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리더는 확고한 목표와 유연한 실천력을 겸비해야 한다"

2018. 1. 1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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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대영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이다. 하지만 그 원형을 마련한 리더가 있다.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당시부터 영국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영광스런 처녀 여왕’이라 부르며 존경한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대영제국의 가장 위대한 군주

16세기 초, 잉글랜드(이하 영국)는 유럽의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으로 쪼개진 상태에서 스코틀랜드는 독립적인 왕정을 유지했고 아일랜드 역시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국민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고 우중충한 날씨만큼이나 영국의 현실과 미래는 암울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불과 50여 년 만에 영국은 유럽의 최강자가 되었고 마침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대영제국’ 완성의 첫 발을 내딛었다. 누가,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했기에 가난한 섬나라를 세계 경영이 가능한 국가로 성장시켰을까.

그 주인공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영국 사람들은 그녀를 ‘영광스런 처녀 여왕’이라 부르며 오늘날 영국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 칭송한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그녀에게 공주, 왕권, 부귀는 먼 이야기로 생존이 목적인 시절을 겪은 것이다. 아버지 헨리 8세는 6명의 왕후를 두면서 궁정 암투와 후계 문제 등의 분란을 일으켰고, 생모이자 헨리 8세의 왕후였던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가 세 살 때 간통의 죄목으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3주 만에 사형 당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간통한 여자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계모인 캐서린 파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이후 캐서린 파의 재혼 상대였던 음험한 야심가 토머스 시모어로부터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 이복 언니 메리 여왕의 통치기에는 견제와 감시는 물론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혀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의 악몽이 되풀이 될까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비록 공주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공주다운 대접을 받거나 부모의 따뜻한 사랑, 말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일찍부터 비정한 권력 암투의 세계에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모든 고난을 딛고 마침내 25세에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물론 그녀 앞에는 난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가난한 국민, 텅 빈 국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스페인의 노골적인 간섭, 자신을 반대하고 암살하려 한 반대파 귀족들, 스코틀랜드의 견제와 아일랜드의 이탈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자베스를 돕고 보좌할 참모진의 부재 등 엘리자베스는 넓고 어두운 궁전에 갇힌 인형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왕이 되어서도 정치적 혹은 개인적 원한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았고, 자신은 신교도였지만 카톨릭, 신교도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종교간의 골을 더 깊게 만들지 않았다. 또한 가난한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한 구제법을 만들었고 의회, 귀족들과는 유연하고 우아한 방법으로 그들의 반대를 누그러뜨렸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해적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해 군사력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했고, 아메리카 대륙, 인도,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건설해 자원의 공급처이자 새로운 소비시장을 개척했다. 그렇게 45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리더십을 거치면서 영국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리더십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명확한 목표 의식과 서두르지 않는 유연한 방법론이다. 엘리자베스는 빠른 결론이나 전시성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정책의 실행 과정이 합의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만 신하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모두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데 집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교 문제였다. 선왕인 메리 여왕은 카톨릭 신봉자였다. 그녀는 신교도 즉 성공회를 탄압해 궁극적으로 영국을 카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다. 피의 숙청도 있었다. 오죽하면 메리 여왕의 별명이 ‘피의 여왕’이었을까. 하지만 ‘종교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았는가.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 모든 신교도들은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나는 신교도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것이 또 다른 피의 숙청과 갈등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종교의 맹신에서 오는 극단성을 혐오했다. 그녀는 영국 성공회의 수장직 수락 요구를 받자 ‘수장’이 아닌 ‘수석 관리자’라는 유연성을 발휘해 구교도의 반발을 완화시켰다. 또한 성공회의 정착을 통해 로마 교황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모든 것을 한 번에 결정을 내리는 조급함을 부리지 않았다.

