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우리의 '러시'를 말릴 수 없었다

2017. 8. 2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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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나의 스타크래프트 청춘사
교실이란 맵을 떠나 만난 자유
우리는 모두 '스타'에 넘어갔다
나는 스타에 소질이 없었지만
나의 '마린'들은 "고고"를 외쳤다

스타는 친구, 취미, 직업이 됐고
스타처럼 세상엔 쉬운 게 없었다
그렇게 20년..새 버전이 나왔으니
PC방으로 가야겠다, 추억을 만나러

[한겨레]

대통령 선거 날에는 오랜만에 피시방에 갔다. 담배 연기 속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신나게 지고 있었다. 이제 스타크래프트라는 걸 쉽게 이길 수가 없구나.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공식 출시(베타 버전은 1997년 공개)된 스타크래프트는 한국 게임 시장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450만장 이상이 팔렸고 그 열풍에 힘입어 이(e)스포츠가 탄생해 성장했다. 피시방은 10~20대들의 놀이터가 됐다. 개발사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 출시 20년을 기념해 지난 15일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버전을 국내에 정식 출시했다. 서효인 시인이 ‘스타’와 함께 보낸 청춘을 추억했다.

1999년

밀레니엄이라는 환호와 설렘도 와이투케이(Y2K)라는 불안과 강박도 고3에게는 사치였을지 모른다. 나는 지방의 한 사립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입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파나소닉 시디(CD)플레이어에는 당시 여자 솔로 아이돌이었던 양파의 3집 앨범 ‘아디오’(ADDIO)가 무한히 반복되었고, 나는 어서 이 지겨운 고등학교 생활과 ‘아디오스’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직 입시를 위한 학교와 기숙사에서 구타는 일상적이었다. 어떤 친구는 이정현의 데뷔 앨범에서 ‘바꿔’를 무척 즐겨 들었는데, 대체로 바뀌는 건 없었다. 예체능 수업은 대부분 자율학습으로 대체되었다. 영어 선생인 이비에스(EBS) 강의를 틀어놓고, 교실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어떤 녀석은 쉬는 시간마다 시티폰이 터지는 곳을 찾아 헤맸다. 몇 번의 모의고사가 있었고, 수능 시험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춘을 걸고 공부에만 전념하기엔 기숙사의 주말은 너무나 길었다. 우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사감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석방에 몰려가 쇠창살이 없는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작전이었다. 2층이라고 해도 꽤 높았기에 우리는 각자의 청바지를 연결해 무슨 소방대원이나 특수부대 요원처럼 지상으로 낙하했다. 물론 운동신경이 없어 중간에 추락하는 몇몇도 있었지만, 그것이 대수인가. 우리 모두는 열아홉 살, 뼈가 잘 붙을 나이였다.

무엇을 위해서였느냐고? 당연하지 않나. 대한민국 문화사에 길이 남을 게임,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이하 ‘스타’)를 하기 위해서였다. 유행에 민감하고 손이 빠른 친구들은 이미 세 종족의 특성과 상성(相性)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자율학습에 빠졌다고 기합을 받고, 기숙사를 탈출했다고 줄빠따를 맞기도 했지만, 우주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10대 소년들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 스타크래프트를 접했을 때는 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당시만 해도 피시(PC) 게임보다는 비디오 게임이나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에 더 익숙했으니, ‘더 킹 오브 파이터즈’와 ‘파이널 판타지’의 세계에서 스타의 세계로 넘어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쉽게 넘어왔다. 스타의 세계에서는 이기든 지든 맵의 주인은 나였다. 발전의 방향을 정하고 그에 따라 건물을 올리고 병력을 생산할 수 있었다. 전투 방법도 결국 마우스를 쥔 나의 선택에 따라 갈렸다. 그에 따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이른바 ‘지지’(GG)를 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판. 또 한판. 앞서와 같은 판은 벌어지지 않았으며, 작은 선택과 실수, 우연과 필연에 따라 게임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교실이라는 맵에 갇혀 있던 우리는 스타의 맵 안에서 일종의 자유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자유를 즐기고는 다시 학교에 돌아와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누구도 우리의 ‘러시’를 말릴 수는 없었다.

