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4)ㅣ한강 정구 '유가야산록'] 속세 등진 '최치원의 산'.. 그 많던 절은 흔적 없어
가야산이 새삼 화제다. 고대 가야의 신화와 유적·유물 때문이다. 가야산은 가야 건국의 시조모 정견모주의 신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하와 혼인해서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왕들을 낳고 가야산의 산신이 됐다고 전한다. 김수로왕의 신화보다 더 오래됐고, 더욱 구체적이다. 우리 고대 역사의 출발점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산이다.
가야산에는 한국 불교 삼보사찰 중에 법보사찰의 본산인 해인사가 있다.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성찰의 최고 경지인 해인海印의 의미도 ‘경전을 열심히 닦고 닦아 그 경지에 도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야산은 또 한국 최고의 계곡 홍류동이 있고, <정감록> 십승지 중의 하나인 만수동(지금 마수리로 추정)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능선과 산줄기가 잘리고 토막 나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지만 한때는 신라가 낳은 최고의 천재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했을 정도로 심산유곡을 자랑했다. 가야산은 최치원이 남긴 마지막 자취이기도 하다.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말소리는 지척에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却恐是非聲到耳각공시비성도이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세속을 벗어나고 싶은 그의 심정을 그대로 노래하는 듯하다. 최고의 천재가 사회제도의 벽에 막혀 신라와 당나라에서 연속으로 좌절을 겪자 세속의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홍류동계곡은 예로부터 그 아름다움으로 선비들의 음풍농월 장소로 유명했다.
'하늘을 찌를 듯 험한 길을 밟고서, 동굴 입구의 돌문을 두드렸네. 참으로 이미 기이한 경지에 마음이 맞았기에, 위험한 곳을 무릅쓰고서 판판한 평지와 같구나. 어두운 골짜기의 깊은 굽이를 찾아들고, 높은 언덕의 가파른 고개를 오르니, 천태산 폭포가 벼랑에 흘러내리고 형악衡嶽의 구름과 안개가 갑자기 개이네. 기이한 바위가 주위에 벌려 있고, 푸른 절벽이 사면으로 둘러싸여, 돌에는 붉은 전자篆字가 새겨 있고 물결에는 은은히 천둥소리가 일어나는데, 이곳이 이른바 홍류동紅流洞이다.’ — 율곡 이이 <유가야산부>
한강 정구도 <유가야산록>에 홍류동계곡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홍류동 계곡의 물줄기는 바위틈으로 어지러이 쏟아져 시끄럽게 흘렀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치듯 쾅쾅 울렸고, 밝은 대낮에 이리저리 날리는 물방울은 숲과 나무다리로 흩어졌다. 그 물은 한 굽이에 머물러 빙빙 돌기도 하며 흐른다. 어떤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드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 소나무와 전나무 숲은 울창했고 바위 절벽은 웅장했다. 계곡물은 8, 9리 정도 이어졌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맑고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어 눈은 휘둥그레졌다. 정말 아름다운 경치였다.’
정구는 1579년 9월 11일부터 24일까지 무려 14일 동안 가야산을 누볐다. 유람 그 자체를 즐긴 듯하다. 정구는 일찌감치 20세의 나이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무오사화로 참화를 당한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한동안 학문에 전념했다. 1563년에는 이황을, 1566년에는 조식을 찾아 스승으로 삼고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가야산을 다녀온 뒤인 1580년 창녕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임진왜란을 겪고 1608년 대사헌직을 마지막으로 성주로 귀향한다.
그들과 함께 홍류동계곡을 거쳐 현재 가야산 토신골을 지나 정상 상왕봉을 밟은 뒤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극락골로 내려와 해인사 뒤로 하산했다. 그들은 공개되지 않은 두상이 없는 목이 잘린 불상을 소개하고 길이 없는 코스로 내려오기도 했다. 국립공원 직원과 동행했기에 가능한 답사였다.
홍류동계곡은 지금 ‘가야산소리길’이란 걷기 길로 거듭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시원한 물바람을 맞으며 해인사까지 걸을 수 있다.
그런데 홍류동계곡이란 지명의 유래가 궁금하다. 여기저기 검색하고 공단 직원한테 물어봐도 정확한 답을 알기 어렵다. 대충 알려지기로는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 계곡물이 흘러 홍류동이라 했다고 전하며, 그 내용이 최치원의 시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치원의 어느 시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최치원의 시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그냥 구전된 내용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홍류동 입구는 무릉동이다. 예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과 같은 무릉이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들어갔으니 이 정도는 돼야 얘기가 되지 싶다.