1546년 한 미술가가 그린 엘리자베스여왕의 모습
이러한 엘리자베스의 리더십은 의회, 귀족과의 정치적 대립을 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반대, 대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필요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친절하지만 단호한 말로 반대파를 설득하는 데 능숙했다. 예를 들면 심한 반대에 부딪쳐도 화를 내거나, 칼집을 만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지금 반대 의견을 제시한 의원의 키를 머리만큼 작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라는, 섬뜩하지만 은유적인 표현으로 반대를 뚫고 나가는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리더의 독단적 결정이 국가라는 큰 배의 방향을 돌릴 수는 있지만 추진력까지 장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큰 배를 나아가게 하는 힘은 국민의 지지, 사회 지도층의 단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록 느리지만 단단한 과정을 거친 단합된 힘을 위해 엘리자베스는 여왕의 권위보다 설득을, 결과의 과시보다 위대한 결과 도출에 힘을 쏟은 것이다.

또 하나 엘리자베스의 리더십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녀의 시선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사회,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적 융성의 모든 목표는 현재보다 나은 영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원한, 단죄보다는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해 모든 것을 집중시킨 열린 사고를 펼쳤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영국과 결혼했다. 영국은 그녀의 탁월한 리더십과 내조로 단 5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의 군주로서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리더들이 흔히 범하는 공적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수, 오류, 오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거의 무결점에 가까운 리더십으로 영국을 이끈 엘리자베스야말로 여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격체, 리더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전형이다.

▶각종 위협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는 1553년 영국 그리니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헨리 8세, 어머니는 왕후 앤 불린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불행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3살 때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불륜죄로 런던탑에 투옥시키고 곧 처형했다.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공주 지위를 박탈당하며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이복 언니 메리, 이복 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친딸처럼 돌본 것이었다. 그 당시가 엘리자베스에게는 가족의 의미와 행복을 체험한 유일한 시기였다. 엘리자베스는 매우 현명하고 영리했다고 한다. 특히 언어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말하고 쓸 수 있는 언어가 무려 7개에 달했고 문학에도 능통해 훗날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썼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했다. 다행인 것은 헨리 8세는 죽기 전 엘리자베스의 공주로서, 왕위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다시 찾아 주었다. 왕위는 13세의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이어받았다. 이가 바로 에드워드 6세이다.

그 무렵 엘리자베스를 돌보던 캐서린 파가 재혼했다. 재혼 상대는 토머스 시모어. 그는 에드워드 6세의 후견인인 에드워드 시모어 공작의 동생으로 해군 장교였다. 토머스 시모어는 소문난 바람둥이에 음험하고 위험한 야심가였다. 그는 왕후 출신에 부자인 캐서린 파와 재혼해 신분 상승과 재산 증식을 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여자로서 엘리자베스를 욕심 내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토머스 시모어가 밤에 엘리자베스의 방을 몰래 출입하고 심지어는 엘리자베스의 몸을 함부로 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왕실은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했다. 이 같은 소문을 듣고 캐서린 파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지인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캐서린 파가 죽었다. 그러자 토머스 시모어의 야심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올려 자신이 영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토머스 시모어의 욕망은 곧 국왕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토머스 시모어는 결국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이때 엘리자베스 역시 감옥에 갇혀 취조를 당했지만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제인 그레이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 무렵 메리와 제인 그레이가 왕위 자리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복 언니인 메리를 지지했다. 이가 바로 메리 여왕이다. 당시 실세 권력가인 존 더들리는 메리의 왕위 승계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헨리 8세의 여동생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종교적인 원인이 컸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를 거치면서 영국 내에서 세력을 형성한 신교도들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메리의 왕위 등극을 부담스러워 한 것이다.

