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주와, 노동과, 이산으로 지탱되는 '우리'

2017. 8. 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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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후텁지근한 여름 새벽 한 남자가 증발했다. 고향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여름휴가)에 오르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엔 지갑과 돈, 여권, 외국인등록증, 휴대전화 등이 고스란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자신을 증명하며, 의사를 소통할 모든 것을 두고 남자는 실종됐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 수사도 그를 찾아내지 못했고, 그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내와 찍은 사진 속 빛바랜 얼굴(사진)이 주인 없는 지갑 속에서 낡아갔다. 그렇게 8월16일 만 1년이 찼다. <한겨레> 토요판이 로델 아길라 마날로(35)의 길을 따라갔다. 그 길은 로델의 실종 장소에서 출발해, 그가 한국에서 밟은 땅들을 거쳐, 그를 한국으로 보낸 고향 마을에 이르렀다. 로델은 필리핀 이주노동자였다. 이 글은 실종자 로델의 행방을 좇는 추적기이자, 한국의 꼭짓점을 쌓기 위해 한국의 밑변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을 찾아 지구를 횡단해 온 노동자들의 여정이며, 더 많은 일을 찾아 한국을 종단하는 삶들의 행로다. ‘가득 찬 곳에서 텅 빈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 이 세계의 신앙이었다. 자본이 부유에서 빈곤으로 흐를 때에도 노동은 가난에서 풍요로 흘렀다. 로델은 흐르는 사람이었다.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는 로델의 길 위에 그의 이주와, 노동과, 이산으로 지탱되는 ‘우리’가 있었다. 이제, 로델을, 우리를 만나러 간다. 글·사진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로델의 실종

<한겨레>가 한 남자를 찾아 떠났습니다. 1년 전 실종(2016년 8월16일)된 필리핀 이주노동자입니다. 바탕가스 파드레 가르시아에서 일을 찾아 2626.48㎞를 날아온 한국 땅에서 그는 자신을 입증할 것들을 모두 남겨둔 채 증발했습니다. 의도적 이탈이란 의심과 그럴 수 없는 정황 속에서 실종 1년이 꽉 찼습니다. 남편을 찾아 입국하려던 필리핀의 아내는 한국행 비자가 거부당해 1년을 울었습니다. 강과 산을 헤치며 그를 찾아다녔던 한국의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는 그를 포기하지 못해 1년을 절망했습니다. 그의 길을 되짚는 과정에서 만난 것은 그가 아니면서 그였습니다.

2016년 8월16일 새벽 로델이 잠을 자다 사라진 장소. 친구 글렌의 기숙사는 침대 하나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컨테이너 박스였다. 글렌의 침대 오른쪽과 컨테이너 벽 사이에 성인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공간에서 로델은 끼어 잤다. 이문영 기자

“저기, 요.”

델리아(가명·46·여·필리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기’엔 작고 좁은 수로가 있었다. 논과 논 사이에 시멘트를 발라 만든 사각의 통로에선 이름답게 오직 물만 흘렀다.

“저기, 도, 요.”

그의 서툰 한국말이 다리 밑을 지목했다.

저기, 수풀. 저기, 창고. 저기, 저기….

7월25일 델리아가 안내한 ‘저기’에 그는 없었다. 오직 풀과, 오직 먼지와, 오직 없음만 있었다. 그가 있을까 싶어 1년 동안 확인하고, 열어보고, 더듬은 곳들이었다. 델리아가 찾아다닌 ‘저기들’ 어디에도 그는, 그였을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6일 전 주한 필리핀대사관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호소했다. 한국 거주 필리핀인들에게 ‘각자의 저기’를 살펴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널리 알려서 그의 행방을 찾아 달라.”

그의 살고 죽음을 말해주지 않는 지구가 365차례의 자전과 한 차례의 공전을 완성하고 있었다.

