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가 제일 쉬웠어요"..외교관 아빠의 좌충우돌 스위스 육아

김세영 베이비조선 기자(young0221@chosun.com) 2018. 6. 2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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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애글이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성(城)을 바라보며 즐기는 아이들.


-커리어 쌓기보다 중요한 가정 지키기
-스위스 육아의 핵심 ‘아이는 아이답게’
-맘껏 뛰놀지만 공공예절 철저히 배워
-전업 주부 2년 경험담은 육아서 펴내

임상우(46) 마다가스카르 주재 대사는 외교부에서 ‘육아휴직의 전설’로 통한다. 후배 외교관인 아내(39)가 지난 2015년 2월 스위스 제네바로 발령받자 육아휴직을 ‘턱’ 내고 따라가 2년간 전업 주부로 지낸 것이다. 그가 육아휴직을 시작할 때 각각 4세, 7세였던 아이들은 아빠 사랑을 듬뿍 먹고 자라 현재 7세, 10세가 됐다. 임 대사는 전업 주부로 산 경험을 담은 책 ‘스위스 아이처럼 스위스 아빠처럼’(미래의 창)을 최근 펴냈다. 지난 26일 오전 11시(현지 시각), 전화기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책 인세는 마다가스카르 어린이 복지 사업에 전액 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에선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압니다.
“아내가 스위스 발령을 받아 제가 육아휴직을 하지 않으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이미 지난 2008년 첫째가 태어났을 무렵 콩고민주공화국에 발령받아 2년간 홀로 산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지요. 그래서 이번엔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전에 한국에서 같이 살 때도 주말 없이 바쁘게 일하다가 문득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가’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커리어보다 가정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막상 휴직계를 내려니 좀 망설였다고 들었습니다.
“제30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해 20년을 외교관으로 살았습니다. 그 정도 연차면 외교부에서는 해외 주요 대사관의 관리자급으로 한창 능력을 발휘할 시기입니다. 이때 성과가 나중에 고위급 간부로 올라가는 데 발판이 됩니다. 커리어상 중요한 시기죠. 동기 중에도 육아휴직을 한 직원은 없어요. 고민이 좀 됐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들 한 명당 2년씩 총 4년을 육아휴직 하며 가정을 지킨 덕분에 그간 제가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을 떠올렸어요. 그동안 일방적으로 아내가 희생했으니, 이젠 제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의외라고 본 사람이 꽤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격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육아휴직을 시작하고서 아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 육아휴직에 대한 포스팅을 올렸는데, 그걸 본 주변 동료 선후배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한 선배님께서 ‘아빠 육아휴직의 표본인 스웨덴 황태자에 버금가는 쾌거! 용단 내린 임 과장님 용기에 박수를’이라고 쓰신 댓글이 기억에 남네요.” (댓글의 ‘스웨덴 황태자’는 아내와 번갈아가며 6개월씩 육아휴직을 쓰면서 대외 공식 업무를 내려놓은 다니엘 베스트링을 가리킨다.)

-전업 주부 생활을 스위스에서 시작한 거군요.
“스위스에 도착해 주말을 가족과 보낸 다음, 월요일 오전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본격적인 주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할 만했나요.
“한국에서 회사생활만 했던 중년 남자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하루아침에 4살, 7살 애들을 제대로 키우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요리였어요. 제네바 물가가 무시무시하게 높아요. 김치찌개 한 그릇에 3만원씩 해요. 그래서 하루 세 끼를 집에서 해먹어야 했습니다. 요리를 독학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며 손에 익지 않은 칼로 고기 썰고 야채 썰다가 엄지와 검지를 많이 베었지요. 한 번은 벤 상처가 깊어 피가 막 나는데 애들이 배고프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대충 손가락을 붕대로 싸매고 밥을 했지요.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부엌과 거실 바닥이 유혈 낭자한 ‘사건 현장’처럼 돼버렸어요. 퇴근해 집에 돌아온 아내가 기겁했지요.”

-애들이 어려 더 힘들었겠어요.
“애들을 두고 어디 혼자 갈 수 없었어요. 항상 운명공동체가 돼 다 같이 장을 봤지요. 혼자 사내 애 둘을 끼고 다니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집에서는 청소에, 빨래에, 애들 뒤치다꺼리에…. 단 1분도 제시간이 없었어요. 사무실에서 여유 있게 마셨던 모닝 커피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초등학생인 첫째는 집에 와 점심을 먹고, 어린이집 원생인 둘째는 도시락을 싸갔어요. 점심때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지요. 나중엔 아내도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더군요. 매일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식사와 도시락을 챙기고, 밤에는 애들 다 재우고 나서 다음 날 찬거리 준비를 하느라 가장 늦게 잤어요. 애들 현지 적응 문제도 있었지요. 초창기에 내성적인 첫째가 새 학교에 적응을 못 했습니다. 한국에서 멀쩡하게 잘 지내던 아이를 외국에 데려와 외톨이를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지요. 아이가 적응을 잘 못하니 제가 주부로서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어요.”

