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예술, 자연..ㅣ산악인가수 신현대] "산 아래 내 노래 속에 또 다른 산이 있어요"

글 월간산 손수원 기자 2017. 8. 14. 17: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8년 '난 바람 넌 눈물'로 가수 데뷔해외 고산 원정등반 하고 '산 노래' 다시 부르며 '산악인 가수'로 불려

산에 들면 절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모두 자연의 악기가 되고 내가 걷는 발자국 소리가 박자가 되는 덕분이다. 그래서 산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산 노래’ 한 곡씩은 새기고 다닌다. 

[월간산]80년대 말 ‘난 바람 넌 눈물’이란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신현대씨는 이후 산 노래를 부르며 해외원정을 다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산악인 가수’란 타이틀이 붙는다.

1988년 ‘난 바람 넌 눈물’을 발표해 인기를 얻은 포크송 가수 신현대(61)씨는 언제부터인가 ‘산악인 가수’로 불린다. 가수로 인기를 끈 후 고산에 다니며 대중가요보다 산 노래를 더 즐겨 부른 덕분이다. 그에게 노래와 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과거 그의 노래를 들었을 때는 그 미소년 같은 목소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아저씨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락산 입구에서 만난 그는 여느 산악인처럼 탄탄한 몸매에 선 굵은 남자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에서 그런 미성이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Q ‘외강내유’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노래는 언제부터 하셨는지요.

A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앞에 나와서 노래 한 번 불러보라기에 ‘빨간마후라’를 불렀다가 엉덩이를 맞은 일이에요. 기타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졌어요. 형님이 통기타를 빌려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신기해서 몰래 기타를 치다가 걸려서 뒤통수도 여러 번 맞았죠. 그때는 딱히 기타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책도 없이 그냥 다른 사람들 치는 걸 보고 혼자서 익혔어요. 고등학생 때는 밴드를 만들어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배우기도 했고요.”

Q 가수가 되려고 했던 건가요?

A “꼭 그렇진 않았어요. 그저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게 좋았죠. 그래서 무작정 기타 하나 들고 서울로 왔지만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198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언더그라운드 무대에 서며 힘들게 생활했죠.”

한동안은 머무를 곳이 없어 삼청공원에서 3개월 정도 노숙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하루는 공원에서 자리 깔고 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때 삼청동 살던 가수 전인권씨가 집에 가는 길에 그를 발견하곤 “어 당신도 여기 살아?”라고 물었다. 그는 차마 공원에서 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씩 웃기만 했단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아 다른 가수들의 곡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8년에는 백미현씨와 함께 본인이 작사·작곡한 ‘난 바람 넌 눈물’이란 곡으로 정식 가수 데뷔했다.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가요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기도 했다. 이후 ‘하늘만 보면’, ‘보고픈 그대 얼굴’, ‘그래 잊자’ 등의 노래도 인기를 얻었고, 1990년 초부터는 인천의 한 무용단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음악가로 바쁘게 살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보니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산이었다. 학창시절의 즐거웠던 산이 마흔 즈음에 다시 그의 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Q 산에는 언제부터 다니기 시작하셨나요?

A “제 고향이 춘천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동네 형들을 따라 삼악산이나 팔봉산에 자주 갔어요. 그러면서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는 여름방학만 되면 친구들과 한 달 동안 키슬링배낭을 메고 전국으로 무전여행을 다니면서 산에 갔어요. 비포장길을 버스 얻어 타고 설악산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원 없이 다녔죠.”

Q 추억이 많았겠네요.

A “그렇죠. 친구들과 비포장길을 걸으면서 뒤에 오는 차가 버스인지 택시인지 맞추는 건빵 내기도 하고, 경포대에서 기타 치면서 밥 얻어먹고, 나중에는 연료가 없어서 그 기타를 부셔서 군용반합에 밥해 먹고 그랬죠. 그렇게 설악산을 넘으니 한계령으로 오더라고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설악산 중청에서 한계령 쪽으로 가는 서북능선에 굴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때 거기서 야영했었는데, 거길 찾으려고 몇 번 갔었는데 통 찾을 수 없었어요. 제주도에 가서도 낮에는 실컷 놀다가 밤에는 해수욕장에서 기타 치고 노래해서 밥 얻어먹고 그랬죠. 나중에는 매혈을 하러 병원에 갔는데 우리 모두 너무 비쩍 말라서 피를 못 뽑는다고 하더군요. 결국 집에 전화해 5,000원만 우체국에 보내 달라 해서 겨우 올라왔어요. 미안한 마음에 배 삯이랑 버스비 빼고는 몽땅 집에 되돌려주었죠.”

어른이 되어 다시 산에 다니게 되면서 이번엔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학창 시절, 장비가 없어 제대로 암벽등반을 해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었다. 1997년 코오롱등산학교를 들어갔다. 졸업한 후에는 동문산악회인 바라뫼알파인클럽을 창립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산과 급격히 가까워졌다. 홍대 앞의 라이브카페 이름을 ‘8848’로 했으니 그의 산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Q 1999년에 마터호른(4,478m)에 오르셨어요. 당시 대중음악인으로서는 처음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전문산악인의 길을 택하셨던 건가요?