로델의 친구들은 한천 좌우의 빽빽한 초록을 헤집으며 로델의 흔적을 수색했다. 경찰 신고 뒤에도 그들은 낙엽이 질 때까지 ‘로델 찾기’를 계속했다. 최영아 제공

증발한 남편

로델 아길라 마날로(35).

이름에 어머니(Aguila)와 아버지(Manalo) 성을 함께 지닌 아들. 2012년 필리핀 바탕가스에서 일을 찾아 2626.48㎞(경기 광주)를 날아간 남편. 고향 집에 8살과 5살의 두 딸을 둔 아빠. E-9 비자(고용허가제)로 입국해 만 4년에서 한 달 모자랄 만큼 체류한 이주노동자. 1년 전 8월16일 경기도 안성의 한 공장 기숙사에서 모습을 감춘 남자.

그는 짧게 로델(Rodel)로 불렸고, 로델은 짧게 그렇게 요약됐다. 지갑과 현금, 신용카드, 여권, 외국인등록증 등이 그가 없어진 자리에 있었다. 이동하고, 생활하고, 스스로를 증명할 모든 것을 두고 그의 몸만 증발했다. 실종이었다.

공장(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옆을 한천(20여㎞)이 지나갔다. 공도읍에서 안성천과 합쳐진 뒤 아산만에서 바다를 만났다. 로델의 친구들이 강을 따라가며 ‘저기’일 법한 장소들을 훑었다. 로델이 전날 한 ‘말과 행동들’이 그가 돌아오길 기다릴 수 없도록 했다. 주간조인 글렌(가명·29·남·필리핀)은 출근을 늦춘 채 좁은 비탈을 타고 산속을 헤맸다. 최영아(가명·21)는 한천교 아래를 걸으며 “로델 오빠”를 불렀다. 밤샘 근무를 마친 조셀(가명·55·남·필리핀)도 동료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그들은 저수조 뚜껑을 열어 보고, 길옆의 창고를 들여다봤다. 낚시꾼들이 진 친 고삼저수지 물속으로도 눈길을 넣었다. 한천 좌우의 빽빽한 초록을 헤집으며 죽은 로델이라도 만나길 바랐다. 델리아에게 필리핀의 아내가 용한 집에서 받아왔다며 전화로 점괘를 전했다.

물이 있는 곳에 남편이 갇혀 있다더라, 나오려고 발버둥치지만 혼자서는 못 나온다더라, 늦기 전에 꺼내줘야 한다더라….

경찰 신고(이튿날) 뒤에도 친구들은 ‘로델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익고, 겨울이 닥칠 때까지, 그들은 ‘물감옥’으로 추정되는 곳들을 수색했다. 주말이면 안성시내와 경기도 광주·용인에서 온 필리핀인들도 공장에 모여 한천으로 나갔다.

실종 343일째(7월25일). 안성도 작열했다. 글렌이 공장 기숙사 방문을 열었을 때 단단하게 뭉쳐진 열기가 얼굴을 때리며 튀어나왔다. 글렌의 기숙사는 침대 하나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컨테이너 박스였다. 글렌이 ‘로델의 마지막 자리’를 보여줬다. 실종 전날(2016년 8월15일). 로델은 글렌의 방에 끼어 잤다. 로델은 안성 삼죽면에서 일했다. 그는 친구 글렌·델리아·최영아의 공장에 주말마다 찾아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다. 로델은 글렌의 3살 난 딸의 대부(godfather)기도 했다. 글렌의 침대 오른쪽과 컨테이너 벽 사이에 성인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뒤척이던 모습이 글렌이 기억하는 ‘마지막 로델’이었다.

실종 당일(2016년 8월16일). 글렌은 로델을 살피느라 잠을 설쳤다. 지난밤 “로델을 잘 지켜보라”고 델리아도 당부했다. 새벽 2시와 3시께 로델이 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글렌의 귀에 들렸다.

“어디 가?”

