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민주화 운동 촉발한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

2018. 4. 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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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30년 전인 1988년 4월 9일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 피의자 문귀동 구속

[한겨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경향신문> 1988년 4월 9일 치(왼쪽),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피고인 문귀동이 법정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종교까지 판 문귀동이 구치소로 들어가기 전 담담한 표정으로 취재진 앞에 섰다. 오늘로부터 30년 전인 1988년 4월 9일,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이 구속됐다. 사건 발생 2년이 지난 뒤에야 이뤄진 구속수사였다. 그에게는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가 적용됐다.

경기 부천경찰서 소속 경장이었던 문귀동은 1986년 6월 6일 조사 과정에서 여대생 권인숙에게 성 고문을 가한다. 당시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에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있었다. 연이어 전국 대회가 열리며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시위 물결이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으로 인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사건을 은폐·조작하기 위해 사법부와 언론까지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 독재 정권의 부도덕한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대생에게 자행된 경찰의 성 고문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 재학 중이던 권인숙. <한겨레>자료 사진.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 재학중이던 권인숙 씨는 대학 입학 뒤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노동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권 씨는 1985년 4월 경기 부천시의 한 공장에 학력을 낮추고 가명을 써서 위장 취업한다. 하지만 위장 취업 1년 정도 만인 1986년 6월 4일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경향신문> 1986년 7월 17일 치.

그는 모든 혐의를 시인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소재를 추궁하며 권 씨를 고문했다. 당시 부천경찰서 상황실장이던 문귀동 경장은 6월 6일과 7일 2차례에 걸쳐 권인숙에게 성 고문을 가했다. 문 경장은 권 씨가 저항할 수 없게 손을 뒤로 모은 채 수갑으로 결박하는 잔인함도 보였다.

권인숙 씨는 수치심에 자살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이 같은 일로 희생당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권 씨는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권 씨는 되레 공문서 변조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만다. 가해자인 문귀동은 권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하기도 했다.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 권인숙(오른쪽)씨가 조영래(왼쪽) 변호사와 함께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에 권 씨는 조영래, 박원순 등 인권 변호사 9명의 도움을 받아 7월 5일 문귀동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자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한다. 문귀동도 권인숙을 무고 혐의로 맞고소한다. 이런 과정에서 권인숙 씨의 변호인단을 통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권력에 굴복한 언론과 사법부

-언론 조작

1986년 9월 김주언 기자는 <말> 특집호를 통해 ‘보도지침의 실상’을 폭로했다. 사진은 검찰의 ‘권인숙양 고발 사건’ 수사발표 기사에서, ‘문귀동 형사의 성고문 사건’을 ‘부천서 사건’으로, ‘성적 모욕 없고 폭언·폭행만 했다’는 보도지침 그대로 전한 <조선일보> 1986년 7월 17일 치.

당시 언론은 권인숙 씨의 고발장이 접수된 지 10여 일 만인 7월 16일 발표된 검찰의 수사 결과를 상세히 보도한다. 당시 보도를 보면, 김수창 인천지검 특수부장은 “권인숙에서 재킷을 벗게 한 후 T셔츠를 입은 가슴 부위를 손으로 3~4회 쥐어박아 폭행한 사실은 사실이나 성적 모욕행위는 없었다”고 밝혔다. 또 “이는 문 경장의 자백과 증거에 의하여 사실로 인정되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는 “폭행 사건을 성 모욕으로 날조 왜곡, 혁명투쟁을 확산시키고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6년 8월 21일 치.

검찰은 문귀동이 10년 이상 경찰에서 성실하게 근무해왔고,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기소유예 처분한다. 하지만 검찰은 권인숙 씨의 피해 사실에 대해 “급진 좌경 사상에 의한 소위 의식화 투쟁의 일환”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면서 “권인숙은 성적 불량으로 대학 4년 제적 후 가출해 반정부·반체제 활동을 전개한 전력에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거짓 발표했다. 검찰의 발표에 당시 언론은 “권양의 ‘성적 모욕’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라고 보도했다.

검찰은 거짓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언론은 이를 앵무새처럼 읊어댄 웃지 못할 촌극이 일어난 셈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별도의 언론 보도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 (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 ’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 모욕 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KNCC), 여성 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

-시사 월간지 <월간 말 >의 1986년 9월 6일 치를 통해 알려진 당시 보도지침

-재판

민가협, 시민, 학생들이 공판이 끝난 뒤 문귀동을 잡으러가자 교도관이 제지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권인숙 씨에 대한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검찰은 권 씨의 고발에 대한 조사를 통해 사실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묻어버렸다. 야당과 여성단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가 열렸지만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1986년 8월 2일 대한변호사협회까지 가세해 재정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동아일보> 1987년 3월 2일 치.

그러는 동안 권 씨에 대한 불공정 재판은 계속됐다. 권 씨는 항소했지만 법원은 피해자의 법정 진술조차 중도에 막아버렸다. 이를 지켜본 권인숙 씨의 어머니가 항의하자, 재판부는 어머니마저 법정 모욕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결국 법원은 항소심 재판을 이유 없이 미루다가 해를 넘긴 1987년 3월 28일 권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다.

민주화의 밑거름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항쟁. <한겨레> 자료 사진.

사건을 둘러싼 전두환 정권의 은폐와 조작은 결국 1988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독재 통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88년 1월 12일 치(왼쪽), <한겨레> 1988년 7월 22일 치.

권인숙 씨의 변호인단은 1988년 1월 다시 한 번 재정신청을 낸다.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에 대법원은 4월 9일 문귀동을 구속해 수사를 받게 한다. 이 과정에서 문 경장은 2년 전 “가슴 몇 번 쥐어박았다”던 자신의 진술을 두고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또 조직적인 알리바이 조작이 있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문귀동은 끝까지 자신의 혐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당시 검찰 수사기록 등에 대한 증거로 1988년 7월 24일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1988년 6월 1일 치.

반면 권인숙 씨에 대해서는 피해자 진술권이 처음으로 허가되기도 했다. 권 씨는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1987년 7월 8일 가석방됐다. 이후 권인숙 씨는 양성평등과 인권 등을 다룬 저서를 출간하며 한국 사회의 성폭력 문제에 대한 연구자로 활동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은 독재정권 시기에 일어났던 국민을 향한 국가 폭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촉발한 사건 중 하나가 됐다. 더불어 민주화 진영에서도 거의 소외되다시피 했던 여성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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