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모르는 아이? 교실 한구석에 꼭 있어요

김지윤 2018. 2.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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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펴낸 홍인재 교감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펴낸 홍인재 교감이 지난달 16일 전주금암초등학교 교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문맹과 문해맹. 21세기 한국 교실에서는 다소 낯선 단어다. 대부분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은 물론 알파벳까지 배우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누가 아직도 글자를 몰라?’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도 교실 한구석에는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아이들이 있다.

지난달 16일 전주금암초등학교를 찾았다. 최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펴낸 홍인재 교감을 만나기 위해서다. 방학 기간인 이날 오전에도 홍 교감은 학교 상담실에서 자석 글자 교구를 활용해 ‘읽고 쓰지 못하는’ 영호(가명)를 지도하고 있었다.

1990년 첫 발령지에서 글자 모르는 아이들 만나

홍 교감은 1990년 첫 발령지인 전주 외곽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4학년 담임을 맡았다. 교사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글자를 모르는 11살 ‘하준’(가명)이와 ‘순영’(가명)이를 만났다. 2년 동안 온갖 방법을 써보며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무작정 따라 읽어보게도 하고, 음절표를 외우라고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순영이는 끝내 글자를 깨치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교대 시절 ‘한글 지도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없더군요.”

20여년이 지나 홍 교감은 어느덧 ‘중견 교사’가 됐다. 전라북도교육청 교육혁신과와 전주교육지원청(이하 지원청)에서 장학사로 5년을 일했다. 지원청에서 2년 동안 학습클리닉센터(이하 센터) 업무를 맡아 기초 학력 정책을 연구하며 문맹인 아이들을 다시 만났고,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센터 아이들 대부분이 글자를 더듬더듬 읽거나,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첫 부임지에서 만났던 하준이와 순영이가 떠올랐죠.”

문맹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장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것’을, 문해맹은 ‘자신이 읽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센터에서 글자 해독이 힘든 아이들을 만나며 교사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쯤, 운명처럼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엄훈 청주교대 교수가 펴낸 <학교 속의 문맹자들>. 책을 읽은 뒤 전자우편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엄 교수와 2주에 한 번씩 모여 문자 지도 방법론을 연구·공유했다. ‘글자를 가르쳐보고 싶어도 자료가 없다, 공교육 과정에 문자 지도 교재가 필요하다’는 열정 있는 일선 교사들의 아우성도 이때 듣게 됐다. 홍 교감은 “‘교육 전문가인 교사의 문자 지도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이때 더욱 굳히게 됐다”고 했다. “‘전북읽기교육연구회’를 꾸려 2년간 수업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5명의 교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사례를 나누고, 지난해에는 전남 지역 교사들과도 매주 토요일마다 실행연구를 같이 했어요.”

‘한글 떼고 입학’ 공식으로 여기지만 교실엔 여전히 글자 모르는 아이 있어 초1~2 시기는 문자 익히는 ‘골든타임’ 교대서 ‘문자 지도’ 등 연구 필요 문맹은 ‘공교육’이 풀어야 할 과제

지난달 16일 전주금암초등학교 상담실에서 홍인재 교감이 ‘영호’(가명)에게 한글 지도를 하고 있다. 김지윤 기자

한글 지도시간 늘었지만 ‘못 읽는 아이들’ 여전해

한국은 2013년에 문맹률 통계조사를 중단했다. 비문해 비율이 1% 미만이라 조사할 의미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를 근거로 한때 국가가 공교육 과정에서 ‘한글 지도 시간’을 계속 줄였다.

홍 교감은 “1999년까지는 적어도 초등 1학년 교실에서 한 학기, 또는 일 년 정도 천천히 한글을 배웠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와서 문자 지도 시간이 갑자기 6시간으로 줄었다”며 “현장 교사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2009년도에 14시간으로 늘렸고 2년 뒤 27시간으로, 급기야 2017년도에 62시간으로 조정했다”고 했다. “문자 지도 시간이 6차시로 줄어들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는 ‘교과서가 한글 선행 교육을 받은 강남 중산층 아이 수준에 맞춰져 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현장 교사들 입장에서는 교과 진도는 물론 글자도 가르쳐야 했기에 6차시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죠.”

문맹인 채로 자꾸 학년만 올라가며 교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홍 교감은 “첫 부임지에서 만난 순영이와 하준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고, ‘단 한 줄의 글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 문맹에서 사회 문맹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고 했다. “교과서는커녕 간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우리 어른들이 더 잘 알잖아요.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공교육의 영역입니다. 지금도 어떤 이유에서건 글자 습득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넘쳐납니다.”