광복절에도 일(로델 공장은 휴무)한 글렌은 피곤으로 잠을 들락날락했다. 로델에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했다. 눈을 떴는데 새벽 6시였다. 로델이 없었다. 글렌이 전화했을 때 컨테이너 안에서 로델의 휴대폰이 울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들을 버려둔 채 로델은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슬리퍼만 신고 나갔다.

실종 343일째(7월25일). 실밥이 터지고 가죽이 해진 로델의 낡은 지갑을 열었다. 한국 돈 13만4천원이 나왔다. 미국 달러와 필리핀 페소, 인도네시아 루피아, 사우디아라비아 리얄도 소액 있었다. 펼치면 검지손가락만한 길이의 ‘여행자의 기도문’이 지갑 안쪽에 끼어 있었다.

“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소서.”

공장 주위는 논과 밭과 강뿐이었다. 공장 안에도, 길에도, 그 새벽의 로델을 기록할 시시티브이는 없었다. 로델이 의지했던 예수와 성모 마리아만 글렌의 방 탁자 위에서 그가 사라지는 순간을 지켜봤다.

그날 로델은 필리핀행 비행기에 오르기로 예정돼 있었다. 로델이 지갑을 펼칠 때마다 눈인사했을 사진 속 아내가 필리핀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델 실종 직후 그의 친구들은 한천(경기도 안성시)을 따라가며 샅샅이 로델을 찾았다. 저수조 뚜껑을 열어보는 장면. 최영아 제공

입국 거부된 아내

실종 당일. 메리 앤 아수그 마날로(35). 로델과 결혼(2008년 12월)해 이름에 마날로를 갖게 된 여자. 온다던 남편 대신 남편의 실종 소식이 오자 주저앉은 아내. 메리 앤은 8년의 시간이 새하얘졌다. 남편과 아내로 필리핀에서 쌓은 4년과 남편이 바다 너머에서 실어 보낸 4년이 남편의 실종과 더불어 제거된 것 같았다. 그는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 비자 발급을 신청(한국인은 무비자로 필리핀 입국, 필리핀인은 비자 받아야 한국 입국)했다. 불허됐다. 실종이 믿기지도 않고 실종의 전후를 가늠할 수도 없는 그에게 한국대사관이 사태를 ‘정리’했다.

“미등록되기 위해 이탈한 뒤 어디선가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 들어가서 불법체류로 남편과 살려는 것 아닌가.”

실종 28일째(2016년 9월12일). 한국의 ‘이주민과 함께’가 한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메리 앤의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 거부됐다. ‘이주민과 함께’는 주한 필리핀대사관에 지원을 부탁했다. 실종 358일째(8월9일). 필리핀대사관에 당시 결과를 물었다.

“우리가 비자 발급을 지원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아내가 입국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국대사관이 판단한 듯하다.”

고용허가제는 가족의 동거를 금지했다. 입국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근로자 가족의 관광이나 단기방문은 자유롭게 가능하다’(2016년 5월 유엔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이행에 대한 한국 정부 제4차 국가보고서)고 밝히고 있으나 거부 사례가 빈번했다. 통장으로 일정액 이상(금액은 재외공관마다 차이)의 은행잔고를 증명해야 관광비자도 받을 수 있었다.

“관광하러 온다고 한 뒤 눌러앉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들까지 와서 살면 국가의 재정 부담이 커진다. 경기가 악화될 때 바로 실업자가 되고 저소득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독일도 가족 초청을 허용했다가 국내 터키인들이 600만명이 됐다. 폭동과 테러도 이민자 3세들과 무관치 않다.”(법무부 체류관리과)

실종 365일째(8월16일).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이 법무부를 통해 메리 앤의 입국 불허 이유를 설명했다.

“실종신고가 됐다고 비자를 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 관계가 맞는지, 한국에 가서 뭘 할 수 있는지 확인돼야 한다. 비자는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때 발급한다. 한국에 가도 남편을 찾으란 보장이 없지 않나.”

찾을 수 없어도 찾는 것이 메리 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남편을 잃어버린 땅으로 가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지 아내는 알고 싶었다.

