는 이력이 특이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해방되면서 아버지(김재엽의 할아버지) 따라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나이가 열일곱이었죠. 근데 이분 입장에서 보면은 일본에서 잘 살다가 해방돼서 모국에 왔는데 먹을 것도 없고 못사는 황무지인 겁니다. 그런 것에 혼란을 느끼면서 굴곡의 현대사를 겪으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양반은 서가에 책이 굉장히 많았대요. 한글로 된 건 없고 외국 원서로만요. 실제로 읽지도 못하는 아랍국 교과서까지 해서요. 그분 입장에서는 이 땅에 살고는 있지만 어느 사회에도 귀속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김재엽 연출이 그런 아버지 이야기를 연극에 올린 건데, 그 배역이 나랑 좀 가깝지 않나 싶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그러세요. 연극인의 삶에 경제난은 불가피하다고.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다른 직업군과 비교하면 적은 건 분명하죠. 그런데 삶에서 얼마나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더 큰 문제 아닐까요. 돌아보면 대단히 어려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 없이 살았어요. 먹을 거 못 먹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더 좋은 건 못 먹긴 했겠지요. 돈이 좀 있으면 다른 성취도 가능하겠으나, 나는 거기에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실제로 피부에 와닿을 정도의 경제난이 나를 나락에 떨어뜨리고, 심정적으로 바닥을 보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것보다 서울에서 어엿한 배우로 자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훨씬 컸죠.

-결국엔 가치관의 문제군요.

▷그럼요, 절대빈곤의 시대가 아니잖아요. 이제는 상대빈곤의 시대입니다. 정말 먹을 게 없어서 우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면 문제죠. 그러나 솔직히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잘 먹느냐 조금 덜 먹느냐 문제죠. 그리고 말이죠. '연극인=가난'이라는 등식이 일반화된 것 같은데 저는 이게 개인적으로 불만입니다. 젊은 시절 연극판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는데, 다른 업종도 20대에 풍족하긴 힘들죠. 지금 당장 어려운 건 덜 쓰고 덜 먹으면 됩니다. 비싼 차 대신 경차 타면 되고. 여행 가는 횟수 줄이면 되거든요. 현재 삶에 대해 자족할 줄만 알면 절대적 빈곤까진 겪진 않아요. 나머지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이 일에 회의는 없으셨어요?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 적은 있지요. 그럴 땐 대부분 캐스팅 제안이 없고 하는 공연이 없을 때 얘기예요. 쉬는 기간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석 달을 넘어서면 두려워져요. 이건 모든 배우가 다 그럴 거예요. 배우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므로 늘 두려움이 수반되거든요.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그럴 겁니다. 책에서 읽은 건데요.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호평을 받은 배역을 연기한 유럽의 유명 배우가 있어요.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해요. "이렇게 호평받으니 너무나 행복하시겠습니다. 지금 무슨 생각이 드세요?" 배우가 답합니다. "두렵습니다. 지금 공연이 끝나가는데, 3개월 후에도 이런 무대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하고요." 이건 배우들의 숙명 같은 겁니다. 지금받는 찬사와 호평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거든요. 그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하고요.

세 시간이 넘어설 동안 인터뷰 열기는 채 가시질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자리가 몹시 즐겁다"고 했다. "내 삶을 이처럼 되돌아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슬슬 자리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우 남명렬의 첫 주연 출연작 `우리집`.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 제공=팩마픽쳐스

-몇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영화 배우 남명렬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어요. 1997년 '지상만가' '일팔일팔'로 충무로에 입성하셨어요. 둘 다 단역이었고요. 이듬해 임상수 감독님의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에도 단역으로 나오셨고, 같은 해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로 첫 조연을 맡으셨지요. 최근 3~4년 사이엔 영화계 활동이 한층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2014년 '제보자' 조연 출연에 이어 2016년에는 저예산 독립영화 '우리집'(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 스케이프 부문 초청작)에서 첫 주인공 역을 맡으셨고요. 지난해엔 '더킹' '침묵' '기억의 밤', 그리고 올해 '탐정:리턴즈'까지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오셨어요. 드라마 활동도 근래 더욱 왕성하시고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연극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명 배우임에도, 영화로는 조연 위주에 그친다는 격절감이랄까요. 최근 출연작에서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것에 괘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저는 받습니다.

