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처유상수]영화배우 김영인씨-무명배우들이 없다면 톱스타도 없다

2017. 9. 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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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씨는 “심금을 울려야 한다. 마음의 감동이 전해진다면 관객이 한 사람뿐이어도 좋은 영화다. 지금은 너무 상업적인 성과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은 회피할 수 있지만, 배우는 어떤 역이라도 그 역에 충실해야 한다. 흑백영화에서 시작해 텔레비전까지 무대를 가리지 않고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있다. 영화배우 김영인.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스타는 아니지만 어려운 역할들을 연기해온 배우이다. 이름은 몰라도 어디선가 분명 보았던 얼굴이다.

“고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1961)’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 대역배우였는데 한 번 해보니 영화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57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는 김영인씨는 충무로에서 가장 연륜이 깊은 배우이다. 현역배우로 활동하는 이들 중 가장 선배인 셈이다.

배우는 연기를 통해 살고 누군가의 꿈이 된다고 말한다

충무로와의 첫 인연은 ‘해결사’

그는 본디 하키와 럭비를 했던 운동선수였다.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특기생으로 한양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5·16 군사정변은 그의 운명의 행로를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그는 소위 종로통의 학생주먹으로 알려졌다. 그는 5·16 직후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과 함께 깡패 소탕으로 잡혀 들어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도주한다. 숨어 살던 그에게 우연찮게 들어온 일거리가 영화사 일이었다. 김영인씨는 “당시 영화사에서 감독에게 연출료로 떼인 돈이 있었는데 받아달라고 했다. 그것을 해결해주자 비슷한 일들을 해달라는 청이 있었다. 소위 해결사로 충무로에 발을 디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고 김기덕 감독은 당시 영화사의 전무였다. 데뷔작을 준비하면서 김영인씨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당시 주먹을 쓰며 살던 그에게 “너 그렇게 살지 말고 우리하고 같이 영화하자고 했다. 깡패하지 말고 배우하라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인간이 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에게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며 역할들을 줬다. 처음 했던 역은 얼굴이 나오지 않는 대역배우, 즉 스턴트맨으로 몸을 쓰는 연기를 했다. 본격적으로 배역을 받고 제대로 된 연기로 데뷔한 작품은 1966년 ‘불타는 청춘’을 통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연기인생을 “필모그래피는 남아있지 않지만 영화만 400여편이 넘게 출연했다. 텔레비전으로 와서 500회 이상 출연했다. 강한 인상 때문에 액션물에 많이 출연했는데 한 300번은 죽었다. 200번은 맞아죽고 50번은 칼에 맞아죽고 50번은 총에 맞아죽었다. 그러다가 도망쳐서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표현했다. 수없이 많은 배역을 겪으면서 한 번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고 어떤 역이라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린다. 20여개의 영화사에서 1년에 10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만들면 흥행이 되던 시절이다. 충무로에는 일과 돈이 넘쳤다. 김영인씨는 “신성일씨가 541편의 영화를 찍었다고 하는데, 한창 때 편수로는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다. 주연배우가 한 편 할 때 나는 서너 편을 찍었다. 벌이가 더 좋은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돈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집 한 채가 80만원 정도였고 주연배우 출연료가 50만원에서 70만원을 오갈 때, 김영인씨는 30만원을 받았다. 겹치기로 일을 하던 때라 분명 돈은 많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만큼 흩어져 나갔다. 소위 어음을 받고 일하던 때고 정과 의리를 내세우던 시절이라 셈도 분명치 않았다.

오직 현장에서 쌓은 연기지만 김영인씨의 연기론은 확실했다. “배우는 어떤 역할을 맡든 화면 속에선 자신이 주인이다. 선배 아니라 부자지간이라도 남을 다 죽여야 그 인물이 살아난다. 그렇다고 과장해선 안 되고 몸 전체로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한다”고 했다.

그가 연기를 배운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고 허장강씨를 꼽았다. 허장강씨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연기란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허장강 선배는 결코 상대배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카메라 넘어 관객을 바라봤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상황을 갖고 놀았다”고 말한다. 역할을 흉내내서는 안 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 진짜라는 것이다.

400여편의 작품 500여회의 드라마 속에서 한 번도 같은 인물을 연기하지 않았다.

한창 때는 신성일씨보다 더 많이 찍어

당시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던 영화 10편 중에 6편 이상이 액션물이었다. 액션은 그의 주특기라서 싸움 연기를 지도하는 무술감독의 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액션은 단순했다. 주먹으로 원투를 치고 발길질을 하거나 굴러서 때리는 동작, 그리고 박치기 정도가 다였다. 대역 없이 생으로 배우가 해내야 했다. 실전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생동감 있게 화면을 만들어야 하니까 고려할 부분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의 단순하면서도 박진감 있는 액션은 하나의 교과서가 됐다.