실종 하루 전. “취미가 알바.”

로델의 공장 동료들이 로델에게 붙인 별명은 존경 같기도 했고 놀림 같기도 했다. 로델이 주말과 휴일마다 델리아와 글렌의 공장에 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델이 일하던 공장은 토·일요일과 공휴일을 쉬었다. 그는 일이 없는 날이면 친구들 공장 근처에서 알바를 했다. 박스 공장에서 일당일을 하거나 과수원에서 배를 따기도 했다. 취미일 수 없는 것을 취미로 가진 사람이 로델이었다.

광복절(월요일)이었다. 로델은 박스 공장 알바를 하기로 돼 있었다. 아침부터 로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전화로 알바를 취소했다. 쾌활하고 사람을 잘 웃겼던 로델이 말없이 자주 하늘을 올려다봤다.

“형, 나 아파.”

로델의 말에 조셀은 “걱정 말라”고 했다. 조셀은 같은 바탕가스 출신인 로델이 공장에 찾아올 때마다 친동생처럼 마음이 쓰였다.

“우리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밥 먹어.”

로델은 밥을 먹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방으로 찾아와 로델이 한 말에 델리아는 불안했다. 로델은 “죽고 싶다”며 밧줄을 찾았다. “옛날 병이 다시 오는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

메리 앤과 통화한 로델이 필리핀 집에 가서 안정하고 오겠다고 했다. 마침 로델의 공장은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로델이 다음날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최영아가 로델의 한국인 상사에게 전화해 로델의 말을 통역하고 허락을 받았다. 로델과 삼죽 공장으로 간 글렌이 가방을 싸서 가져왔다. 로델이 사라진 방에 주인 없이 남겨진 그 가방은 한국으로 오지 못하는 메리 앤에게 보내졌다. 로델이 필리핀에서부터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메리 앤에게 들었다.

로델의 실종은 에스엔에스를 사용하는 국내 필리핀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널리 전파됐으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문영 기자

“취미가 알바”

실종 이틀 전(2016년 8월14일 일요일). 로델은 안성중학교(금산동) 체육관에 있었다. 전날 충북 청주의 필리핀교회에서 잔 그는 경기 시간(1시부터 4시30분)에 맞춰 도착했다. 체육관은 지역 내 이주노동자들이 일요일마다 모여 농구하는 장소였다.

국내 필리핀 이주노동자 커뮤니티는 매년 농구대회를 열었다. 그들의 ‘일요 농구리그’는 2009년 대구·경북의 이주민센터가 주최한 대회(고향별 16개 팀 출전)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필리핀인들이 모인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필리핀인들의 넘버원 스포츠”(조셀)인 농구가 한국에서의 퍽퍽한 이주노동에 물기를 줬다. 그들에게 농구장은 필리핀어로 듣고 말하며 모국어의 굶주림을 푸는 공간이었다. 선수로 뛰고 응원단으로 환호하며 그들은 이주노동 정보를 공유하고 낯선 땅에 적응하는 힘을 얻었다. 필리핀 농구팀이 “안성에만 8개”(글렌) 있었다.

농구를 할 때 로델(포지션 가드)은 날아올랐다. 그는 경기 광주·안성의 필리핀 사회에서 유명한 농구 선수였다. 로델이 에스엔에스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Del Eagle(아길레는 스페인어로 ‘독수리’) Win(마날로는 필리핀어로 ‘승리’)이었다. 농구공을 잡으면 그는 독수리처럼 날아 승리를 얻어냈다. “로델은 광주·안성에서 톱5에 든다”고 글렌은 말했다. 안성의 리그가 끝나면 시합이 한창인 다른 지역 팀들이 로델을 다퉈 스카우트했다.

“어디로 갈 거야?”

경기 종료 뒤 글렌이 물었다.

“내일 알바 하려고.”

로델과 글렌은 마트에 들러 식료품을 산 뒤 글렌의 공장으로 왔다.

