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이런 경주는 처음이지?
[경향신문] ㆍ경주 사람도 잘 모르는 명소들
곧 3월이다. 새싹이 움트고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새 학기를 앞두었거나 사회 첫발을 내딛기 전 새롭게 마음을 다지려면 어디로 떠나는 것이 좋을까. 경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가득한 천년의 도시다. 불국사,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동궁 월지 등에 이미 가봤다면 색다른 곳에서 힘찬 기운을 받자. 경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진짜 보석 같은 곳을 찾았다.
■ 경주, 여기는 몰랐지
“경주 어린이박물관이 달라졌다고요?” 국립경주박물관 김유식 학예연구실장(57)의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천년 문화재가 숨 쉬는 박물관 내 어린이박물관이라야 신라시대 유물이 가득하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에서 SRT를 타고 2시간 만에 신경주역에서 내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모든 입장료는 무료. 외국인들의 틈을 비집고 어린이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신라의 도시답게 박혁거세, 왕릉, 화랑, 첨성대, 불교 등 300평의 공간은 역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배우기에 딱 좋아보였다. 김 실장은 “지난 1월 중순 문을 열었는데 서울의 유명 학습 놀이공간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며 “단순한 관람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온종일 뒹굴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고 말했다.
“남천을 따라가 보세요. 저기가 신라의 궁궐터 월성인데 반달모양이라 반월성이라고 하지요. 지난 1일 신라의 왕과 왕비가 거닐던 ‘월정교’를 마침내 복원해 신라탐방 길이 열렸습니다.” 김 실장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남산 가는 길’이었다. 걸어서 15분쯤 거리에 있는 ‘월정교’는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했다.
차를 첨성대에 세우고 계림 숲으로 들어섰다. 천년의 세월을 이고 진 느티나무, 배롱나무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잎을 틔워서인지 운치가 남달랐다. 경주 최씨들이 모여 사는 교촌마을을 지나자 2층 문루(門樓) 월정교로 향하는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9년 2월 궁의 남쪽 문천성에 춘양, 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월정교는 거대했다. 햇살을 밟으며 천천히 5분 정도 다리를 건넜을까. 저 멀리 남산 자락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논밭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걸었다. ‘남산 가는 길’은 소박했다.
“1976년 경주와 포항을 잇는 산업도로가 생기면서 도당산이 반토막이 나 남산으로 가기가 힘들었지요. 흙을 덮어 아치형 생태터널을 만들었는데 신라왕궁에서 월정교, 도당산, 남산까지 왕의 길을 이었습니다.” 경주시청 장문생씨(44)와 푸른 대나무가 안내하는 잘 닦인 나무계단을 올라 도당산 화백정에 다다랐다. 경주 옛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1500년 전 왕국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다시 찾은 황리단길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대릉원 근처 황남동 일대에 생긴 1㎞ 정도 되는 허름한 거리에 이색 공간이 들어선 것은 불과 1년6개월여 전이다. 흑백사진만 찍어준다는 대릉사진관, 문학서점 등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한두 곳이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는데 요즘 페이스북에서 인기몰이 중이라는 그림책 서점 ‘소소밀밀’이 궁금했다. 대릉원 담벼락과 가까운 낡은 한옥으로 들어서자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과 당장 읽고 싶은 외국 그림책이 가득했다. “아이의 친구가 되어줄 다정한 책을 선별하고 있지요.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것은 그날의 경험과 기억을 사는 것입니다.” 서점 주인 구서보씨는 스마트폰을 들고 여기저기 인증샷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에게 “사진촬영은 금지”라고 정중히 말했다. 오직 책을 읽는 데만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 경주, 여기는 어때
“경주 보문단지에 있는 엑스포공원요? 거기 뭐 볼 게 있나요?” 경주박물관 임재완 학예사(42)가 경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문화공간이 있는데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엑스포공원으로 들어가 180m쯤 언덕을 올랐을까. 설마했는데 놀라웠다. 하늘을 지붕 삼은 ‘솔거미술관’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의 작품은 힘이 넘쳤고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미술관은 예술작품과 조화를 이룬 것이 인상적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아평지 연못을 한 폭의 그림으로 끌어들인 유리창을 액자 삼아 실시간으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솔거미술관 박갑숙 차장(45)은 “1990년대부터 박 화백이 경주에 머물며 석굴암, 불국사, 남산 불적 등 신라의 문화유산을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화폭에 담고 있다”며 “차 한잔을 즐기며 여유를 찾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시대 전통 궁궐을 모티브로 세운 ‘동궁원’은 매력적이었다. 동물원과 식물원이 마주 보고 있는데 최근 새롭게 꾸며진 제2식물원에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고 했다. 듣던 대로 입구부터 카메라와 휴대폰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실내에는 야자수 등 100종 6500여본의 아열대 식물들이 가득했다. 이름도 생소한 일랑일랑, 시서스, 사계목서, 하와이무궁화 등이 방긋방긋 인사를 건넸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300년 된 보리수, 250년 된 붉은 원종 고무나무 앞은 평일인데도 한참 줄을 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식물원 본관과 이어진 북카페 ‘죽지랑’은 아담하면서도 예뻤다. 역사와 철학, 만화책까지 편하게 읽을 수 있으니 일상에 찌든 마음이 넉넉해지겠다 싶었다.
1년여 전 문을 연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황룡사는 역사상 최대의 사찰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커다란 통유리로 보이는 9층 황룡사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한 8m 높이의 탑이 웅장했다. 이광 운영팀장(59)은 “4만2000개의 목부재와 8만5000장의 동기와로 목탑 모형을 제작하는 데 8년이 걸렸다”며 “해질 무렵 조명이 은은하게 켜지면 목탑이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고 말했다. 새봄을 맞아 새 출발을 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잘 몰랐던 경주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경주 | 글·사진 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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