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칼럼 | 곽정혜의 <선택>에 대한 소고] '왜 산에 가느냐'의 대답은 '보여 줌'

오영훈 월간산 기획위원, 서울대 농생과학대산악회 회원 2017. 8. 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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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혜의 <선택> 과 나의 '선택'은 모두 인간애의 실현

세계 5위봉 로체 마지막 캠프까지 올랐다. 산소통을 쓰지 않고 왔지만 피곤한 느낌은 없다. 몇 시간 뒤 날이 저물면 정상을 향해 출발이다. 오래 준비한 ‘무산소 등정’이 곧 현실이 된다. 그때 바로 옆 에베레스트를 오르던 팀으로부터 무전이 날아들었다.

[월간산]2016년 7월 출간된 곽정혜씨의 <선택>. 2006년 에베레스트의 사고기록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다.

“미스터 서가 힘들어해요…. 구조가 필요합니다.”

서성호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고 내려오는 셰르파였다. 34세에 불과한 서성호는 8,000m 14좌 중 12개를 올랐고, 이제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참이다.

베이스캠프의 셰르파 리더에게 상황을 의논했다. 걱정 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베레스트 마지막 캠프 사우스콜에 언제라도 구조에 나설 수 있는 셰르파들이 있다는 설명이다. 함께 있던 다른 팀 셰르파도 걱정 말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무언지 모를 불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너무도 분명한 마음 속 덩어리가 나를 잡아끌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로체 등반에 동행한 영국인 등반가는 그런 내게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서성호와 함께 그날 밤늦게 사우스콜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이게 나의 ‘선택’ 때문인가? 로체를 무사히 오른 그 영국인 친구는 사흘 뒤 베이스캠프에서 나를 찾아오더니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과연 그럴까.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동료를 구하려 했었나? 아니다. 원정대의 계획 속에 원래 구조가 포함돼 있었다. 다른 대원들이 에베레스트로 갈 때 나는 하루 늦게 로체를 향하기로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월 21일은 사우스콜에 도착해 깊은 잠에 빠진 서성호가 깨어나지 않은 지 4년째 된 날이다. 캠프로 내려온 서성호는 ‘무산소’를 유지하기 위해 산소통을 사용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쳤다. 그러나 그날 오후 성호는 이미 산소 부족과 탈진으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기도 했다. 그때 억지로라도 산소를 마시게 했으면…. 이런 생각도 해보지만 누가 다가오는 죽음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곽정혜의 <선택>은 위 필자의 경험과 꽤 비슷한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뿐 아니라 한층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산에 가는가, 왜 동료를 구하는가, 왜 내가 살려고 남을 밀어 내는가 따위 ‘왜’를 묻는다. 저자의 대답은 은유적이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질문들에 답하지 못했는지’를 보여 준다.

[월간산]2006년 봄 하산길 사우스콜 부근에 쓰러져 있는 곽정혜씨를 중동고 원정대가 베이스캠프로 구조하고 있다.

대학교 산악부 동아리를 통해 히말라야를 오르게 되고, 고산을 오르는 과정 속에 가족, 동료, 타인들과의 관계가 책의 핵심을 이룬다. ‘세계 최고봉 등반과 삶과 죽음’이란 소재는 일반인들에겐 자극적이지만 저자는 <버티컬 리미트> 같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인간애와 사랑을, <히말라야> 같은 낭만적인 영웅이야기가 아니라 소시민의 평범한 마음속 갈등을 나누고 싶어 한다.

최 대원의 ‘선택’은 모두 공감하는 합리적 판단

<선택>이 ‘Daum 스토리펀딩’을 통해 처음 연재될 때 네티즌의 반응은 상극을 이뤘다. 인간애와 삶에의 희망은 저자의 깨달음이자 간결한 문체로 쉽게 읽혔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체 왜 가느냐’고 사람들은 따져 물었다. 대답해 줄 말이 없으니 쉽게 비난조로 흘렀다. 누군가에겐 또 한 번의 상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왜 순간순간에 좀더 신중하지 못했는지…. 갖은 이유들을 끌어다가 탓해 보았지만, 그러기엔 나의 실수가 너무나 컸다. 그렇다고 그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기엔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다.