-언제쯤 적응되던가요.
“몇 달 지나니 부엌일과 살림 솜씨는 좀 나아졌고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견딜 만했습니다. 큰애도 불어를 습득하면서 조금씩 적응했습니다. 그러나 내 노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 상대적 박탈감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온종일 살림과 육아에 시달리면서도 이 모든 것을 가정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한다고 생각하면서 꾹 참아냈지만, 아내가 ‘주부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는 종일 대화다운 대화라고는 한마디도 못하고 아내 퇴근만 기다리면서 버텼는데, 아내는 집에 회사일을 싸 와서 일을 하는 겁니다. 무슨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늦게까지 야근도 하고요. 이런 아내 모습에 상처와 분노가 쌓였지요. 제가 외교관 선배라 아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뻔히 아는데,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바쁜 척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육아휴직 전 자신의 모습 아닌가요.
“맞습니다. 회사에는 충성을 다하면서 가정에는 소홀한 아내 모습, 그게 바로 육아휴직 하기 전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나마 아내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어요. 야근하지 않으려고 일을 싸 들고 집에 온 거였고,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날만 야근을 했던 거지요. 오히려 육아휴직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퇴근시간에 집에 들어온 적은 거의 하루도 없었습니다. 주말까지도 자정까지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들어간 날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가정은 거의 포기하고 살았지요. 어두운 과거(?)를 정말 깊이 반성했습니다.”

스위스 곳곳에 이처럼 자연과 어우러진 놀이터가 있다.

-스위스 육아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한다면요.
“가장 큰 차이는 스위스 사람들은 아이를 아이답게 키운다는 점입니다. 스위스에선 아이들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밖에서 맘껏 뛰어놀며 큽니다. 계절 따라 학교에서 수영·스키 등 다양한 운동을 하고, 특히 봄·가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동네 숲으로 소풍을 갑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인격체로 대우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선생님과 악수하는 법부터 배우는데, 선생님은 학생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합니다.”

-책에 ‘격한 놀이를 해도 선생님은 지켜보기만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 학교에 갔을 때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단체 싸움을 하는 것 같았어요. 익숙해지면서 살펴보니 일종의 ‘싸움 놀이’더군요. 좀 심각해 보일 때도 어른이 개입하지 않았어요. 딱 한 번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달려드니 선생님이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맞서야지’ 하고 꾸짖었죠. 아이들 일은 아이들이 판단하고 해결하도록 하는 게 이곳 원칙입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인내하고 관찰하는 겁니다. 치열하게 놀다 보니 옷이나 신발도 빨리 닳습니다. 한국에선 신발이 닳기도 전에 애들이 쑥쑥 자라니 한 치수 큰 신발을 사줬어요. 여기선 하도 신발이 잘 해져서 꼭 맞는 신발을 사줬습니다.”

-한국과 스위스 육아 문화가 다른 이유가 뭘까요.
“사회적 성공에 대한 압박 정도에 따라 육아 문화도 달라집니다. 한국 부모 중 자식이 아이답게 밖에서 뛰어놀며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부모는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거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부터 사교육을 받으며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자질을 연마하는 거라고 봅니다. 지금의 아동학대(?) 수준의 엽기적인 교육이 자리 잡은 배경에는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스위스에선 아이가 밖에서 맘껏 뛰어놀아도 나중에 밥벌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밖에서 뛰어놀면서 커야 문화·풍습·제도·관행·시스템이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된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 수영하고 겨울에 스키를 타지 않으면 스위스인으로서 정체성 자체가 부정될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아이들을 재교육(?)한 점이 있다면요.
“스위스 아이들이 놀며 자란다고 해서 자유방임형으로 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사회공동체 규율을 지키도록 배웁니다. 놀이터에서는 맘껏 뛰어다니지만, 공공장소에서는 어른과 똑같이 공공예절을 지킵니다. 식당에 가면 어른과 똑같이 음식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기다립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 마트에서 뛰어다니는 애들은 우리 애들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식당에 갔는데 주문한 지 한참 지나도 음식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지루했던 우리 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 식당 안팎을 왔다갔다했지요. 이날 옆 테이블 손님인 할머니에게 아주 혼났습니다.”

-스위스 학제를 간단히 소개한다면요.
“스위스 아이들은 만 4세가 되면 학교에 갑니다. 유치원 과정을 공교육에 편입했습니다. 8학년까지 초등학교를 다닌 뒤, 졸업 무렵에 기술 과정 또는 진학 과정으로 진로가 나뉩니다. 초·중학교를 거친 학생 중 20~25%만 대학 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기술학교에 진학해 취직합니다.