제인 그레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고 선언했지만 수만 명의 국민 지지를 받은 메리에게 이미 정통성에서 밀리는 형국이었다. 메리는 바로 왕위에 올랐다. 제인 그레이는 단 9일 동안의 왕이 되고 말았다. 메리는 첫 번째 왕명으로 존 더들리를 사형에 처하고 제인 그레이와 다른 귀족들은 감금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메리 여왕의 감시망에 들어왔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마음에도 없는 카톨릭 신자 노릇을 해가면서 절대자인 메리 여왕의 공세를 피해갔다. 메리는 신교에 대한 피의 탄압을 단행했다. 이때 약 300명의 신교도들이 처형되었고 메리는 곧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펠리페 2세와 결혼을 추진했다. 이는 경제적, 정치적 판단도 있었지만 종교적인 동맹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메리의 결혼으로 인해 영국은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러자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영국 남부의 켄트 지역 성주 토머스 와이어트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국민들의 불만을 선동해 파죽지세로 런던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 와이어트의 반란이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더욱 경계심이 많아진 메리 여왕은 런던탑에 감금했던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고 엘리자베스를 와이어트 반란의 배후 주동자로 몰아 런던탑에 감금했다. 엘리자베스의 운명은 메리 여왕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강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메리 여왕은 반 카톨릭 세력의 구심점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대체재인 엘리자베스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신교도를 비롯한 국민들의 저항이 두려웠던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석방해 우두스톡의 왕실 가옥에 가택 연금시켰다. 엘리자베스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25세의 여왕, 위기를 현명하게 대처하다

1558년 메리 여왕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에드워드, 메리는 모두 후계를 남기지 못했다. 왕위는 자연스럽게 왕위계승서열 1위인 엘리자베스에게 넘어갔다. 1558년 11월17일, 엘리자베스는 25세의 나이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바로 닥친 문제는 종교였다. 당시 영국은 카톨릭과 성공회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다른 현안은 손도 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능란하게 이 문제에 대처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은 하나이다. 즉 믿음은 하나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라고 공표했다. 그리고 1559년 이른바 ‘수장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로 자리 잡게 했다. 이는 종교적 갈등의 봉합과 동시에 영국이 종교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1560년, 영국 성공회는 엘리자베스에게 교회의 수장직 수락을 요청했다. 엘리자베스는 여기에서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수석 관리자’라는 직책으로 이를 받아들이면서 카톨릭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성공회가 국교가 되면서 국민들은 교회 참석이 의무화 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교회 불참석에 대한 고발이 들어와도 거의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교에 대한 임면권을 선출로 바꾸었다. 물론 법적 근거는 헨리 8세의 교회령이었다. 당연히 주교는 신자 수가 많은 신교도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종교에 대한 맹신, 신봉이 극단적 행동을 가져오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가 치러내야 할 부담 비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톨릭, 신교 모두 불만이었다. 카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 집권 기간 내내 쿠데타, 반란, 암살을 시도했고 신교 세력은 카톨릭에 대한 탄압에 가까운 처벌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법과 무력에 의한 외형적인 종교 통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의 피의 숙청 후유증, 그리고 강요된 종교보다는 비록 느리고 잡음도 나지만 성공회의 뿌리가 서서히 국민들 마음에 자리 잡기를 원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하고 신임하는데 특정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영국과 국민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만 갖고 있다면 그가 비록 구교도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엘리자베스 리더십의 최고의 덕목이다.

더들리와 춤 추는 엘리자베스여왕의 모습
▶국민들 속으로 들어간 리더십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군주였다. 그것은 바로 애민정신이었다.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국왕의 첫 번째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몸소 실천했다.