실종 나흘 전(2016년 8월12일). 로델은 안성중학교에서 1.6㎞ 떨어진 안성보건소를 찾았다. 로델이 의사에게 복통을 호소했다. 실종 359일째(8월10일). 의사에게 당시 진료기록 복기를 부탁했다.

“배가 아파서 왔다고 했다. 외국인이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복통약을 지어줬다. 진단명을 쓰지 않은 것으로 봐서 구체적 병증이 있다고 보진 않은 것 같다.”

로델의 지갑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나왔다. ‘(경기도) 광주시외국인진료소’라고 쓰여 있었다. ‘등록번호 1280’이란 문구도 있었다. 실종 350일째(8월1일). 종잇조각의 발행처를 확인했다. 광주시외국인진료소는 광주시 보건소 안에서 매월 둘째주 일요일에 운영되는 무료진료소였다. “1280은 일종의 차트번호”라고 보건소는 설명했다. 진료는 광주 지역 의료인들이 자원봉사로 했다. 보건소는 장소와 기기를 제공했다.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에겐 의료비가 큰 부담이었다.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등록 노동자들의 경우 치료 시기를 놓쳐 병을 키웠다. 무료진료소는 “찾아오는 데 두려움이 없도록 신상정보 확인을 최소화”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15.4%(IOM이민정책연구원 ‘국내 이주민의 취업 및 사회활동’)가 아플 때 본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고 참았다. 로델은 2014년 1차례와 2015년 3차례 진료소를 다녀갔다. 마지막 방문 땐 통증 완화제를 처방받았다. 통증이 무엇인지는 기록에 없었다.

실종 351일째(8월2일). “나도 휴가중이었는데 전화가 왔다.”

ㄷ사(삼죽면)의 한국인 상사(51)는 실종 전날 로델과의 전화통화를 기억했다. 배가 아파 필리핀에서 휴가를 쓰고 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 전까지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일도 무난하게 했다. 무슨 영문인지 나도 알 수가 없다….

그가 로델의 작업장으로 안내했다. ㄷ사는 서류파일 원단을 만들었다. 납품 크기로 자르고 남은 잔해를 분쇄해 재활용 상태로 만드는 것이 로델의 일이었다. 분쇄기는 멈춰 있었다.

로델은 2014년 7월17일부터 실종 나흘 전(2016년 8월12일)까지 이 공장에서 일했다. 한국에서 로델의 두 번째 직장이었다. ㄷ사는 덕산산업단지에 있었다. “한국인 직원은 도통 구할 수 없는” 영세 제조업체들이 공단 안에 있었다. 로델 실종 당시 필리핀인 7명, 베트남인 1명, 스리랑카인 1명이 ㄷ사에서 일했다. 로델과 동료들은 낮(11시간)과 밤(10시간) 2교대로 일했다. 그 일을 하고도 로델은 알바를 했다.

필리핀인 7명 중엔 로델 외에 알란(가명·36·남)도 있었다. 알란은 로델의 첫 직장(경기 광주 곤지암)에서부터 동료였다. 잔업 없이 하루 8시간 일하던 그곳에서 잔업 포함 10~11시간을 일하는 ㄷ사로 동반 이직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었다. 노동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자기 몸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그들은 부족한 임금을 보충했다. 국내 필리핀 국적자의 77.6%가 제조업에 종사했다. 한국인(17%)보다 월등히 많았고 전체 이주민 평균(60.9%)보다도 많았다. 생산 원가를 줄이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이 외면한 산업을 지탱했다.

“로델 거.”

알란이 로델의 옷장을 열었다. 기숙사 옷장엔 실종 전날 로델과 글렌이 챙겨 가고 남은 옷들이 걸려 있었다. 로델의 옷은 창고에도 있었다. 실종 뒤 메리 앤의 부탁(“포장해서 보내달라”)을 받은 공장 동료들이 로델의 옷을 모아 박스에 담았다. 대형 박스 1개와 중형 박스 1개가 나왔다. 항공운송 요금만 20만원(8월17일 기준 9029페소)이었다. 아내가 돈을 보내면 부쳐주겠다고 했으나 돈은 아직 입금되지 않았다.