1998년(한국엔 1999년) 출시된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의 확장판 브루드워. 한국에서만 300만장 이상 팔렸고 스타크래프트가 1020의 문화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내 주변에 스타크래프트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모님뿐이었다. 동시에 국가대표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군대를 가기 전 마지막 학기였으므로, 나는 열심히 부모님을 멀리하고 친구들을 가까이하며 술과 당구 그리고 스타에 매진했다. 사귀던 여자친구에게는 곧 군대를 가야 하니까 헤어져야 한다며 먼저 선수를 쳐놓고 며칠 뒤 후회하며 매달렸다.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는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으로 동네 친구들과 ‘피시방’ 정액권을 끊고 낮과 밤을 바꾼 생활에 돌입했다.

군대에 대한 젊은 남자의 정서는 대부분 엇비슷할 것이다. 가기는 싫은데 가야만 하는 곳. 나는 정말이지 군대 체질은 아닌 것만 같았고, 이제 스물한 살인데 군대에 끌려가야 하다니, 조국의 분단 현실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입대를 앞두고 더욱 맹렬하게 잡은 마우스는 ‘테란’의 병사 ‘마린’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유닛들은 딸깍거리는 내 명령에 따라 ‘고고’를 외치며 줄지어 간다. 그리고 대부분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즈음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스타에 소질이 없었다.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스타는 국민 스포츠 비슷한 위치에 올라섰다. 게임 대회는 물론 대회를 중계하는 방송까지 생겼다. 일반 게이머들도 전세계 서버를 돌아다니며 해외 유저들을 박살냈고, 컨트롤과 운영, 전력과 전술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었다. ‘헌터’ 맵에서 3:3 게임을 주로 했는데, 내 역할은 주로 견디고 버티는 것이었다. 게임을 명민하게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종족은 꼭 테란을 골랐는데, 이유는 그저 유닛들이 정감 있게 예쁘다는 것이었다. 주로 공대에 다니던 친구들은 나의 선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저글링’이나 ‘질럿’으로 초반 나를 보호하면서 빽빽 소리를 질렀다. 일꾼을 저리 빼라, 벙커 위치가 거기가 아니다, 병력을 더 뽑아라, 너는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냥 안 하면 안 되냐. 그냥 지지 치고 나가라…. 확실히 나는 한국인치고는 스타크래프트 실력이 젬병이었다. 키보드 뒤에 컵라면이 불어터지고 있었다.

실제로 먼저 게임에서 아웃되어(보통 ‘얼리’라고 했었다) 맵 바깥으로 나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2:3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겨 보려 애썼고, 나는 그런 거 알 게 뭐냐 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인터넷 서핑에 주력했다. 가수 유승준은 군대를 기피하여 한국에서 활동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입국 자체가 불허되었다. 또 다른 가수 문희준은 몇몇 발언과 무대가 부당하게 패러디되어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아이디(ID)와 닉네임이라는 익명 뒤에 숨어 이죽거리고 낄낄거리고 분노하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했다. 친구들은 상대방 유저에게 욕을 하고 나는 인터넷 화면을 채운 누군가에게 욕을 했다. 무언가 불안했던 것 같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데, 그것이 무언지 잘 몰랐다. 스타에서는 ‘맵핵’을 켜지 않는 이상 맵 전체가 공개되지 않는다. 내가 진출한 지역만 보일 뿐이다. 즉 상대방이 어떤 전략으로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잠깐의 정찰로 정보를 모아 추측해야 한다. 2002년의 우리는 방향 모를 흥분감이 그득한 상태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정보 없이 아무렇게나 ‘테크트리’를 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윽고 그해 봄 나는 결국 입대했고 월드컵 4강 신화는 이등병의 신분으로 숨죽여 보아야만 했다.