당시 가난한 농민, 하층민의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그들은 구걸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구빈세를 신설해 여기서 마련한 재원을 기초적인 복지 자금으로 활용했다. 또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실시해 하층민을 이곳에서 정당한 돈을 받고 일을 하게 했다. 엘리자베스가 무엇보다 뛰어났던 것은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본 것이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런던과 지방을 순시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실제 생활 현장을 확인했고 그들의 민원까지 직접 들었다. 즉 왕궁까지 여과되어 온 여론이 아닌 일종의 ‘민생 투어’를 통해 국민과 함께 한 것이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행장을 꾸며 말을 타고 다녔는데, 그 모습에서 국민들은 ‘처녀 여왕’ 그리고 ‘영광스러운 여왕’이라는 별칭으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뜻을 알리는데도 능숙했다. 국민과 직접 소통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인쇄물을 통해 자신의 뜻과 정치적 견해 혹은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나 선전도 자주해 국민들에게 여왕의 통치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 내내 국민들과 의회, 그리고 모든 유럽의 왕실이 주목한 것은 엘리자베스의 결혼이었다. 결과적으로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한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에는 어린 시절의 불우했던 환경의 영향이라고도 말한다. 즉 아버지 헨리 8세의 문란한 결혼생활과 그로 인한 궁정 비극, 또한 계모 캐서린 파와 살 때 의붓아버지 토머스 시모어에게 성적 농락을 당한 기억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왕의 결혼은 정치이자 그 자체가 권력’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결혼으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세력은 국가 경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적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프랑스의 앙주 공작 프랑수아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그를 런던에 머무르게 하면서 곧 약혼이나 결혼을 발표할 것처럼 했던 것이다. 이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스페인이 영국을 공격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스페인에 대항하겠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처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결혼마저도 철저하게 정략적으로, 국익을 위해 이용한 것이다. 국가의 최고 경영자로서의 철저한 책임감과 의무에 입각한 행동인 셈이다.

▶해적으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뜻을 전파하고 관철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의회, 귀족들과도 협상, 위협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이다. 이렇게 엘리자베스는 서서히 절대 군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엘리자베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이 불가피하게 조성되었다. 영국은 종교, 경제, 영토 문제 등으로 스페인과 대립했다. 급기야 신교 국가가 된 네덜란드에 영국이 동맹을 선언하자 교황 비오 5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파문하고 ‘신 십자군 전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가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카톨릭 신봉자였는데 신교도를 중심으로 한 귀족의 반란으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엘리자베스에게 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서서히 자신이 영국의 여왕이 되려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1587년 메리 스튜어트의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사형에 처했다.

메리 스튜어트를 이용해 엘리자베스와 영국 성공회를 제거하려는 야망을 감추지 않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당시 대양을 주름잡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출동시켰다. 또한 영국과 가장 가까운 덩케르크 일대에 스페인군 1만6000명이 대기하며 영국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스페인 무적함대에 비하면 거의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위기를 타개할 인물을 발탁했다. 바로 프랜시스 드레이크이다. 그는 사실 군인보다는 해적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이끄는 해적함대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스페인 상선을 공격했고 그에 위협을 느낀 펠리페 2세는 드레이크의 목에 무려 800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영국의 정규 해군 지휘를 맡겼다. 존 호킨스는 군함 건조, 병참 지원, 재정 확보를 맡았고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전투 지휘를 담당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를 “나의 해적”이라 부르며 신임했다.

영국은 모든 배를 동원했다. 사령관 찰스 하워드, 부사령관 프랜시스 드레이크, 부제독 존 호킨스로 구성된 200여 척의 영국함대는 칼레 해변에 집결했다. 스페인의 함대는 호기롭게 영국 해군과 부딪쳤지만 화공법에 걸려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도 진 스페인 함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페인 함대는 폭풍을 만난 거의 1만 명이 수장되고 말았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시대가 가고 영국의 대양함대 시대를 연 역사적인 전투인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때도 영국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나는 내가 연약한 여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철혈 여왕

