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실비아 비치 (1887~1962)

허연 2018. 6. 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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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지드, 엘리엇, 발레리를 가능하게 한 20세기초 파리 문단 이끈 서적상이자 출판업자
10년 전쯤 '파리는 여자였다'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역사학자이자 다큐감독인 안드레아 와이스가 쓴 책이었는데 제목이 워낙 단도직입적이어서 기억에 난다. 프랑스 파리는 남자들만의 힘으로 문화 수도가 된 것이 아니었다. 차별과 제약 그리고 전쟁이라는 악조건까지 이겨내며 파리 문화를 일군 여장부들이 있었다. 책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였다. 모더니즘 건축가였던 아일린 그레이, 이미지즘 운동의 선구자인 작가 힐다 둘리틀, 화가인 마리 로랑생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나는 이 여인들 중에 실비아 비치라는 이름에 눈길이 많이 갔다. 비치는 서점 주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파리를 무대로 활동하던 수많은 무명 작가들에게 '공양주 보살' 같은 인물이었다. 때로는 후원자로서, 때로는 매니저이자 마케터로서 그는 세계적인 작가들을 찾아내고 키워냈다.

미국에서 태어난 비치는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건너와 살다가 1919년 파리 레프트뱅크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영문학서점을 차린다. 영화 '비포 선셋'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바로 그 서점이다.

이 서점에 드나들었던 유명 작가 이름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헤밍웨이, T 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등 작가들과 에릭 사티, 조지 앤타일 같은 음악가들이 서점 식객이었다.

비치는 하늘이 내린 눈썰미와 배포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는 생전 단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제목이 '셰익스피어&컴퍼니'다. 그 회고록에 실린 작가들에 대한 단평은 촌철살인의 '끝판왕'이다. 비치는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헤밍웨이는 매우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대학이 아니라 몸으로 배웠다. 그는 더 멀리 더 빨리 뻗어나갈 수 있는 사람인 듯했다. 야간 유치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총명하고 독립적이었다."

이 평가는 헤밍웨이 인생 전체를 가장 기막히게 요약한다. 헤밍웨이는 어찌 보면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고매한 문학 정신의 소유자였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경솔한 재주꾼이었다. 또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을 실험실에 내던진 풍운아였고,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세속적인 욕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알량함과 위대함, 나약함과 강건함을 모두 갖춘 남자였다.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써내는가 하면 조롱거리가 될 만한 태작을 양산하기도 했던 그의 생은 장르를 넘나드는 동시상영관 같은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비치는 책방에 나타난 젊은 헤밍웨이를 보고 단박에 이것을 모두 알아차린 것이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묘사를 보자.

"파운드는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리더인 이 유명한 인물은 결코 자만하는 법이 없었다. 딱 한 번 자기 솜씨를 뽐낸 적이 있었는데 문학이 아니라 목수 일에 대해서였다."

이 단 몇 문장으로 비치는 파운드의 결벽증과 기인적 풍모를 설명해낸다.

감옥에 갈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음란물로 규정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 를 무삭제판으로 처음 출간한 것도 비치의 배짱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는 이 책을 미국에 밀수출까지 했다. 이로 인해 조이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할 수 있었다.

1941년 나치의 탄압으로 서점 문을 닫았을 때도 비치는 파리를 떠나지 않고 작가들을 돌봤다.

그렇다. 센강의 물결은 지금도 실비아 비치를 기억한다. 파리는 여자였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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