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스티븐 호킹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2018. 3. 2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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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저 머나먼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난 호킹

〈시간의 역사〉가 거둔 성공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티븐 호킹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개가 텔레비전에 출연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예능이나 교양이 아니라 정식 뉴스 프로에, 그것도 인터뷰를 하러 출연한다?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가능하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201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영국의 BBC 방송은 정규 뉴스 시간에 개 두 마리를 인터뷰했다. ‘개가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취지의 뉴스였다. 개의 이름은 다니엘과 바운스. 화면에는 개이름과 견종이 자막으로 붙었다. 마치 사람 이름에 직함이나 직업을 붙이는 것처럼.

영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일종의 영국식 유머!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서 왜 유머가 없겠는가. 그러나 ‘영국식 유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유머는 국회의사당의 격렬한 논쟁에서나 교실 수업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공기처럼 퍼져 있다.

“내 최고의 업적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영국식 유머의 특징은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다. 예상 밖의 단어나 결과로 빚어내는 씁쓸한 모순이나 부조화 혹은 주장하는 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반어가 아이러니다. 이는 페이소스를 낳는다. 그리스어 파토스에서 파생된 이 페이소스는 ‘고민, 감정, 비애감, 정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국식 유머는 절묘하고 고급스러운 말장난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하여 삶의 이면이 슬쩍 보이거나 마음의 밑바닥에 침전된 어떤 감정을 쓰다듬기도 한다.

물론 모든 영국인들이 늘 이런 수준의 유머나 농담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와 같은 전제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그냥 말해도 될 것을 꼭 조금씩 비틀면서 말하거나, 안 해도 될 말을 꼭 슬쩍 곁들여서 그 자리를, 그 관계를, 그 관습을 약간은 흔드는 문화를 즐겨왔다는 뜻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런던 무역관을 지낸 이수정씨는 2005년 4월, 국내 경제전문지에 기고한 글에서 2004년 11월 초 영국 왕립예술협회가 미국, 이탈리아, 인도 등 주요 외국인들과 런던 주재 외국 특파원에게 ‘영국인다움’(Britishness)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더니 대부분 영국인 특유의 ‘유머감각’을 꼽았다고 쓴 적이 있다.

그 글에 인용된 추리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예화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고고학자가 남편감으로는 괜찮냐고 크리스티에게 물었다고 한다. 크리스티는 “최고”라고 답하면서 그 이유로 “나이가 들수록 아내에 대한 남편의 관심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듣고 나서 한 1초쯤 지나서 피식 하고 웃게 만드는 이런 유머는 영국 영화들에서 거의 매장면 볼 수 있다.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어 보이〉 같은 영화사 ‘워킹 타이틀’의 작품은 물론이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무거운 영화를 많이 연출한 거장 켄 로치의 숱한 작품들 속에도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 있다.

그런 감수성, 그런 언어,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아니 저 우주를, 우주 너머의 광막한 시공간의 세계를, 그 역사를, 그 비밀을 탐사해 온, 75억 인구 중 최고의 천재였던, 그리고 천재 그 이상의 위대한 인간 스티븐 호킹이 지난 3월 14일 다른 차원, 다른 세상, 다른 우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지구에서 보낸 시간은 76년.

2000년 9월 청와대 면담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과 스티븐 호킹 박사. /대통령 기록관

타계 소식을 전하면서 유족들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명석함과 유머로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과학적 업적을 잘 알지 못한다. 내 앞에는 두 권의 책이 있다. 읽어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모를 〈시간의 역사〉와 바로 나 같은 독자를 위해 다양한 그림과 이미지와 사진들을 총동원한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다. 이 책을 봐도, 잘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의 결론 부분을 이해하겠는가.

“만약 우주 전체가 다시 수축한다면 우주의 미래에는 또 하나의 밀도 무한대의 상태, 즉 빅크런치가 있을 것이다. 빅크런치는 시간의 끝에 해당한다. 설사 우주 전체가 재수축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붕괴해서 블랙홀을 형성하는 모든 국부 영역들에는 특이점이 존재할 것이다. 이 특이점들은 블랙홀 속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들에게는 시간이 끝이 될 것이다.”

솔직히 무슨 얘긴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 수 있다. 이 책들은 높은 수준의 유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부고를 전세계에 전하면서 명석함은 물론이고 특히 ‘유머’를 강조한 까닭을! 호킹에게 유머는 그의 학문적 자산이자 그의 육체적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나는 이 책들을 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제1장 ‘우리의 우주상’을 호킹은 이렇게 시작한다. “언젠가 한 유명한 과학자(어떤 이는 그가 유명한 철학자이기도 한 버트런드 러셀이었다고 말한다)가 천문학에 대한 대중강연을 한 적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러셀은 어느날 강연을 했다’고 써도 된다. 그러나 일부러 ( ) 안에 러셀을 집어넣는다. 책의 끝에는 갈릴레이, 뉴튼, 아인슈타인에 대한 촌평을 덧붙였다. 인류사의 거장들에 대한 짤막한 촌평인데, 그는 이러저러하여 위대하다는 식이 아니라, 어떤 디테일을 딱 뽑아내서 그 디테일이 갖는 의미를 풍부하게 확장해가면서 살짝 비틀기도 하고 흔들기도 한다.

호킹과 이웃하며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21살이었던 1963년, 전신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진단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2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50년 넘게 생존했다. 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휠체어와 컴퓨터 음성시스템을 이용해 세상과 대화를 했다.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세계 우주론 학회에도 참석했다. 1992년의 대선에서 실패한 당시 김대중 후보가 이듬해 1월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났는데 6개월가량 호킹 박사와 이웃하며 지냈다. 이런 인연으로 7년 뒤, 호킹은 청와대를 방문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천재적 발상과 무한에 도전하는 인간의 위대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기발한 유머”를 극찬했고, 호킹은 화답 겸 특별 연설을 했다. 그 첫마디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가 이제까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스티븐 호킹의 인류사에 등재되는 책이니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1996년)의 ‘서문’에서 호킹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책(원저 〈시간의 역사〉)은 40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전세계의 남녀노소를 포함해서 750명에 1권꼴로 팔려나갔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네이선 미르볼드(전에 나의 ‘박사후 과정’ 학생이었다)의 말처럼, 마돈나가 섹스와 관련해서 판 것보다 내가 물리학과 관련해서 판 책이 훨씬 더 많은 셈이다. 〈시간의 역사〉가 거둔 성공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여러 부분을 읽기 어려워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호킹은 많은 그림을 함께 싣고, 시각자료들마다 일일이 부가적인 설명까지 친절하게 달았다. 무지몽매한 자들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후의를 남기고 저 머나먼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난 호킹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끝까지는 읽어보기로 하자.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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