이런 전쟁의 와중에도 영국의 문화는 융성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이 만개한 것이다. 영국의 모든 마을에서는 연극이 열리고 국민들은 문학과 음악 등을 감상하고 즐기게 되었다. 이른바 영국 문학사에 있어 국민 문학 시대, 즉 영국의 르네상스를 연 것이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개인적으로도 문학과 예술에 조예나 관심이 깊었고, 그녀 또한 시집을 내거나 예술가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은 번영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열었고 인도,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에 매일 식민지가 하나씩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여왕의 만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가장 신임하던 신하이자 친구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이 사망하고 그 빈자리를 젊고 유능한 참모들이 대신했지만, 무엇보다 양아들로 삼을 정도로 신임했던 로버트 데브루는 여왕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여왕은 아일랜드를 평정하기 위해 로버트 데브루에게 아일랜드 진압군 사령관 겸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하고 평정을 맡긴다. 하지만 데브루는 무능한 귀족일 뿐이었다. 그는 전투에 지자 갑자기 런던으로 돌아와 버렸다. 직무 이탈에 책임 회피였다. 그는 여왕에게 자신이 직접 설명하겠다고 면담을 신청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분노했다. 그의 모든 직책을 박탈하고 면담을 거부했다. 그러자 데브루는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의 부하 약 300명을 이끌고 여왕에게 대항했지만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여왕이 입은 마음의 상처도 무척 컸다.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의 잇단 일탈과 반란 등으로 인해 평소 앓고 있건 우울증은 심해지고 다른 병도 생겼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3년 3월24일, 71세에 사망했다. 불굴의 의지로 몇 번의 위기를 겪고 여왕이 되어 영국과 결혼한 여왕, 종교,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국가가 갖추어야 할 모든 면에 단 한치도 소홀치 않았던 현명한 군주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평소 엘리자베스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로마 교황 식스토 5세는 엘리자베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런 평가를 남겼다.

“엘리자베스 그녀는 비록 왕이었지만 여자였고, 작은 섬의 반쪽만 소유했지만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제국과 모든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 두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604년 영국과 스페인의 질긴 악연은 엘리자베스의 후계인 제임스 6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런던에서 협정을 맺으면서 종결되었다.

▷#리더십 | 확고한 목표, 유연한 방법론

엘리자베스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리더였다. 반대파에게 일방적 항복을 요구하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일이 설득하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면서도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과 방법 역시 정당할 수 있다는 생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인재를 등용하는데도 계급, 출신, 종교를 따지지 않았고 단 하나의 기준, 즉 “영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라는 원칙만 적용했다. 그래서 드레이크 같은 해적 출신에게 영국 해군의 지휘를 맡겼지만 이는 대단한 용기와 강한 카리스마가 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스는 후에 드레이크를 기사로 임명했고 이를 본 용감하고 탐험심 강한 많은 영국인들이 대양에 진출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한번 신임해 등용하면 작은 실수, 실패를 용서하면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용서와 자비, 동정은 대범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엘리자베스는 지혜로운 군주였다.

또한 궁전 안에서 영국을 지휘하지 않았다. 여왕은 현장을, 국민들의 삶을 중시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몸소 갑옷을 입고 군을 지휘했고 독려했다. 진정한 책임감, 자신의 권위를 의무로 승화시킨 것이며 이 또한 국민과 병사를 사랑하는 애민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단 한 번도 투쟁의 역사가 아닌 적이 없었다. 어려서 부모의 결별과 어머니의 죽음, 이복 언니의 협박과 위협, 의붓아버지의 성적 농락, 왕이 되어서도 카톨릭 세력의 암살, 반란, 반발에 부딪혔다. 이외에도 스페인과 로마 교황청의 간섭과 협박,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인간적인 배신과 양아들 데부르의 배신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칼을 빼 들고, 때로는 용서하면서 수많은 정적들이 우글거리는 마치 정글과도 같은 정치판을 헤치고 영국을 이끈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리더십은 사실 다양한 색깔로 변주되면서 45년 통치기 동안 빛을 발했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가 잊지 않은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목표, 그것을 실천하는 유연한 방법론’이다. 이것이 여왕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했을까. 아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역경 속에서 얻은 삶의 지혜이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리더의 숙명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

인용 및 참조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앨런 엑슬로드 지음, 남경태 옮김, 위즈덤 하우스 펴냄) <엘리자베스 1세&#8211;불멸의 여인들>(김후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13호 (18.01.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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