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죽음을 마주하고 기업에 맞서 싸웠던 '라듐걸스'

2018. 3. 2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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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라듐걸스'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원자번호 88인 라듐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1898년 12월에 발견한 이후 신비의 물질로 주목받으며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라듐이 쓰인 곳 중 하나는 시계 다이얼 가공 공장이었다. 빛을 내는 물질의 특성을 이용해 야광 시계 숫자판을 만드는 데 라듐이 사용됐다.

공장의 여성 도장공들은 라듐이 들어있는 흰색 야광염료를 이용해 도색작업을 했다. 도장공들은 염료를 칠할 붓을 뾰족하게 만들기 위해 붓을 입에 넣는 '립포인팅' 기술을 이용해야 했다. 회사는 라듐이 묻은 붓을 입에 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고 도장공들은 회사의 말을 믿고 계속 입에 붓을 넣었다.

그러던 중 도장공들의 몸에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턱이 괴사했고 빈혈, 등이나 엉덩이 통증, 대퇴골 골절, 치아 손실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났다. 원인은 곧 드러났다. 라듐 중독이었다.

피해자들은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회사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정부도 기업 편을 들었고 일부 의사들, 변호사들도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피해자들은 겨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변호사를 찾아 기나긴 소송을 시작했다.

신간 '라듐걸스'(사일런스북 펴냄)는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라듐 중독 도장공들의 눈물겨운 투쟁기다.

영국 작가이자 연극감독인 케이트 모어는 2015년 도장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연출한 뒤 본격적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조사해 책을 썼다.

도장공들은 대부분 이민자의 딸이거나 손녀인 10대들이었다. 전쟁 시기 군사장비 계기판이나 군인들의 야광손목시계 수요가 폭발하면서 라듐을 이용한 도색 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도장공들은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지만 미래는 그들이 만졌던 야광도색물질처럼 빛나지 않았다.

책은 100년전 라듐에 중독된 '라듐걸스'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기업에 맞서 벌였던 힘겨운 투쟁의 과정들을 세밀히 따라간다.

1925년 2월 7만5천달러(현재 가치로 100만달러)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던 최초의 도장공 마거리트 카러프를 시작으로 라듐걸스들의 소송이 잇따랐다.

도장공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라듐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난 도장공의 시신을 파내기도 했다. 의사가 매독으로 죽었다고 말했던 도장공의 뼈를 엑스레이 필름과 함께 두자 필름 위에 뼈의 이미지가 현상됐다. 죽은 뒤에도 라듐은 뼈에 남았던 것이다. 그래도 기업들은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미국 일리노이 오타와에 있는 라듐다이얼스튜디오는 1928년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을 상대로 방사능 검사를 했다. 당시 67명 중 34명이 라듐 중독이거나 중독이 의심됐지만, 기업은 "(라듐중독과) 비슷한 증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기나긴 소송은 1939년 10월에야 소녀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와중에 일부 피해자들은 승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라듐걸스의 승리는 수천명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도장공 2세대'를 보호할 안전지침이 도입됐다. 전쟁으로 야광 문자판 수요가 급증했던 유럽에서도 안전지침이 적용됐다. 방사능 성분을 함유한 플루토늄이 사용되는 원자폭탄을 만들 때도 종사자들에게 엄격한 안전지침이 도입됐다.

라듐의 폐해는 오랫동안 남았다. 일리노이의 도색 공장은 1943년 파산했다. 이후 한 육류 저장회사가 이 건물 지하에 들어섰다. 직원들은 암으로 죽어서 고기를 구입한 가정의 집안 남자들도 줄줄이 대장암에 걸렸다. 건물은 결국 1968년 철거됐지만 철거된 자재들이 다시 매립되면서 마을의 전체 암 발병률이 평균치를 웃돌았다. 오염물질 제거작업은 2015년까지 계속됐다.

라듐 공장이 있던 일리노이 오타와에는 2011년 9월2일 도장공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 손에는 붓을, 한 손에는 튤립을 든 채 시계 숫자판 위에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동상 제막식에서 일리노이 주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라듐걸스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추앙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마주한 상황에서 부정직한 회사와 냉담한 산업계, 그들을 멸시하는 법원과 의학계에 맞서 싸웠습니다. 라듐걸스가 투쟁과정에서 보여준 굉장한 인내심과 헌신, 정의감을 기리기 위해 2011년 9월2일을 라듐 걸스의 날로 선포합니다."

이지민 옮김. 616쪽. 1만9천800원.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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