‘엄전김’ 시대를 이끌었던 스타크래프트 중계진. 오른쪽부터 엄재경 해설위원, 전용준 캐스터, 김태형 해설위원. <한겨레> 자료사진

2007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내 인생의 테크트리는 처음부터 잘못 올라간 게 아닐까. 이 험악한 세상과 상성이 안 맞는 게 아닐까. 더 이상 우주 전쟁에서 이겨 보겠다며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할 일이 아주 많이 생겼다. 어떤 친구는 공무원 학원에 등록했다. 독서대와 전자사전, 방석과 보온병을 들고 독서실에 틀어박혔다. 다른 친구는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연달아 떨어지고선 노량진에 자취방을 얻었다. 또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로 하던 학원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오후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했다. 친구의 친구는 번듯한 데 취직했다더니 종적을 감췄다. 다단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녀석은 막연하게 공부를 더 해 보겠다며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내 이야기다.

당시 스타는 텔레비전으로 많이 보았다. 야구 중계보다 ‘온게임넷’에서 하는 스타리그 중계가 훨씬 흥미롭던 시절이었다. 유닛 컨트롤이고 병력 생산이고 다 엉망인 곰손 테란 유저지만, 프로게이머들의 플레이는 좋아했다. 역시 주 종족을 테란으로 하는 플레이어를 응원했는데,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 그리고 이영호까지 주요한 게임은 재방송이라도 챙겨 보았다. 스타 방송에서 파생된 각종 유행어가 있었고 해설자마저도 스타가 되었다. 나는 대학원에 간답시고 책을 펴놓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소파에 벌러덩 누워 텔레비전을 켜곤 했다. 영국에서는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되어 골맛을 보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데뷔했다. 친구들은 어쨌든 여기저기에 취직을 하거나 본격적으로 취직 준비를 시작했다. 후자가 월등히 많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화려한 플레이는 이 세계에는 없었다.

대통령 선거 날에는 오랜만에 피시방에 갔다. 선거권을 시원하게 포기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쩐지 뻔히 보이는 결말에 김이 빠졌지만 그럼에도 동네 초등학교에 들러 한 표를 행사하긴 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인 피시방에 갔더니 담배 연기 속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신나게 지고 있었다. 이제 스타크래프트라는 걸 쉽게 이길 수가 없구나.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 깨달으면서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렸다. 이명박 후보가 엄청나게 큰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우리는 사회의 ‘에스시브이’(SCV)가 되기 위해, 저녁에 간단히 소주 한잔 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스타는 몰라도 임요환은 안다는 말이 있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테란의 황제’ 프로게이머 임요환. <한겨레> 자료사진

2017년

혹자는 스타가 바둑이나 장기와 같은 전통적인 게임이 될 것이라 했다. 정녕 그렇다면 마린이나 질럿을, 드라군이나 뮤탈리스크를 수천년 뒤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이,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추억이 추억으로서 아름다운 것은 추억이 지닌 일종의 아련함 때문이다. 얼마 시간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스타크래프트의 화면을 기억하면 조금 아련해진다. 스타는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의 취미가 되었고 친구가 되었고 심지어 직업이 되었다. 아련하지 않다면, 그것이 추억이지 않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런 아련함을 아는지 개발사에서 오랜만에 업데이트 버전의 스타크래프트를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우리가 알던 유닛과 상성과 조작법은 그대로 둔 채, 2017년의 그래픽과 호환성을 덧붙였다니, 추억을 되새길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잘했던 놈 못했던 인간 모두 모여 진검승부를 펼칠 만하다. 나는 역시나 못할 것만 같지만, 뭐 어떤가. 시간은 흘렀고, 친구가 다시 찾아왔는데. 가자 피시방으로, 고, 고.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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