“딸 주겠다며 샀어요.”

알란이 옷장 위로 시선을 올렸다. 어린아이가 타는 빨간 모형 자동차가 있었다. 자동차가 한국에 정차해 있는 동안 딸들은 자동차를 탈 수 없을 만큼 자라버렸다.

ㄷ사 기숙사 옷장 위에 로델이 딸에게 주려고 사둔 빨간 모형 자동차가 있다. 옷장 안엔 로델의 남은 옷들이 걸려 있다. 이문영 기자
로델이 필리핀 커뮤니티 사람들과 농구를 하고 있다. 그는 경기 광주·안성의 필리핀 사회에서 유명한 농구 선수였다. 로델 페이스북

미궁 속 로델

실종 일주일째(2016년 8월22일). ㄷ사가 로델의 ‘사업장 근로자 자격 상실’을 신고했다. 고용허가제는 무단결근 5일이 지나면 이탈 신고를 하게 돼 있다. 실종 360일째(8월11일). 고용노동부 평택고용노동지청이 로델(외국인등록번호 82××××-5××××××)의 “불법체류” 신분을 확인해줬다.

“소재가 파악되면 강제출국 된다.”

실종 당시 로델에겐 1년여의 체류기간(고용허가제 초기 3년 만료+회사의 고용연장 1년10개월)이 남아 있었다.

실종 350일째(8월1일). ㄷ사에서 자동차로 45㎞를 달리면 ㅅ사(경기 광주 곤지암)에 닿았다. 이주노동을 신청한 로델이 계약서를 쓰고 채용된 첫 직장이었다.

광주시 외곽의 2차선 도로에서 골목으로 꺾어드는 모퉁이에 작고 허름한 건물이 한 채 있었다. 로델은 2012년 10월17일부터 2014년 7월4일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건물에 ㅅ사는 없었다. 선반 기계를 돌리던 남자가 “몇 년 전 이사했다”고 말했다. 로델의 퇴사 직후 ㅅ사는 4.9㎞ 떨어진 곳에 새 공장을 지어 옮겨갔다.

“아, 산도적.”

이름으로 로델을 떠올리지 못하던 ㅅ사 직원은 사진을 보자마자 그를 알아봤다. 몸이 좋고 건장해서 그 별명으로 불렀다고 했다. 산업용 오븐을 만드는 ㅅ사에서 로델은 “용접도 하고 기계도 만졌”다.

로델은 한국 체류허가(2012년 9월10일)가 나기 13일 전(8월28일) 필리핀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상 그의 월급은 103만5천원(하루 8시간·시간 외 근무 0.5시간 급여 제외)이었다. 당시 필리핀 E-9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142만원(전체 이주노동자 평균 임금은 155만원)이었다.

계약기간(3년)이 1년3개월 남았을 때 로델은 “잔업과 특근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며 ‘사업장 변경’ 희망을 밝혔다. 고용허가제에선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직장을 바꿀 수 없었다. 인권침해와 사업장 이탈을 부르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혀 왔다. 지난 8월7일 충북 충주의 부품공장에서 일하던 네팔 노동자(27)가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필리핀 노동자들 중 한 차례도 직장을 바꾸지 않은 경우는 64.1%였다. 고용허가제 전체 노동자 평균(48%)보다 16.1% 높았다. ㅅ사 대표는 로델의 요청을 들어줬다. 알란이 로델과 함께 ㄷ사로 옮겼다.

실종 351일째(8월2일). 안성경찰서에 지난 1년의 수사 경과를 물었다.