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것을 저자는 반복해 그려낸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서 월급 많이 받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꿈꾸던 철부지 신입생이 산악부에 들었다. 경험도 부족한데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오던 도중 탈진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던 대장을 놔두고 혼자 내려오게 되었다. 왜?

선택의 이유를 묻는 저자 앞에 선택의 확신을 보여 주는 이들이 등장한다. 탈진과 추락으로 의식을 잃은 저자를 우연히 발견해 소생시키고자 에베레스트 정상을 포기하며 중동고OB산악회 대원들은 이런 판단을 내린다.

‘나와 재우의 산소마스크를 번갈아 채워 주며 구조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명호 형과 셰르파들이 언쟁을 하고 있었다. 명호 형이 나에게 등반을 할 건지 물어왔다. 지금 재우는 곽 대원의 응급상황에 흥분된 상태로 감정이 격앙된 것 같았고, 이런 상태로 둘을 남겨놓을 수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형, 지금 올라가면 살면서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아.”

재우와 나는 구조를 위해 그곳에 남기로 하고, 이명호 대원은 락파 셰르파와 함께 23시에 다시 정상 공격을 시작했다’. (최인수의 일기)

[월간산]2006년 봄 한국 여성으로선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곽정혜씨.

이를 읽는 우리는 그 결정이 사람을 구했다고 박수를 보내지만 실상 저 세 산악인 어느 누구도 특출한 선의를 보여 준 건 아니다. 급박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평생 후회’할 일을 막기 위해 최 대원은 ‘많은 생각’ 끝에 결정을 내린다. 최 대원의 ‘선택’은 이명호 대원, ‘재우’ 셋 모두 공감하는 합리적 판단이었다.

저자는 ‘누구나 선택을 할 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은 함부로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저자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왜’라는 질문에 대해 마침내 택한 대답은 ‘보여 줌’이다. 그러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남편에게, 딸에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찾아낸 길이다. 사고 뒤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의 인공등반 교육과정을 동상으로 입은 손가락 장애에 대한 어떤 특혜도 없이 마치고 나서 저자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의 못난 열등감이었음을. 이젠 스스로의 족쇄를 벗고 조금 더 당당하게 세상을, 그리고 산을 다시 마주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은 역작이지만 절반의 성공이다. 역작인 까닭은 저자의 사고경험과 10년의 고민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성공이라 보기 어려운 까닭은,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선택’에의 반추가 산山 사람의 정서라는 걸 감지하면서도 저 성급한 네티즌처럼 이를 외면하고 ‘왜 산에 가는지’를 되묻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우리와는 다른 영웅으로 그려내고픈 충동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애의 살아 숨 쉬는 심벌

저자는 아직 자신이 없다. 윤치원, 박행수, 박영석, 강기석, 김형일, 고미영이 하나둘 스러져가는데 보잘 것 없는 자신은 살아 있음에 아파한다.

‘나는 아직도 어리고, 여전히 많은 실수를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빚을 진 채 살고 있다. 여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 빚을 다 갚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빛으로나마 세상에 되갚기 위해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담아내려 끝없이 노력할 것이다.’

[월간산]2012년 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필자 오영훈씨.

우리 모두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어떤 열쇠가 있지 않을까. 저자도, 중동고 대원도, 갈등을 빚은 대장도, 비합리적인 산악부 선배도, 딸을 잘 지원해 주지 못했던 부모님도. 산소를 끝내 쓰지 않기로 결정한 서성호와 이를 허용한 우리 팀원들도, 모두 서로에게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의지함으로써 각자의 부족한 선택을 감싸 주는 것 아닌가.

따라서 정상을 포기하고 구조를 선택한 중동고 원정대의 일화는 영웅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아직도 고동치는 인간애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저자는 인간애의 살아 숨 쉬는 심벌이다. 21세기 한국에서 ‘인간애’를 소설이 아닌 실화, 허구가 아닌 진실, 영화가 아닌 일상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 산악인 말고 누가 있나?

그의 뭉툭한 손을 사랑한다는 남편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없어진 마디들은 끊임없이 되묻지만?아줌마 손이 왜 그래요??대답은 이 책처럼, 어딘지 미완으로 부족하기만 한 우리의 손을 서로에게 내미는 것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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