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흰 소나무는 보았다, 주인 잃은 집터와 나라를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2017. 8. 2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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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재동 헌법재판소의 비밀과 경술국치(庚戌國恥)
헌법재판소가 있는 서울 재동 83번지.. 구한말 역사의 소용돌이 휩쓸고 간 무대
개혁파 박지원과 박규수.. 제자들과 함께 새 세상 설계한 곳
개혁의 좌절과 함께 혁명가들의 피 뿌려.. 친일파 이완용 형제 차지
궁궐 동·서쪽 가회동과 옥인동은 모조리 친일파 손으로
헌법재판소 흰 소나무는 그 모든 것을 목격
다음 주가 경술국치 107주년

재동에 사는 늙은이

18세기 후반, 서울 재동에는 덩치 큰 늙은이가 살았다. 붉은 얼굴에 구레나룻이 듬성듬성했고 귀밑까지 광대뼈가 뻗었는데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입을 열면, 그 목소리가 수십보 떨어진 담장 밖까지 들렸다. 사내는 글을 잘 썼다. 붓을 들면 책이 출판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필사해서 돌려보고 흉내를 낼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때 임금인 정조가 이리 말한다. "요즈음 문풍이 이리 된 것은 모두 박아무개(朴某)의 죄다.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세상 문체가 이리 되었다." - 박종채, 〈과정록〉 열하일기는 사내가 청나라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고, 사내 이름은 연암 박지원이다. 정작 과거시험에 들어서는 답안지에 그림을 왕창 그려놓고 나오는 기행도 했다. 하여 벼슬은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생각하는 바가 남달랐다.

백탑파와 18세기 조선

그 글 잘 쓰는 박지원이 젊을 적부터 집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대표적이다. 집에서 원각사 십층석탑이 보인다 해서 이들을 백탑파(白塔派)라 불렀다. 공통점이 있다. 오랑캐, 혹은 되놈이라 불렀던 북쪽 청나라에서 대오각성을 하고 나라를 개혁하려는 의지. 성리학과 허영에 절어 망가지고 있는 나라를 오랑캐가 습득한 신문물로 고치겠다는 말이다. 이들을 북학파(北學派)라 부른다.

그때 나라는 이랬다. '조선인은 너무 가난해서 비싼 서양 상품을 살 수도 없었다. 무기, 총, 가구, 포도주와 술은 너무 비싸서 독한 술로 조선 민중을 타락시킬 개연성이 없었다.'- 윌리엄 길모어,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문소영, '못난 조선' 재인용)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조선은 반드시 검소함 탓에 쇠퇴할 것이다. 물건이 없어 쓰지 못하면서 검소함이라고 한다.' - 박제가, 〈북학의〉

서울 종로 헌법재판소에는 오래된 백송이 있다. 백송 주변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구한말 개화파가 이곳에서 태동하기도 했고 나라를 팔아먹는 모리배들이 이 땅을 밟기도 했다. /박종인 기자

북학파가 내건 기치는 이랬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만들라. 서양은 물론이거니와 되놈도 왜놈도 부국강병으로 치닫는데 조선만 상거지 꼴이니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1800년 북학파 주장을 인정했던 정조가 급사했다. 이후 북학파는 돌연변이 정도 취급받았다. 박지원은 1805년 재동에서 죽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회고했다. "선친 문집을 발간하려다가 내용에 놀라 준비를 멈춰버렸다." 당대에 공개하기에는 북학파의 주장이 불온했다는 뜻이다.

재동에서 태어난 젊은이

박지원이 죽고 2년 뒤 재동 집에서 손자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를 닮은 이 아이 이름은 박규수다. 재능이 격세로 유전돼, 박규수 또한 문재(文才)와 세계관이 남달랐다. 박규수 또한 재동 주변에 살던 야심 찬 양반 자제들을 불러 세상을 가르쳤다.

그 자제들 가운데 유길준을 받아준 인연은 특이했다. 조부 박지원과 유길준 고조부 유한준은 집안 묘지 이장 문제로 다투다 '백세의 원수'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며 원수 집안이 되었다. 그런데 1871년 그가 홍문관 대제학 시절, 장원급제한 답안을 보니 작가가 유길준이 아닌가. 양가에서 "원수를 어찌!" 하는데,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이리 말했다. "어른들이 풀지 못했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린다." 둘은 목숨을 건 사제지간이 되었다.

손자 사랑방에서 오간 메시지는 조부 세대 때와 동일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단재 신채호는 이들의 대화를 '지동설의 효력'이라는 수필로 이렇게 묘사했다.

박규수가 벽장에서 지구본을 꺼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본을 한 번 돌리고선 가로되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개화를 주장하던 김옥균도 그때까지 중국을 높이는 것이 옳다 하는 사상에 속박되어 국가 독립을 부를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가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박규수의 지구 돌림에 김옥균의 손바닥이 울려 혼(魂)이 돌았다. - 신채호, 〈지동설의 효력〉

신채호가 한 줄 덧붙였다.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

북학파가 개혁을 논하던 집, 그리고 손자 박규수가 옆집 사는 홍영식과 재동 골짜기 아래 살던 김옥균, 박영효와 서광범, 유길준과 함께 개화를 꿈꾸던, 커다란 백송(白松)이 서 있는 그 집터가 지금 서울 종로구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 자리다.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이 응축돼 있는 공간이다.

개화파의 요람 재동

역관 오경석과 한약사 유홍기, 대감 박규수를 개화파 3인방이라 한다. 선배인 북학파 멤버는 재야 학자와 불우한 서자, 중인 출신이었다. 개화파에는 박규수라는 고관대작이 있었다.

