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데미안'을 읽으라고 청소년에게 권하려면

2018. 1. 2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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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할 때는 최소한 이 책을 읽어보고 권하면 안 될까. 읽다 보면 이 책이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같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한 문명의 쇠퇴와 몰락, 젊은 지식인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해방 이후 한국의 교양교육과 독서문화에서 항상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필독서다. 왜?

우선 이 작품이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데미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이 소설에서 열 살 꼬마였다가 사춘기 소년이었다가 대학생으로 성장해간다. 그 10여년 성장과정의 두려움과 방황이 이 작품만큼 밀도 있게 그려진 경우는 별로 없다. 누구나 청소년기에 책을 읽게 되고 또 그 무렵에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고뇌하게 마련인데, 딱 그런 사람들의 정서적 혼란과 지적 모색의 전형적인 모습이 싱클레어에게 압축되어 있다.

다음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에는 구창모의 옛 노래대로 ‘아픔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일종의 인생 교훈담의 면모가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싱클레어는 온갖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성숙’해 간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러나 첫 번째는 그렇다 해도 두 번째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성장’은 내적인 성숙보다는 일정한 사회적 단계를 제때에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데미안〉이 처세술이나 성공학 같은 책은 ‘결코’ 아니지만 이 책이 지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세계가 ‘성장’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되면서, 이 책이 지닌 본래적 가치는 축소되곤 한다. 때로는 이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고전 중의 고전을 읽기나 했을까 할 때도 있다. 가령 다음의 문장을 보자.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한 싱클레어

번역이 다소 울퉁불퉁한데, 어쨌든 어느 여인이 대학생 싱클레어에게 사랑의 의미와 그 언약을 하고 있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이끌려 그의 집에 갔다가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에바 부인도 싱클레어를 애틋하게 여긴다. 싱클레어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내가 그녀 곁에서 관능적 욕구로 불타며 그녀가 닿았던 물건들에 입 맞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점차 관능적이며 비관능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포개지며 밀려왔다. 그 다음에는 내가 내 방에서 고요히 열렬하게 그녀를 생각하면, 그럴 때 그녀의 손이 나의 손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지금, 대학생과 나이 많은 여인의 사랑에 대한 어떤 ‘부적절’한 스캔들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이 둘의 관계, 이 두 사람의 대화,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하여 이른바 ‘청소년을 위한 필독서’ 같은 목록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는 사랑,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의 신열을 앓을 수밖에 없는 청년과 에바 부인의 고통, 그 고통이 어떤 상처와 흔적을 남기는가에 대한 뜨거운 의미를, 우리의 ‘권장 도서 목록’들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유독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차원에서 읽도록 ‘권장’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 지금도 수많은 독후감이 블로그에서 쓰이는 단어 ‘아브락사스’도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 정도로 이해되는 분위기다. 인용컨대, 데미안이 방황하는 싱클레에게 보낸 메시지, 즉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문장은 단순하게 보면 방황과 시련을 딛고 서서 큰 세계로 성숙해간다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이를 20세기 초엽의 독일 사회에 적용하면 강력한 대혼돈의 징후다. 소설에서 그것은 전쟁으로 나타난다.

헤르만 헤세는 어떤 인물인가.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를 보면 “교양 있는 척하면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되는 독일 남부 슈바벤의 작은 마을 칼프에서 태어났다. 이 작은 마을에서 〈수레바퀴 밑에서〉의 주인공, 그러니까 헤세는 “진지한 눈망울과 영리해 보이는 이마, 그리고 단정한 걸음걸이”를 가진 소년이었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이 소년에게 저마다의 기대를 걸었다. 총명하면서도 겸손한 이 소년이 큰 도시의 좋은 학교로 진학해서 훌륭한 교사와 신부들로부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주인공 한스는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근대 독일의 풍경이며 〈데미안〉의 문화적 배경이다. 독일 시민들이 근대에 도착하는 방식은 다른 유럽의 강대국들과 달랐다.

그들은 여전히 황제 체제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낙후했다. 그래서 독일 시민들은 교양교육에 사회적 에너지를 집중했다.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그런데 근대적인 정치혁명이나 경제성장을 수반하지 않은 독일식 교양교육은 오히려 ‘강력한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상태가 바로 전쟁이다.

헤르만 헤세 (1877~1962)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독일이 1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 24살의 화가 오토 딕스는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열정적인 마음으로 기관총 사수를 자원하여 1915년에 서부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젊은 독일 화가에게 전쟁은 숭고했을지 몰라도 전투는 지옥과도 같이 참담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오토 딕스는 극단의 파괴와 참상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 만도 전쟁을 지지했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은 동생이 1915년에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인연을 끊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 토마스 만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통탄했고, 그 후 히틀러 나치즘에 저항했으며 2차 대전 때는 망명을 했다.

헤세도 1차 대전이 벌어질 때는 독일 민족주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벨기에를 실제로 침공하자 전쟁 반대의 입장에서 ‘친구여, 제발 멈추어라’는 글을 썼다. 그런 심정으로 헤세는 1차 대전의 현장으로 갔다. 작품의 후반부에 보면 데미안이 참전을 한다. 유럽이라는 오래된 세계, 독일이라는 낡은 세계가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웅변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할 때는 최소한 이 책을 읽어보고 권하면 안 될까. 읽다 보면 이 책이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같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한 문명의 쇠퇴와 몰락,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신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라는 것을, 다시 말해,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헤세 자신이 본격적인 자신의 삶을 싱클레어를 통해 들려주기에 앞서서 일종의 ‘서문’ 격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중략).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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