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cm 쪽지문이 푼 12년전 강릉 노파 피살사건 '비하인드 스토리'
검찰은 억울한 피의자 석방..경찰은 끊길진 수사로 진범 잡아
(강릉=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1㎝ 쪽지문(일부분만 남은 조각지문)'이 자칫 영구 미제로 남을 수 있었던 12년 전 강릉 70대 노파 피살 사건을 해결한 가운데 수사 초기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쓸 뻔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뒤늦게 알려졌다.
이 사건을 수사한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수사전담팀은 70대 노파 살인사건의 피의자 A(49·당시 37세)씨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A씨는 12년 전인 2005년 5월 13일 강릉시 구정면 덕현리 산골에 혼자 사는 피해자 B(여·당시 70세)씨의 집에 금품을 노리고 침입했다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 사건 초기 50대 여성의 '자백'…구속 전 검찰 면담서 '석방'
경찰은 수사 초기 피해자의 귀금속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강도살인으로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손과 발이 묶인 상태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얼굴에 포장용 테이프가 감겨있는 점 등으로 미뤄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경찰은 B씨 친인척과 마을 주민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당시 조사받은 마을 주민만 수십 명에 달했다. B씨 피살 사건으로 마을 주민 전체가 사실상 용의 선상에 올랐던 셈이다.
이 중 경찰은 마을 주민 C(여·당시 45세)씨를 주목했다.
C씨는 피살된 B씨에게 200여만원을 빌리는 등 채무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C씨는 범행 당일 행적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의심스러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용의 선상에 올라 참고인 신분 조사를 받은 C씨가 4차례나 무속인(여·당시 50세)을 찾아간 사실을 확인했다.
무속인이 경찰에 털어놓은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무속인은 경찰 조사에서 "노파 피살 사건을 얘기하던 C씨가 '범인이 언제 잡힐 것 같으냐'고 물으면서 불안에 떨며 '살려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한 달여만인 2005년 6월 14일 C씨를 소환해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C씨는 '노파를 살해했다'고 순순히 자백했다. C씨의 자백을 받아낸 경찰은 긴급체포 후 이튿날 구속 영장을 검찰에 신청했다.
산골 마을 주민 서로를 의심하게 했던 사건은 이렇게 한 달여 만에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검찰에 넘겨진 C씨는 당시 춘천지검 강릉지청 김완규(47·현 창원지검 형사2부장) 검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태도를 180도 바꿨다.
구속 영장 청구 여부 결정에 앞서 C씨를 면담한 김 검사는 '청소기로 피해자 얼굴 등을 때려죽였다'고 C씨가 자백한 범행 도구에서 타격 흔적이 없는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를 추궁하자 C씨는 "점쟁이가 '죽은 노파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하고, 경찰도 나를 범인으로 의심하면서 추궁해 자백은 했는데, 사실은 피해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결국, C씨의 자백은 거짓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C씨를 석방한 상태에서 6차례 더 조사했으나 C씨는 혐의를 계속 부인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진실 반응이 거듭되자 C씨에 대한 수사는 2007년 4월 중단됐다.
이후 강릉 70대 노파 피살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모든 사건 기록은 경찰서 캐비닛 속에서 먼지만 쌓인 채 시간만 흘러갔다.
◇ 유일한 단서 1㎝ 길이의 쪽지문…끈질긴 수사로 12년 미제 해결
유일한 단서는 B씨의 얼굴을 감는 데 사용한 포장용 테이프에 흐릿하게 남은 1㎝ 길이의 쪽지문이 전부였다.
이후 미제사건수사전담팀은 2012년 8월과 2015년 5월 지문 대조 작업을 했지만 일치 지문을 찾지 못했다.
'융선(지문을 이루는 곡선)'이 뚜렷하지 않아 당시 지문 감식 기술로는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재감정을 의뢰한 지문과 관련 지난 7월 경찰청에서 뜻밖의 감정 결과가 날아왔다.
유사한 지문 3천여 개를 비교한 결과 12년 전 강릉 노파 피살 현장에서 나온 쪽지문과 피의자 A씨의 지문이 일치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재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A씨가 과거에도 유사한 수법의 강도 범행 전력이 있다는 점과 주변인 조사를 통해 A씨의 범행 당일 알리바이가 거짓이었던 것을 밝혀냈다.
또 세 차례 거짓말 탐지기를 시행한 결과 모두 '거짓' 반응이 나온 것도 확인했다.
경찰은 "과학수사 기법이 발달해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으로 쪽지문의 주인인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다"며 "이를 토대로 한 재수사로 사건 발생 12년 만에 A씨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경찰은 C씨에 대한 무혐의 처분 의견서를 A씨의 구속 기소 의견과 함께 검찰에 송치했다.
C씨는 검찰 면담 과정에서 억울한 점이 확인돼 12년 전 석방됐지만, A씨가 검거되기 전까지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1㎝의 쪽지문은 12년 전 범인 검거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쓸 뻔한 C씨의 혐의를 벗게 해준 결정적 증거가 된 셈이다.
이 사건 피의자 A씨는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검찰은 17일 "12년 전 당시 C씨의 자백이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경찰도 구속 영장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구속 전 피의자 면담제도를 통해 범죄 혐의가 없는 억울한 피의자를 석방한 사례로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A씨가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있어 구속 기간을 연장해 수사 후 재판에 넘길 계획"이라며 "피의자를 직접 면담하는 구속 전 피의자 면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고 덧붙였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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