[월간산]그는 중학교 2학년 때 형이 빌려온 기타를 몰래 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그의 감미로운 미성으로 부르는 산 노래는 마음을 울린다.

A “그런 건 아니고요. 당시 유럽에 암장순례 한다고 한 달 동안 스위스~이탈리아를 돌아다닐 때였거든요. 그저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알파니즘’이 시작된 마터호른에서 첫 원정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후 이탈리아 돌로미테산군을 등반했고, 2000년엔 북미 최고봉 알래스카 데날리봉(6,194m)을, 2001년엔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5,642m)를 다녀왔다. 그리고 2004년엔 산악인 강성규씨와 함께 알파인 스타일로 초오유(8,201m)를 등정했다. 홀로 해발 7,500m의 설사면에서 비박하고 이튿날 정상에 올랐다. 가수로서 8,000m급 고산에 오른 이는 그가 세계 최초였다.

그는 초오유 정상에서 이런 글을 썼다.

‘그대여 살아 있음에 감사해라 /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 세상은 그렇게 무섭게 흘러가느니 / 그대여 살아 있음에 감사해라 / 이 자유로움에 이 평화로움에’

그리고 2007년에는 김재수 대장이 이끄는 ‘김해 플라잉점프팀’의 대원으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로 향했다.

Q 초오유에 이어 ‘신의 영역’에 다시 도전하신 거네요.

A “우리는 북면 루트로 올랐어요. 5월 16일이었을 거예요. 헤드랜턴을 2개 들고 정상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8,540m 지점에서 헤드랜턴이 모두 꺼지는 거예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다행히 랜턴을 든 셰르파 한 명이 올라와 하룻밤을 같이 비박했어요. 하도 추워서 그 셰르파한테 ‘내가 동상에 걸려도 기타는 쳐야 하니 손가락은 자르지 말고 발가락만 자르라’고 했어요.”

고통스러운 밤이었지만 무사히 아침이 왔고 8,300m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죽을 동 살 동 내려온 그의 몰골을 본 후배 대원은 ‘정말 처참한 지경’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같은 시기, 남서벽 루트를 등반하던 박영석 대장 팀의 대원 오희준과 이현조가 눈사태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둘 다 예전부터 인연을 맺어 각별하게 아끼는 후배들이었다.

나중에 후배들이 사고를 당한 시간을 보니 그의 헤드랜턴이 꺼져 오도 가도 못하던 때였다. 그는 아직도 “만약 그때 계속 정상으로 올랐더라면 분명 나도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아마도 두 동생들이 나를 지켜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Q 에베레스트에 기타를 가지고 올라가셨다는데요.

A “‘설악가’를 만든 이정훈(2014년 별세) 형을 응원한다고 들고 갔었죠, 정상에서 설악가를 부를 작정이었어요. 8,300m까지 들고 갔어요. 그런데 전에 교통사고로 심은 임플란트가 기압 때문에 빠져버렸어요. 급한 대로 순간접착제로 붙여 넣긴 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 나중에 정상에서 노래 부를 때 빠지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 결론적으로 정상에 못 갔기 때문에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7,900m에서 ‘아득가’를 부르긴 했죠.”  

Q 산 노래를 많이 부르셨습니다.

A “산을 좋아하는 가수니까 당연히 산 노래를 좋아하고 부르지 않을 수 없죠. 과거 산 노래들은 일본 군가를 개사하거나 구전으로 전해온 노래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부르는 사람에 따라 멜로디나 가사가 달랐고 그나마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죠. 그래서 가수로서 이걸 좀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2006년에 산 노래 1집 ‘바람 눈물 그리고 산’을 냈어요.”

이 앨범에는 산악인들의 애창곡인 ‘설악가(이정훈 작사·작곡)’를 비롯해 ‘설악아 잘 있거라(김태호 작사, 정주영 작곡)’, ‘아득가(백경호 작사·작곡)’ 외에도 그가 만든 ‘인수봉’, ‘길’, ‘꽃’과 ‘한계령’, ‘저 산 넘어’와 같은 가요가 실려 있다. 1집에 이어 2009년에는 2집 ‘미치도록 그리운 산’을 냈다. 이 앨범에는 1집 ‘인수봉’에 이어 그가 만든 ‘선인봉’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산 노래로 재능기부도 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운동에 대한 ‘산양의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는 2015년 광화문 문화제 때 ‘산양’이란 제목으로 처음 선보였다. 이를 들은 한 단체에서 음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제안한 단체에서 편곡과 녹음에 드는 비용을 낼 여력이 없었던 것. 이에 그는 재능기부 형태로 반주, 녹음 기부자들을 섭외해 ‘산양의 노래’를 만들었다.

[월간산]그는 음악과 산은 자신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Q ‘산양의 노래’를 만든 이유라도?

A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보호한다고 해놓고 나무데크를 깔고 케이블카를 놓고. 그러면서도 ‘야영하지 말라’, ‘비 오면 등반하지 말라’ 강제력을 행사하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4~5년 전에 미국 존뮤어트레일을 21일 동안 걸었는데 거기는 최소한의 통제와 보수만 해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책임입니다’라는 거죠. 규제 대신 책임을 지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Q ‘대중가수’보다는 ‘산악인 가수’로 더 많이 불립니다.