“실종 수사를 했지만 확인된 행방은 없다.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신고도 없었다. 중요 소지품을 다 두고 몸만 없어진 것이라 범죄 피해를 당했다고 보기도 쉽지 않다. 답답한 상황이다.”(여성청소년수사팀)

로델의 실종은 “에스엔에스를 하는 국내 필리핀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테스 ‘이주민통번역협동조합 링크’ 이사장)다. 그 너른 연결망 안에서도 그는 감지되지 않았다. 로델은 미궁 속에 있었다.

더 나은 직장을 찾아 이탈했다는 의심(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조건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돈과 신분·체류 증명, 통신기기까지 두고 갔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아내와 친구들에게까지 연락을 단절한 점도 설명되지 않았다.

“죽고 싶다”(실종 전날)는 말을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었다. 경찰도 “정신질환에 따른 실종이 아닐까 판단한다”고 했다. “정신질환의 영향으로 사망하는 외국인노동자들(최근에도 사망 6개월 만에 백골로 발견)이 안성에도 늘고 있다”고도 했다.

로델은 주검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해 가뭄으로 한천이 바짝 말랐을 때조차 사람 뼈로 추정되는 것은 없었다.”(로델이 실종된 공장의 대표)

의식을 놓친 상태로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는 이주노동자들이 잇따라 확인됐다. 경기도 안산에서 부산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지갑과 짐과 마음을 고스란히 잃어버린 스리랑카인이 있었다. 뭐든지 먹되 수건까지 먹는 필리핀인도 있었다. “발병 원인은 뚜렷하지 않지만 이주노동 중 겪는 압박과 차별, 가족을 향한 그리움 등이 병을 깊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이한숙 ‘이주와 인권 연구소’ 소장)

마음의 병이 노숙으로 이어진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다.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ㅇ(20대)은 이혼(정신질환 이유 추정) 뒤 부산역 등지에서 노숙했다. 큰아이는 필리핀으로 보냈고 같이 노숙하던 둘째는 보육원에 들어갔다. 치료시설을 들고 나던 그는 셋째를 임신한 채로 다시 거리에서 발견됐다.

“언어 소통이 핵심 치료인 정신과는 진료 자체가 쉽지 않았”(김사강 ‘이주와 인권 연구소’ 연구위원)다. 한국 국적자가 아니면 공적 의료 체계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2014년부터 지난 6월까지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만 6명의 이주민 노숙인이 확인됐다. 그중 한 명(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은 지난해 11월 무연고로 사망했다.

로델은 평소 쾌활한 사람이었다. 실종 열흘 전인 2016년 8월6일 친구들과 함께한 ‘마지막 서울 여행’에서 그가 익살스러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로델 페이스북

로델은 누구인가

실종 351일째(8월2일). 부산에서 데니 게라(47·남·‘이주민과 함께’ 부설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조직팀장)를 만났다. 로델과는 먼 친척이었다. 고향도 바탕가스로 같았다. 그는 1993년 첫 산업연수생(수많은 인권침해를 낳고 2004년 고용허가제로 대체)으로 들어와 한국 이주노동의 난폭한 시간을 모두 통과했다. 데니 게라는 로델 실종 이튿날 안성으로 올라가 경찰에 신고했다. 메리 앤의 비자 발급을 위해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 공문도 보냈다.

그는 부산·울산·경남 지역에 바탕가스 공동체 ‘사피나코’(현재는 지역 무관) 창립을 주도했다. 지난 4월엔 지역 24개 필리핀 커뮤니티가 연대(친목·교육·문화·복지·인권 증진)하는 ‘필리핀커뮤니티센터’(FCC)를 발족했다. 부·울·경엔 국내 거주 필리핀인(7월31일 기준 5만5258명)의 약 17%가 있었다. 그는 FCC 같은 커뮤니티가 활발해질수록 ‘로델들’도 줄어들 것이라 믿었다.

8월4~5일 경남 밀양에서 사피나코 캠프가 있었다. 경북 영천에서 온 참가자 중에 조셀이 있었다. 354일 전 “밥 먹으라”는 말에도 밥을 먹지 않던 로델의 마지막 모습을 그는 여전히 잊지 못했다. 로델 실종 열흘 뒤 그는 안성 공장을 그만두고 영천으로 왔다. 그도 로델처럼 ‘더 많은 잔업과 더 많은 특근’을 찾아 남하했다.