1866년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대동강에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 눈에 들었다. 박규수는 3년 뒤 서울 시장인 한성부 판윤과 형조판서에 겸직 임명됐다. 개화파 거물이 권력 한가운데에 진입했다. 역관과 한약사와 고관대작은 흰 소나무 아래 모여 신천지를 설계했다.

경복궁 동쪽 골짜기 아래 북촌마을 양반 자제들에게 이들은 세상을 가르쳤다. 선배 북학파가 좌절했던 이유, 불우한 권력 주변부 인사라는 약점이 이들에겐 없었다. 제자들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꿈꿨다.

그런데 재동 박규수를 찾아온 사람은 혁명가뿐 아니었다. 그리고 숱한 방문객 가운데 한 사람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달리 굴러갔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 이름은 이영(1809~1830). 조선 23대 국왕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다.

박규수와 효명세자

효명세자와 박규수가 교류했던 창덕궁 요금문.

1825년 음력 5월 6일 할머니 수빈 박씨 사당인 경우궁에 효명세자가 참배했다.(순조실록)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작은 집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리고 그날 효명세자가 재동 박규수 집을 찾았다. 걸어서 10분 거리다. 박규수는 열여덟 살이었고 세자는 열여섯 살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명성과 세계관을 알고 있던 그 세자가 그 가문을 찾은 것이다. 두 사람은 삼경(밤 11시~새벽 1시)까지 대화를 나눴고 이후 박규수는 궁궐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이로 발전했다.

박규수의 아버지 박종채는 이렇게 기록했다. '기축년(1829년) 세자가 아버지(박지원)가 남긴 글을 올리라 분부했다. 훗날 반환된 책을 보니 책마다 접어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강구한 대목 중 자기 생각과 부합하는 게 있으면 표시를 해둔 것이다.'(과정록)

아버지 순조 뒤를 이어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였다. 지식인과 관료 모두가 대환영했던 미래의 개혁군주였다. 세상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대였고 나라는 가난했다. 그런데 이듬해 세자가 스물한 살에 죽었다. 세자와 함께 개혁을 벼르던 박규수는 '환재'라는 자기 호의 앞글자를 굳셀 환(桓)에서 재갈 환(瓛)으로 바꿔버리고 20년 칩거에 들어갔다. 그 사이 순조가 죽고 일곱 살짜리 왕 헌종이 등극하고 허수아비 같은 철종이 왕이 되고 조선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역주행해갔다.

세자와 개혁사상가가 교류하던 후원 문은 요금문(曜金門)이다. 일제강점기 이리저리 찢겨나간 창덕궁 서쪽 담장에 숨어 있다. 굳게 닫혀 있다.

재동 83번지의 운명

그리 되었다. 좌절한 박규수가 죽고 8년 뒤 제자들은 급진 혁명을 일으켰다. 1884년 갑신정변이다. 3일 천하로 혁명은 끝났다. 김옥균은 망명 생활 끝에 암살됐다. 홍영식은 처형돼 시신이 갈가리 찢겼다. 나머지도 모두 해외로 달아났다.

홍영식 집안은 아버지 명에 의해 독약을 먹고 집단자살했다. 피칠갑으로 방치됐던 홍영식 집에는 이듬해 미국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의 요청으로 제중원이라는 병원이 들어섰다. 역시 헌법재판소 부지 안쪽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박규수의 집은 역시 개혁파 인사로 훗날 독립협회 초대 회장이 된 안경수에게 넘어갔다. 안경수는 고종 부부를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다 미수에 그치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1900년 돌아온 안경수는 평리원 재판장 이유인에 의해 고문으로 죽었다. 이유인은 고종과 민비에게 빌붙어 국정을 농락하던 무당 진령군의 수양아들이다. 박규수 집은 당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넘어갔다. 이윤용은, 이완용의 형이다. - 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이후 재동 83번지는 병원이 들어서고, 여학교가 들어서고, 이제 국민의 법률 중병을 수술하는 헌법재판소가 되었다. 그 사이 흰 소나무는 망국과 전쟁과 해방과 나라의 부활을 모두 목격하며 저리 늙어버렸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박규수 집을 둘러싼 동네는 가회동이다. 일부만 언급해 본다. 가회동 1번지는 극악무도한 친일파 민영휘와 변절한 혁명가 박영효가 차지했다. 2519평이다. 두 사람은 일본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이다. 가회동 산1번지 임야도 두 사람 차지였다. 3만3500평이다. 10번지 3163평과 26번지 2708평 대지는 이완용 졸개 한창수, 31번지 5447평은 민대식이 가져갔다. 민영휘의 아들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 이 세 글자를 두고 이완용의 글씨라는 주장이 많다.

경복궁 서편 옥인동 산 2번지 임야 1만평은 윤덕영이 가졌다. 역시 친일파다. 자그마치 1만3평짜리 47번지 땅도 가졌다. 2번지 대지 646평은 이완용이 가졌다. 이완용은 19번지 2817평 땅도 차지했다. 두 필지 모두 네모반듯한 대지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애국청년 이재명이 명동에서 이완용을 칼로 열세 번 찔렀다. 두 군데만 결정타였다. 일본인 의사의 정성어린 수술 끝에 죽다 살아난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옥인동 19번지 저택에서 죽었다.

옥인동에서 사직동 건너에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웠다. 협회장은 안경수였다. 2대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게재돼 있다. "독립문 현판 글씨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세상은 북학파와 개화파 설계대로 굴러왔는가. 다음 주 화요일이 경술국치 107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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