공교육에서 한글 교육을 소홀히 한 15년의 시간 동안, 초등 입학 전 ‘한글은 떼고 가야 한다’는 게 부모들의 원칙처럼 굳어졌다. 한글 사교육 시장 규모도 팽창을 거듭했다. 문자 지도에 있어 발음·의미 중심 지도법 등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도 오히려 사교육 업체들이다.

초등 1~2학년 시기는 문자를 익히는 ‘골든타임’인데, 이때를 놓치면 고학년이 될수록 아이가 문맹인 걸 철저히 숨긴다. 수업 시간에 무엇인가를 적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베껴 쓰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니 교사도 그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 안에서도 표정 없는 그림자가 되어, 있는 듯 없는 존재가 된다.

홍 교감이 쓴 책에는 그가 교직생활에서 만난 문맹·문해맹 아이들과의 수업 사례가 다양하게 담겨 있다. 교사이면서 언어연구자, 동화작가이기도 한 홍 교감의 언어·문해 교육론 등도 엿볼 수 있다. 2015년에 만난 ‘은성’(가명)이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은성이는 당시 열두 살이었지만 절대 읽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였다. 책상에 엎드려 있기 일쑤고, 읽어야 하는 위기 순간이 오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읽을 수 있는 글자에 표시하라고 했더니, 받침이 없는 ‘이’, ‘가’ 등 쉬운 글자에만 동그라미를 치더군요. 은성이가 5학년이 될 때까지 ‘쟤는 글을 모르잖아’라는 소리와 함께 일방적으로 권유받았던 건 ‘한글 음절표’였을 겁니다.”

한글 음절표를 잘못 활용하면, 문맹인 아이가 글자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음절표 순서에 따라 외우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테면 ‘나비’ 글자를 읽을 때 그동안 소리 내어 읽고 외웠던 자·모음 음절표의 ‘가나다라…’를 순서대로 세어 ‘나’를 찾고, ‘기니디리미비…’를 센 뒤 ‘비’를 찾아 ‘나비’를 읽는 식이다.

홍 교감은 당시 ‘읽기 따라잡기’ 수업 방법을 통해 은성이를 가르쳤다. 생활문장(한 문장) 쓰기, 익숙한 그림책 읽기, 적어도 주당 2시간 이상 학습하기, 수준에 맞는 그림책 선택하기 등의 순서로 지도했다. 1년 동안 39권의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림책을 주교재로 택한 이유는 글자 분량이 적기 때문이었다. 책 한 권을 혼자 읽어낸 경험이 없는 문맹아는 그림책에 ‘위, 꾀’ 등 이중모음이 들어 있는 글자도 어려워한다. 글자 수가 적은 그림책을 통해 ‘내가 스스로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 경험을 안겨주는 게 중요하다. 홍 교감은 “한글 해독이 자동화되지 않은 아이는 글자에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책 한 권 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은성이가 혼자서 그림책 18권을 읽게 된 날을 잊지 못합니다. 받침이 거의 없는 쉬운 그림책 읽기부터 시작해 10개월 만에 받아쓰기로 넘어갔어요.”

홍 교감은 “초등 1학년 때엔 최소 한 학기 동안 ‘문자 지도’를 해야 한다. 그 시기에 아이들이 놀이하며 문자를 가지고 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시기는 해독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해독은 ‘문자를 풀어서 어떻게 읽는지 깨닫고 읽는 것’을 말한다. 이때 아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연습하게 된다. 고학년에 올라가 제대로 ‘독해’(읽기 기술을 활용해 읽고 난 뒤 깨닫기)할 수 있는 뿌리가 초등 1~2학년 때 생긴다.

국어 교과는 한글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게 돼 있지만, 수학이나 통합 교과 등 다른 과목은 아이들이 문자를 안다는 것을 전제로 자꾸 읽고 쓰라고 하니 좌절감부터 느끼는 아이들도 많다. 홍 교감은 “문제를 읽지 못하면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며 “초등 1학년 입학 뒤 한 학기 동안 한글을 배운다고 ‘뒤처지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했다. “습득이 빠른 아이들도 이때 충분히 자신만의 다양한 표현을 만들어내며 기본기를 닦아야 중·고교에 진학해서도 긴 지문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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