로델은 누구인가.

한 달 동안 되짚은 로델의 길에서 로델은 만나지 못했다. 만난 것은 한국의 ‘꼭짓점’을 받치는 ‘밑변들’이었다. ‘일’을 찾아 한국으로 흘러와 ‘더 많은 일’을 찾아 전국으로 흐르는 밑변들이 206만3659명(7월31일 기준)이었다. 한국인의 밥상(농축산물)과 한국인의 편리(제조부품)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과로와 이산이 있었다. 그들의 ‘이주’에 뿌리를 꽂고 저임금 노동력을 빨아들이는 한국은 그들의 ‘정주’를 막는 데 정책과 행정의 혼신을 쏟았다. 단편이 조립한 로델은 흐릿했지만 그 밑변들 어디에서나 로델은 선명했다. 데니 게라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의 메리 앤과 통화했다.

-남편과의 마지막 대화는 언제였나?

“실종 전날 밤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 우울하다고 했다. 나는 일단 필리핀으로 들어와서 쉬다 가라고 했고, 남편은 다음날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지난 1년간 남편이나 남편으로 짐작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나?

“없었다.”

-한국에서 온 로델의 가방 속엔 무엇이 있었나?

“미화 1만200달러(8월17일 기준 1161만7800원)가 있었다. 자신이 사라지면 내게 전달되도록 남편이 넣어둔 것 아닌가 싶다.”

-남편은 한 달에 얼마나 보내왔나?

“필리핀 돈으로 5만페소 정도(110만8천원)였다.”

2013년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월평균 송금액은 98만4천원(2013년 체류외국인 실태조사)이었다. 로델의 송금액과 가방 안 목돈은 ‘취미가 알바’인 결과였다.

-우울증이 있었던 남편이 왜 한국까지 일하러 갔나?

“아이들을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어머님도 오랫동안 병상에 계신다. 필리핀엔 일이 없다. 부칼(로델의 마을)엔 망고·코코넛·바나나 농장밖에 없다.”

-남편의 기숙사 옷장 위에 딸들에게 주려고 사둔 자동차가 있다.

“남편에게 들었다. 아빠 왜 안 오냐고 아이들이 묻는다.”

메리 앤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한국으로 남편을 찾으러 가고 싶다”고 했다.

실종 365일째. 법무부가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의 입장을 <한겨레>에 전했다. “실종자 아내가 비자를 다시 신청하면 재검토하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로 만 1년을 꽉 채운 날, 한국대사관이 당사자도 아닌 언론에 밝힌 내용이었다. 남편을 찾기 위한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일정(입출국 및 한국 내 동선 일정)과 계획(어디에 머무르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남편을 찾을 것인지), 예산(필요 경비 마련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조건이 딸려 있었다. 데니 게라가 말했다.

“1년 전 이미 다 갖춰 보냈다.”

메리 앤도 미궁 속에 있었다.

*로델 관련 제보: 주한 필리핀대사관(02-796-7387), 데니 게라(이주민과함께 051-802-3438)

안성·광주(경기)·부산/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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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당시 로델의 직장인 ㄷ사(안성시 삼죽면)에서 로델이 분쇄 작업을 하던 장소. 이문영 기자
로델이 과수원에서 과일을 나르고 있다. 로델은 하루 11시간의 노동을 하면서도 일이 없는 주말엔 알바를 했다. 그의 별명은 ‘취미가 알바’였다. 로델 페이스북
로델 아내의 부탁으로 ㄷ사 동료들이 그의 옷을 박스 2개에 담아 포장했다. 농구 유니폼 등이 보인다. 이문영 기자
로델의 지갑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나왔다. ‘(경기도) 광주시외국인진료소’라고 쓰여 있었다. 로델은 2014년과 2015년 이곳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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