정구도 9월에 가야산을 유람하려 했을 때는 홍류동계곡의 명성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가을이니 분명 단풍이다. 홍류동계곡 주변의 수목은 대개 활엽수다. 가을 단풍을 어디 내놔도 손색없을 것 같다.
정구는 (9월이지만) “가을 구경으로 약간 철이 이르다”는 대화를 일행과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강절康節이 노래한 ‘看花取蓓蕾간화취배뇌(꽃구경은 피기 전의 꽃봉오리 보는 것이 좋다)’란 시로 대신한다. ‘세상살이 바쁜데, 우리가 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것 자체가 곧 다행스러운 일이니, 철이 빠른지 늦은지 하는 문제에 구애될 것이 무엇이리요?’라고 자위한다.
홍류동계곡에 도착한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감탄을 연발한다. 특히 석각에 대해서 다들 한마디씩 한다.
어떤 곳에는 호사가가 절벽과 너럭바위에다 이름을 지어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글자의 획이 뚜렷이 보였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笛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포噴玉瀑布, 완재암宛在巖 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닳아 없어지지 않고 유람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 동안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시가 바로 ‘제가야산독서당’이다. 그 시절엔 자연의 풍광에 흠뻑 빠졌다면 지금은 와불 등 다양한 볼거리를 길옆에 전시해 뒀다. 가끔 쉼터도 있다. 너무 볼거리가 많아 혹 자연의 소리를 놓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석각은 우암 송시열이 남긴 것이다. 홍류동계곡 도로 옆 암벽에 희미하게 해서체로 ‘尤庵書우암서’라고 쓴 것이 보인다.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을 우암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한다. 송시열 글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홍류동의 석각은 역시 볼거리다. 시대를 걸쳐 대표적인 시인묵객들이 한마디씩 남긴 글은 자연의 풍광을 떠나 그 의미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듯하다. 풍류가 넘치는 선비들의 뜻을 이어, 1970년대에는 암벽을 타면서 이름을 새겨 주는 직업이 있었다고도 주민들은 전한다.
홍류동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어느덧 해인사에 이르렀다. 정구는 저녁 무렵 해인사에 도착해, 학사대에 다녀와 술을 한 잔 걸친 뒤 잠을 청한다. 학사대 전나무도 역시 최치원의 전설이 전하는 나무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하기 전에 꽂은 전나무 지팡이가 자라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나무의 수령은 5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최치원은 1,000여 년 전의 사람인데 시간적으로 맞지 않다. 그래도 학사대는 가야산의 명소 중의 하나는 분명하다. 정구는 학사대를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몇 번이나 다녀간다.
정구는 다음날 일어나서 해인사 경내를 두루 둘러보고 창건설화도 대충 설명한다.
‘이 절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창건한 것으로 여러 번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절의 규모는 웅장하고 그 화려함은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다. 백성의 힘이 또한 이 절에 허비되었다 하겠다.’
드디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답사팀은 정규 탐방로인 토산골로 오른다. 하지만 정구는 다른 길로 유산을 한 듯하다. 홍류동과 해인사 학사대까지는 비슷한 코스였지만 이후부터는 달라진다. 그의 유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돌길이 험하였으므로 때로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했다. 내원사內院寺에 도착해 문밖에 있는 작은 비석을 보았다. 비석 앞에는 네모진 우물이 있다. 승려들이 이곳을 득검지得劍池의 고적이라 했다. 점필재佔畢齋, 한훤당寒暄堂, 탁영濯纓 등 여러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내원사가 어딘지 종잡을 수 없다. 토산골 탐방로는 가장 안전한 등산로를 공단에서 새로 조성했다. 정구의 유산로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행한 공단 이종희씨도 “유산록 코스는 지금 탐방로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아마 동쪽 오른쪽 능선 너머 골짜기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쪽 골짜기는 물도 많고 올라가는 중간에 약간의 공터가 있기 때문이다. 공단에서 몇 년 전 해인사의 협조를 얻어 유람록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 나섰으나 스님들조차 옛 절의 자취와 위치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구 일행은 내원사에서 스님의 안내로 하룻밤을 보낸다.
