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고갱을 사랑한 오딜롱 르동의 '고갱 초상화'

미술사학자 2017. 7. 1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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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초상화, 오딜롱 르동, 1905년 작, 66x54.5㎝

오늘 소개해 드리는 그림을 그린 오딜롱 르동은 고갱만큼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후반 프랑스 예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작가입니다. 고갱이 후기 인상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뒤에 상징주의 경향도 나타나는데, 바로 이 상징주의라는 지점에서 르동과 공감대가 생기게 됐고, 두 사람은 깊은 공감을 공유하게 됐다고 전해집니다.

“이 고갱의 초상화는 1903년 5월8일에 마르키스 군도에서 사망한 폴 고갱에 대한 죽음을 전해 듣고 르동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1월 르동은 ‘세련된 야만, 위대함과 섬세함’이라는 표현을 고갱에게 바치는 헌사에 적었다. 두 사람은 1886년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때 이후 르동은 항상 고갱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갱이 집착했던 것은 때묻지 않은, 뭔가 경험이라 불리지만 허례나 쓸데없는 관습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색깔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기술발전과 더불어 색채의 다양성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고갱의 목표는 그 발전을 훨씬 뛰어넘었죠. 프랑스 파리의 우울한 날씨와 분위기가 그를 숨막히게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타이티는 자유와 의욕을 주었을까요?

“1890년 무렵부터 두 예술가는 상징주의 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추모 비석의 부조나 혹은 고대 동전에서 있을 법한 프로필 초상같이 보이는 검은색의 고갱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르동은 이 그림에서 굳이 실제 고갱과 닮은 모습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잉카제국의 벽화에 나오는 것 같은 뾰족한 코와 긴 머리카락을 이 그림에 그려 넣어 고갱의 자부심을 드러내려고 했다. 알려진 대로 고갱은 페루 사람이었던 조상들과 자신의 연관성을 자랑하고 싶어했고, 일종의 원시성에 해당하는 남미 인디언을 자기에게 동일시하려 했다.”

상징주의는 인상주의나 아카데미 예술처럼 19세기 후반 대세를 이룬 예술이 ‘겉으로 보이는 시각적 효과에만 집중하고 인간의 상상력과 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흐름’에 반발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상징이라는 단어보다 우리 속의 상상의 힘, 그리고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을 생각해 주시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고갱이 장소를 옮겨다니며 그런 힘을 찾으려 애쓰고, 본인의 조상들이 순수한 원시성을 믿고 싶어했던 것처럼 작가 르동 역시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태어나 도시보다는 시골 속에서 자연을 관찰하면서 유명한 상징주의 작가가 됩니다.

“세월의 무게나 고통스러운 현재는 이 그림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림 속의 고갱은 젊고 중성적이며 꿈의 꽃 같은 액자 속에 보여진다. 얼굴은 역광 속에서 그려진 것처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경계들로 그려져 있다. 신비함과 불분명함은 우리가 보고 있는 고갱의 얼굴이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얼굴 뒤편 금빛 배경은 주인공을 신성하게 표현하는 듯하고, 경계가 모호한 붓터치는 배경 속으로 앞의 그림도 서서히 섞여 들어갈 것만 같다. 이렇게 독특한 초상화를 그려냄으로써 르동은 자신의 벗 고갱의 삶을 진부하고 무거운 추모와는 거리가 있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으로 기억해 내고 있다.”

고갱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술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그것이 작가 자신의 바람대로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인 면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끝까지 곤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그의 생애가 고달팠던 것과 달리 온화하고 여유있는 모습 속에 금빛과 꽃잎들로 추모되고 있습니다.

상징주의 예술의 모호함을 눈감아 준다면, 일상을 떠난 먼 곳에서 그들이 찾아 헤맨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특이한 색깔과 표현에 대해서 이해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다양성은 이런 면에서도 나타납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는 누구?

서양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예술사로 전공을 돌린 안현배씨는 파리1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예술품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와 그들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와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함 때문에 외면해 오던 그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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