영화 `제보자`(2014)에서 배우 남명렬은 유종진 교수 역으로 조연 출연했다. /사진제공=메가박스 플러스엠

▷(미소 지으며) 연극일을 하다보면 영화 관계자들이 공연을 보러 와서 기억을 해두었다가 작품이 있으면 종종 제안을 줘요. 그렇게 선택을 받는 거죠. 초창기 좀 힘이 있었던 작품으로는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있었죠. 저는 그해 시사회를 보고 나오면서 '아, 이 작품에서 남는 건 설경구뿐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그는 무명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승승장구하더군요. 저는 말입니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둘 다 선생이 없었어요. 전부 경험을 통해서 배워왔어요. 장르를 영화로 옮기면서 초창기 그 낯섬 또한 몸으로 배웠죠. 그래서 초창기 영화는 제가 봐도 영 어설퍼요. 카메라가 낯설었을 때니까요. 지금의 저는 장르를 가리지 않아요. 장르와 비중을 떠나 쓰임새가 있으면 언제든지 한다는 것, 저는 그게 배우로서 의무이고 도리라고 여겨요. 연극만 하다가 영화도 조금씩 얼굴을 내밀고 드라마 활동도 늦게 시작하면서 제가 이 분야 사람들에게도 인식이 되기 시작했지요. '더 킹'도 그렇고 '제보자'도 그렇고 남명렬에게 요청하는 배역이 있는 것 같아요. 무게감은 있어야 하겠는데 그 안에서 신이 그리 많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주는 인물이 필요한데, 그런 인물은 영상매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한 배우들은 저어할 거 아닙니까. 그럴 때 영상매체에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무게감을 갖고 있는 배우로서 제가 눈에 확 띄는 것일 테죠. 그런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쓰임새가 아니야라고 주장해보았자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거거든요. 각자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쓰임새가 있을 테니까요. 한편으로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근본적 의미에서 배우라는 존재에 대해 제 자신 안에 있는 자존감이랄까요. 저는 대중적 유명세를 떠나 스스로 배우로서 자긍심,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쓰임새의 많고 적음에 괘념치 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기반이 허약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딜 가서 어떤 행보를 보여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안이 튼튼해야 하는 거예요. 오랜 기간 연극판에 발붙이면서 다져진 기반이 제겐 단단한 무언가로 내면에 자리해 있다고 봐요. 어디를 가도 다시 돌아올 곳이 얼마든지 있는데, 다른 데로 진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거지요.

-이런 점도 궁금했습니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드라마이든 캐릭터에 들어감에 있어 어떤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준칙 같은 게 있을까 하고요.

▷저는 모든 힌트는 대본에 있다는 주의예요. 대본에 있는 힌트에 바탕해 캐릭터를 구축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가치 판단으로 캐릭터를 읽어내다간 자칫하면 엄청난 오류를 범할 수가 있어요. 이해가 안 가는 인물이 주어질 때가 있죠. 그런데 왜 이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가는 대본에 다 이유가 있어요. 대본을 꾸준히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와요.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 배역 속 인물을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이해를 해주겠어요. 그 배역 속 인물은 한마디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연기해줄 배우가 자기를 이해해주는 순간을요. 그 인물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기고 봐야 하는데 개인적인 가치 판단을 갖고 하면 심정적으로 밀착이 안 돼요. '탐정:리턴즈'에서도 제가 연기한 원장은 사회적으로 나쁜 인간이죠. 근데 저는 그걸 하면서 이 인물이 생각하는 자기의 신념, 그게 옳다고 여기고 연기를 했어요.

마지막 물음은 이것이었다.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줄 마지막 조언 같은 게 있으신가요?" 그는 약간은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제가 들려줄 말이 더 있을는지." 그러더니 가만히 고민에 젖어드는 것이다. 은빛 수염으로 덮인 턱 아래에 지그시 손을 얹은 채로.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침묵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고뇌하는 예술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요.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될수록 간단히 생각하라고요. 그게 다입니다." 아마도 그는 25년 전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 셋. 난생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던 바로 그 순간을.

[김시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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