‘하늘 끝에 희미하게 산 하나가 보였다. 저것이 무슨 산이냐고 물었다. 승려는 “두류산입니다”라고 말했다. 밤이 깊을 무렵 절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달빛은 대낮처럼 환하고 산기운은 고요했다.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차가운 물소리는 은은히 들려온다. 이 황홀한 기분에 빠져 내 자신이 이미 속세 밖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정구는 가야산 내원사에서의 하룻밤을 이미 속세를 벗어난 상황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내심 최치원을 염두에 둔 것 아닌가 하는 상상이 펼쳐진다. 동행한 공단 직원에게 물었다. “가야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 두 사람 다 공통적으로 “해인사와 만물상”이라 했다. 그들의 답은 내가 상상한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공단 직원이라 가야산의 눈에 보이는 요소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해했다.
거처하는 승려 없는 암자도 여러 군데
정구 일행은 정각암에서 1리쯤 올라가 성불암成佛菴에 닿았다.
거처하는 승려도 없다. 마루와 방 안에는 먼지가 그득 쌓여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흉년인데다 부역이 많아 산 속의 승려도 생활하기 어려워져 곳곳이 비어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산속의 승려도 이러할진대 백성들의 생계와 사정이 어떠할지 알 만하다. 가난한 마을은 집만 덩그렇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의 인격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강 정구는 가야산을 유람하고 난 이듬해 관직에 입문한다. 그는 실제로 전쟁과 당파로 혼란스러운 조정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조금 올라가 원명사圓明寺에 도착했다. 이 절은 산봉우리가 빙 둘러싸고 있다. 이 절 외에도 중소리中蘇利와 총지叢持 등 사찰이 바위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든 기거하는 승려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소리上蘇利에 잠시 쉬었다. 이곳은 봉천대라 불리는 곳이다. 그 위치가 높아 시야는 한층 더 시원하게 트였다. 내려다보니 수많은 골짜기와 산봉우리가 마치 조그마한 둔덕처럼 빙 둘러 줄지어 있는 듯했다.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개미나 누에의 집처럼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켜 보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점심으로 흰죽을 끓여 먹고 길을 나섰다. 여기서부터 산길이 더욱 가팔라졌다. 가파른 산길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다.
‘일행이 물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앞사람은 뒷사람의 머리 위에 있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쳐다보며 가는 격이었다.’
이어 6, 7리쯤 가서 비로소 제일봉第一峯에 올랐다. 여기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소리암과 봉천대의 위치와 정상 제일봉에 대한 언급이다.
해인사 뒤쪽으로 수많은 절이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 단 한 군데도 없다. 간혹 평지에 부서진 기와가 그 자취를 대변할 뿐이다. 소리암도 마찬가지다. 소리암은 상소리, 중소리, 하소리 모두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가야산소리암중창기>에도 소리암 기록이 소개된다. 해인사 뒤편 선원과 신축된 승방 우측 계곡 구릉의 평탄지에 대략 30m×25m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정구는 정상 봉우리를 제일봉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조와 <증보문헌비고> 합천조에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 하며, 서쪽으로 뻗어 월류봉月留峯이 됐다’고 나온다. 또 <대동지지> 합천군조에는 ‘가야산은 야로冶爐에서 북쪽 30리 거리에 있다. 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지달산只怛山·우두산은 모두 이 산의 다른 이름이다. 월류봉은 산의 서쪽에 있고, 그 아래에 청량사가 있다. 취적봉·칠성봉·학사대·백운대·봉천대·치원대·첩석대·칠성대·자필암·완재암·회현암·낙화암·광풍뢰·음풍뢰·제월담·분옥폭포·홍류동·무릉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디에도 제일봉엔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면 정구가 왜 제일봉이라고 언급했을까. 지금 남산제일봉은 전혀 다른 봉우리다. 해인사에서 그쪽으로 가려면 코스가 전혀 다르다. 남산제일봉을 언급한 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이는 정구가 가야산 정상에 올랐는데, 옆에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지금의 칠불봉)가 있으니 그것을 제일봉이라고 한 것 아닌지 추정할 뿐이다. 지금은 위성 측정한 결과 실제 칠불봉이 3m 더 높게 나왔다고 공식 인정한다.
정구는 정상에서 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유감없이 즐긴다.
'산의 안팎은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흰 빛깔이 어지러이 깔려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늬마다 만물을 만든 하늘의 이치가 부여되어 있다. 애당초 누가 이렇게 되도록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지러울 정도로 빛과 색깔이 한데 어울려 서로 비췄다. 산을 유람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 주고, 도를 닦는 인자仁者에게는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구는 가야산의 풍광에 매우 감동한 듯 한참을 머무른다. 저물 무렵 소리암으로 내려와 밤을 보낸다. 험난한 등산과 무난한 하산을 빗대 ‘선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從善如登 從惡如崩)’는 격언을 되새기기도 한다.