-한국 고교생의 대학 진학률이 60%대(2017년 기준)인 데 비해 매우 낮네요.
“스위스에서 대학은 공부에 소질 있는 사람들만 가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제가 스위스에서 알고 지낸 한 대학교수는 3형제인데, 자기만 대학교를 나왔다고 합니다. 이 집에서는 자기가 계속 공부해 교수가 된 것을 도저히 이해 못 했다고 합니다. 왜 다른 형제처럼 자립하지 않고 공부만 하느냐고 구박받았다네요. 결국 3형제 중 자신이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 못 했다고 하고요.”

첫째 영민이의 생일파티 모습. 스위스에서 어린이 생일 파티는 무척 중요한 행사라 부모들이 신경을 많이 쓴다. 볼링장에서 볼링을 치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한다.

-스위스에서 브라질을 거쳐 현재 마다가스카르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엔 부인이 육아휴직 중이고요. 사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겠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세계 최빈국입니다. 인구의 70%는 하루에 1달러도 채 벌지 못합니다. 상당수 아이에게 하루하루는 ‘생존을 위한 투쟁’입니다. 대단한 점은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가장 낙후한 남부 지역으로 출장 간 적이 있습니다. 방문한 곳은 한국 정부가 유니세프와 함께 모자 보건 사업을 지원하는 오지 마을이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인데, 동네 주민이 다 모여 춤을 추며 저를 환영했습니다. 자녀 8명 중 3명을 잃었다는 한 여성은 한국 정부 지원을 받기 전에는 하루 세 끼를 마뇩(열대지방 구황작물의 한 종류)만 먹다가 이젠 다른 것도 먹을 수 있게 됐다면서 연방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절망에 빠질 법도 한데 강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더군요. 그를 포함한 마을 주민이 모두 환한 웃음을 짓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자주 국가를 옮겨 다닙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외국에 나와 지금까지 4년간 학교를 3번 옮겼습니다. 스위스에서 불어를 배웠고요. 브라질에서 국제학교에 다녔는데 대부분 학생이 브라질 아이들이라 포르투갈어도 같이 배웠습니다. 지금 마다가스카르에서는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다시 불어를 하고, 현지 토착어인 말라가시어도 배웁니다. 당장 아이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고 힘들지요. 첫째는 불어를 못하는 데다 다소 내성적이라 학교에 적응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고요.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다른 곳에 안 가고 계속 그곳에 살면 안 되겠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릴 때 다양한 문화에 노출되면 나중에 더 포용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거라 기대합니다.”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이곳 학교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서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한국에 돌아가 고생하지 않으려면 외국에서도 이것저것 ‘빡세게’ 시켜야 한다고요. 그런 말을 들으면 흔들리기도 합니다. 한국에 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 애들은 마다가스카르의 푸른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이젠 주부를 보는 시선이 좀 달라졌나요.
“외교관으로 20여년간 일하면서 북한 핵 문제, 한미 FTA 협상 같은 굵직한 이슈를 다뤘고, 이라크에서 자동소총(AK-47)으로 무장한 개인 경호팀을 대동하고 테러 위험 속에서 외교 활동을 했습니다. 내전 중인 콩고민주공화국에 발령받아 우리 대사관을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네바에서 보낸 주부 생활은 이 같은 외교관 업무보다 훨씬 더 치열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매 순간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세상 모든 주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됐습니다. 저처럼 ‘전향’한 남성이 더 늘어야 합니다.”

-아직은 대부분 주부가 여성이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육아와 살림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 됩니다. 전업 주부는 직업 축에도 끼지 못한 채 무료 봉사자 취급을 받습니다. 맞벌이인 경우에도 대부분 여성이 독박 육아와 살림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의 여성 권리 지수는 아직도 세계에서 하위권에 맴돕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7년 성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평등 지수는 144개국 중 118위입니다. 참고로 아프리카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는 80위입니다. 갈 길이 한참 멀지요. 사회 인식·관행·풍습을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분명히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음 세대를 어떻게 교육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살림과 육아는 부부의 공동 책임이라는 점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도 그런 방향으로 바꿔야 합니다.”

-사회적 성공과 육아휴직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공존할 수 있고, 공존해야 합니다. 아직도 육아휴직자를 ‘개인 편의(?)를 위해 조직에 민폐 끼치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육아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국가 미래가 걸린 문제니까요.”

-우리 사회의 젊은 아빠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제가 육아휴직을 쓰고 나서 외교부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이 조금 늘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고, 앞으로도 더 늘기를 기대합니다. 인생을 길게 보면 지금 1~2년 육아휴직 하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퇴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직장은 한국에 많지 않습니다. 제 육아휴직 기록이 어느 직장에서나 눈치 안 보고 남녀가 육아휴직 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알프스를 즐기게 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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