A “산 노래를 부르는 가수니 자연히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이게 ‘산악인’과 ‘가수’ 사이에 점 하나가 찍혀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붙어버렸어요. 뭐 지금은 저도 그런가보다 하고 지내요. 한편으로는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는 것 같아서 좋기도 하고요.”

Q 약간 오해도 있었을 법한데.

A “있었죠. 산악인이면 산악인이고 가수면 가수지 왜 중간에 있냐는 식이었어요. 암벽등반을 하면 한동안 손이 뻣뻣해지고 손톱도 망가지거든요. 그러면 기타를 잘 치지 못해요. 그래서 공연을 앞두고는 등반을 하지 않아요. 제가 만약 기타를 치지 않았더라면 등반 난이도가 더 센 곳도 올랐겠죠. 누구나 자신의 산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잘 설명해서 이제 그런 오해는 없어요.”

Q 가수로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면 인기를 좀더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A “그 당시에는 노래를 하는 것을 좋아서 했지 어떤 물질이나 인기를 좇아서 한 건 아니었어요. 요즘 사람들이 만나면 ‘잘 살아?’라고 인사하잖아요. ‘행복하냐?’라고는 잘 묻지 않잖아요. 저는 음악을 하면서 산에 다닌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산 아래 내 노래 속에 또 다른 산이 있으니까요.”

그는 “음악을 통해 얻는 기쁨이나 산에서 얻는 기쁨은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각자의 산이 있고, 그것이 나중에 죽을 때가 되면 크게 솟아올라 ‘아 내가 이 산을 그렇게 다녔구나’라는 하고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Q 최근에 네팔과 히말라야에 관련된 사진전도 여셨죠?

A “‘노래하는 산 신현대, 히말라야 트레킹 콘서트’ 팀이 지난 3월 네팔과 히말라야를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전시했어요. ‘나무 사진가’ 이흥렬 작가의 작품인데 자연경관도 있고 현지 주민들과 함께한 음악회 장면도 있죠. ‘히말라야 트레킹 콘서트’ 자체가 네팔 지진 난민 돕기의 일환이었어요. 같은 한국산악회 회원인 문래동 문화공간 ‘플라이스페이스Flyspace’ 손병문 대표와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가 주축이 되어 진행한 행사였죠.

30여 명의 참가자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현지인들과 함께 작은 콘서트를 여는 거예요. 여행 경비는 최소한으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지진피해 난민을 돕기 위해 기부했어요. 이번 전시회의 수익금도 모두 기부했고요. 내년에도 ‘히말라야 콘서트’를 열 계획이어서 매년 네팔에 작은 희망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Q 왜 그렇게 산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A “그냥 좋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산에서 마른 솔잎 타는 냄새를 맡으며 기타를 치는 거예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너는 참 역마살이 참 많다’고 하셨어요. 너무 힘들어서 생각하기도 싫지만 떠나오면 어쩔 수 없는 그리움, 그 본능 같은 매력을 저버릴 수 없어요. 지금 사는 집 한쪽에는 음악 LP들이 가득하고 절반은 등산장비들이 가득해요. 저는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죠. 비 오는 날 음악을 틀어놓고 술 한 잔 하면서 자신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봐요. 스스로 답하죠. ‘행복하다’고. 산에 들어가서 물어봐도 똑같아요. 행복해요.”

[월간산]미국 존뮤어트레일을 걷는 신현대씨. 그는 8,000m급 히말라야 고산(초오유, 에베레스트)을 두 번이나 등반한 산악인이자 여행가다. / 사진 조원구 제공

Q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A “산 노래 앨범은 3집으로 끝내고 앞으로는 환경에 대한 노래를 하려고 해요. 그리고 산에 들어가 야외 콘서트장이 있는 집을 짓고 살고 싶어요. 한왕용 대장과 같이했던 클린마운틴도 다시 시작할 계획이고요. 제2회 ‘히말라야 트레킹 콘서트’도 준비할 거고요. 늘 지금처럼 노래 부르고 산에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 겁니다.”

그에게 ‘본인에게 음악과 산의 의미는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는 “칼릴 지브란은 ‘노래의 비밀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호흡과 숨소리, 그리고 관객 마음의 떨림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면서 “산과 음악도 나의 마음속에 점점 솟아오르는 한 덩어리의 산이 되어 결국엔 사람의 길로 인도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에게 음악과 산은 인생 그 자체이자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자신만의 산’이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저 푸른 산과 같이 / 내 맘에 남아 있는 꿈 푸르게 살아 있어 / 그리워 불러 볼 수 없는 그대의 이름같이 / 내 맘에 변함없는 사랑 영원히 살아 있네

-저 산넘어(이영훈 작사·작곡, 2006 신현대 노래) 中

 

 

▶ 실컷 놀았는데도 저녁… '한나절 행복' 찾아 춘천으로, 파주로

▶ 자동차 타이어에 새겨진 숫자의 비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