영화감독 류승완은 그의 책 <류승완의 본색>에서 “<오사까 대부>(1986)에서 이대근 아저씨와 마지막에 시공간을 초월하며 대결을 벌이던 김영인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끝까지 싸운다”고 쓰고 있다. 스크린 속의 김영인은 류승완을 영화로 이끈 길잡이 중 하나였다. 그런 인연으로 류승완 감독은 그의 작품 <피도 눈물도 없이>를 찍을 때 김영인씨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김영인씨는 그로부터 연달아 5편의 작품을 류승완 감독과 같이 했다. 영화 속의 인물이지만 누군가에겐 영웅으로, 별로서 존재한다.

텔레비전 시대가 되면서 그의 연기는 브라운관으로 들어왔다. 액션이 필요한 배역과 선이 굵은 시대물 속 인물을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긴 호흡의 연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드라마 연기는 여운을 가져야 한다. 결코 한 회에 모든 것을 다 보여줘선 안 된다. 여인의 치맛자락이 닫힌 문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이 드라마에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 출신의 배우가 드라마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통설을 그는 말끔히 씻었다. 텔레비전에서도 출연작품마다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얼마 전 ‘제3공화국’(1993) 재방송을 보게 됐다. 그때 김창룡역을 맡았는데 이북사투리가 강한 역할이었다.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말한다. 역할에 충실하고 몰입해야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텔레비전 출연은 그의 인지도를 높였다. “드라마 ‘무풍지대’(1989)에서 김두한역을 맡았다. 첫 회 방송 직후 시청률 1위에 올랐다. 그때 인기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실감했다”고 한다. 인기가 사람을 흥하게 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인간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1년 반 동안 업소 출연과 행사 출연 요청이 잇따랐다. 하룻밤에 8곳을 뛰며 쉴 사이가 없었지만 “후배들이 먹고 살겠다고 도와 달라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의리를 돈과 바꾼 대가로 그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본을 읽고 인물을 이해한 후에야 출연을 결정한다.

뇌졸중 극복하고 4년 만에 다시 복귀

김영인씨에게 배우로서 어떤 작품, 어떤 영화가 좋은 것인지를 물었다. “심금을 울려야 한다. 마음의 감동이 전해진다면 관객이 한 사람뿐이어도 좋은 영화다. 지금은 너무 상업적인 성과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영화가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으로 발전하면서 영화의 예술적인 가치를 지나치는 것도 영화판의 바뀐 현실이다. 배우가 매니지먼트 회사 소속이 되고 철저한 관리를 받는 것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변화된 세상에서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왔던 그와 같은 이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배우는 영화와 드라마의 꽃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 작가와 감독의 역량이 중요해도 관객을 만나는 배우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했다. 때문에 그는 대본을 받으면 세 번을 읽고 출연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줄거리와 전체 내용을 본다. 두 번째는 내가 연기해야 할 역할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상대방 배우를 본다”고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연기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배우의 인기와 상관없이 진실한 연기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연기와 배우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10여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병고를 겪는 와중에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의 일과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해 “돈을 몰라서 고생만 시키다가 떠나보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투병의 의지로 4년 만에 연기의 세계로 돌아왔다. 아직도 영화에 출연하고 드라마 제의가 들어오면 대본을 읽는 천생 배우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는 촬영이 없는 날 대부분은 충무로의 영화배우협회 사무실로 출근한다. 상임이사 직을 맡고 있기도 했지만 영화배우협회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 예술단체 중에서 독립된 자기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영화배우협회가 유일하다.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달라져도 영화는 영원할 것이고 배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영화배우라는 자부심을 갖는 이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협회 공간을 마련할 때 앞서 뛰어다닌 일로 나이가 들었어도 책임감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는 영화와 영화배우에 관한 한 바른말을 아끼지 않는다. 정부의 영화정책도 산업으로서 지원에만 치우쳐 있고 정작 영화배우에 대한 지원과 관심은 전무하다고 비판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 중에 영화배우에 대한 것은 한푼도 없다. 회의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냈더니 이제는 불편한 기피인물이 됐다”고 쓴소리를 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 8개 관련 협회의 인력이 함께 작업을 하는데, 지원과 관심이 한쪽으로만 쏠려 있다는 것이다. 연출자도 중요하고 촬영과 그 밖의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영화는 배우를 통해서 세상과 만난다. 영화배우가 놓인 현실에 대해 “인생유전, 세상은 돌고 돈다 해도 어떤 때 세상은 너무 가혹하다”고 표현했다. 이름 없는 배우들의 연기 없이 톱스타만이 빛나는 영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사고뭉치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했다.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했고, 대본 속 인물의 목소리로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누군가에겐 삶의 꿈과 별이 될 수 있었다. 57년의 연기생활이 한 편의 영화와 같으며, 그를 통해 “한 티끌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타고난 배우로 살아갈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그는 톱스타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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