정구의 하산코스는 등산코스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답사팀은 길의 흔적은 없지만 그들이 올라간 코스를 최대한 찾아 하산해 보기로 했다. 동선을 절이나 암자가 있을 만한 평지를 찾아 가기로 했다. 이는 보물 제264호 해인사 석조여래입상과 아직 검증되지 않은 두상이 잘린 비로자나불좌상, 그리고 보물 제222호인 치인리 마애불입상을 연결시키는 코스다.
석조여래입상을 보고난 뒤 바로자나불좌상으로 가는데 길 자체가 아예 없다. 너덜겅에 조릿대 군락이 무성한 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나오는 평지엔 어김없이 물이 있고, 그 옆에 기와조각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길이 너무 험해서 다시 등산로로 나왔다. 정규 등산로로 내려오다 서성재로 갈라지는 길에서 비법정 탐방로로 들어섰다. 마애불입상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이 코스에는 제법 물도 많고 절이 있을 만한 평지가 곳곳에 나왔다. 주변에는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한강은 소리암에서 밤을 보내며 다시 봉천대에 오르고 해인사로 하산하면서 유람을 마친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우선, 조선 선비들의 유산은 무슨 목적이었을까 라는 점이다. 신선이 된 최치원과 같이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연을 즐기기 위해서였을까.
둘째, 숙박을 절이나 암자에 했으면 당연히 지금 보물로 지정된 입상불을 봤을 텐데 왜 전혀 언급이 없을까. 유학자라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까지 외면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언급은 왜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구의 유산록은 유산기간이 긴 탓도 있지만 분량에 있어서 최대로 꼽힌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언급하면서 가야의 역사와 산신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전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가야산 산신
대가야· 금관가야 시조 낳은 정견모주가 촤정
'최치원의 <석이정전>(현존하지 않음)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하夷毗訶와 감응하여 대가야왕 뇌질주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시아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정견모주는 가야란 국가와 지명의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정견모주가 하늘신, 즉 천신 이비하를 만난 곳이 가야산 만물상 끝자락에 있는 ‘상아덤’이다. 상아는 여신을 일컫고, 덤은 바위를 가리킨다. 여신이 사는 바위란 말이다. 고대 건국신화는 ‘천신이 내려와 산신을 만나 왕을 낳아 나라를 세운다’는 그 구조 그대로 가야산에도 적용된다.
정견모주가 낳은 첫째 아들은 대가야의 시조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라는 것이다.
정견모주란 이름에서 우리 전통 샤머니즘과 불교의 습합과정을 엿볼 수 있다. 정견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하나로, 세상을 바로 보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모주는 성모에서 유래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따라서 원래 명칭은 정견성모 내지는 산신성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정견모주로 습합해서 정착했다고 본다.
그런데 한 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건국하는 일은 없다. 수많은 단계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씨족에서 부족, 나아가 국가로 발전한다. 가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서기>에 가야는 이서국으로 나온다. 여기서 정견모주와 만난 천신을 이비가지(이비하와 동일 인물)로 칭한다. 이비가지는 이히고로서 ‘이서국의 제사장’이란 의미다. 따라서 정견모주는 이서국의 후예로서 제정이 분리되지 않은 제사장과 동격의 인물로 볼 수 있다.
큰아들인 뇌질주일에서도 각색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가야 시조왕인 이진시아가 바로 뇌질주일이다. 여기서 뇌질은 노리들 또는 누리들을 의미한다. 노리와 누리는 고어로 ‘세상’을 뜻한다고 한다. 이진도 고어에서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한다. 특히 이진伊珍에서 ‘伊’는 위, ‘珍’은 들을 의미해, 뇌질주일이나 이진시아는 결국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야산은 신라가 통일 후 국행제로 지정한 대사·중사·소사 중에 전국의 지방 거점 역할을 한 소사 가랑악에 해당한다. 가야의 영토였으니 당연히 관리대상이었을 것이다. 기우제까지 지낸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명산으로 등재되어 국행제를 치렀으며, 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은 유지됐다.
해인사 경내 국사단에 정견모주와 두 아들의 산신도가 걸려 있다. 안내문에는 ‘국사대신은 인간 세상을 손바닥 보듯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돼 있다’고 소개한다.
합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이병생 소장은 “상아덤은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하를 만나 몸을 합하는 돌 모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며 “정견모주는 가야산 산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해인사 보호신으로도 자리매김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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