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스턴 1등? 어리둥절한 日 30대 '공무원 러너'
체감 영하1도, 비바람 악천후 속 아프리카 강자들 모두 제쳐
주40시간 학교 근무 '투잡 러너'
초청료·후원 없이 자비 출전 "빨리 돌아가 일 끝내야하는데.."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남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를 부축한 자원봉사자가 "당신이 1등이에요"라고 말하자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러곤 두 손을 번쩍 들어 포효했다. 비 내리는 보스턴 한복판, 땀과 눈물로 범벅 된 '공무원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31·일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가와우치는 17일(한국 시각) 열린 제122회 미국 보스턴마라톤 남자부에서 2시간15분58초로 골인하며 우승했다. 일본인이 이 대회에서 우승한 건 1987년 세코 도시히코 이후 31년 만이다. 아시아 국가로 범위를 넓혀도 2001년 이봉주 이후 처음이다.
보스턴마라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마라톤 대회다. 최근 20년 사이엔 다른 대회가 그러하듯 케냐·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선수들이 우승을 휩쓸었다.
이날 보스턴은 체감온도가 섭씨 영하 1도까지 떨어졌고, 초속 13m 이상의 강풍이 몰아쳐 더위에 익숙한 아프리카 선수에겐 최악이었다. 하지만 가와우치는 "내겐 최고의 조건들이었다"며 웃었다. 일본 주요 언론은 가와우치의 우승을 대서특필했다.
그의 우승이 의미 있는 건 최악의 날씨 때문이 아니다. 가와우치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한 고등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공무원이다. 다른 엘리트 마라토너와 달리 주 40시간 사무실을 지키는 '투잡 러너'인 셈이다. 실제 그의 훈련 시간은 경쟁자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 평일엔 하루 1시간 30분 정도 조깅(약 20㎞ 거리)하는 게 전부이고, 주말에 크로스컨트리나 마라톤 대회 참가를 통해 체력을 단련했다. 육상 전문지 '러너스월드닷컴'은 가와우치를 두고 "평소엔 책상 앞에 있다가 어느 순간 철인(鐵人)으로 변신하는 영화 '수퍼맨'의 클라크 켄트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처음부터 '공무원 러너'를 꿈꾼 건 아니다. 가와우치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육상에 입문해 고교 시절까지 학교 육상부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부상, 부진을 거듭해 대학 팀에 지명받지 못했다. 그는 학업 성적으로 가쿠슈인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하면서도 홀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이타마현 공무원으로 정상 근무하면서 각종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그의 소속은 실업 육상 팀이 없는 '사이타마 현청'이었다. 공무원 신분 때문에 초청료나 금전적 후원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가 점차 기록을 줄여나가자 열정에 감복한 사이타마 현청이 나중엔 '가와우치 육상회'를 만들어 지원에 나섰다. 가와우치는 2011년 도쿄마라톤에서 3위에 올랐고,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도 일본 대표로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보스턴마라톤엔 지금까지 국제 대회 성적을 인정받아 엘리트 그룹에서 뛰었다. 가와우치는 경기 전날 꼭 카레를 먹는다고 한다. 고교 시절 라이벌 선수의 습관을 자신의 징크스로 만들었다.
가와우치는 우승 인터뷰에서 "26년간 달려왔는데, 지나온 날 중 오늘이 최고의 하루"라고 말했다. 행복한 얼굴로 질문에 응하던 그는 살짝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올해 100주년을 맞습니다. 요즘 기념 잡지를 만드느라 꽤 바빴는데… 어서 돌아가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잠시 수퍼맨이었던 남자는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빠의 ‘우라하라’ 패션이 딸의 스트리트 룩으로, 뉴진스 X 후지와라 히로시 컬렉션
- “가족 명의로 7억 달러” 美의회 ‘시진핑 은닉 재산’ 보고서엔...
- “미소년들 줄줄이 뒤따라”…복귀 시사한 이수만, 중국 목격담 확산
- 백남순 北 외무상 취재열기로 아수라장된 방콕 공항
- 아무도 안시킨 피자 20인분 보내 “잘 받았냐”…사무실 배달된 음식 정체
- ‘암진단’ 찰스3세 생일행사…암투병중 참석한 왕세자빈, 환한 모습 포착
- “뇌사 좀비” vs “사기꾼”…트럼프 생일날 바이든과 주고받은 독설
- 전공의 대표에 공개 저격 당한 의협회장 “손 뗄까?”
- 전 직장동료 집·직장 찾아 스토킹...30대 남성 체포
- 온몸이 오돌토돌, 타는 듯한 눈 통증까지…발리 여행객 공포 떨게 한 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