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내 삶은 아날로그

기자 2017. 7. 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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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식욕이 연기력이다.’

평생 일인다역으로 살아온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먹는 것에 있다는 믿음으로 몸에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 소문난 음식 가리지 않고 흡입하던 내게 제동이 걸렸다. 그동안 잘 버텨준 위가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화가 안 되고, 염증이 생기고, 위산이 올라오고, 속이 메슥거리는 증상이 3∼4년 반복되더니 물만 마셔도 아프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은 보기도 싫어졌다.

과식이 문제일까? 위의 노화 때문일까? 일에 지친 까닭인가?

식도락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 삶을 얼마나 재미없게 만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두려움과 함께, 사람들과의 식사자리를 피하며 “위가 아파서요” “소화가 안 되네요” 변명을 늘어놓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 와중에 유일한 위안은 살이 빠져 의도하지 않은 다이어트 효과를 누린 점이다.

몇 안 되는 선배 중 한 분의 생신 때 모임을 가졌다. 음식점이 아니고 떡을 전문으로 만드는 지인의 집이었다.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 앞에서 마치 죄인처럼 조금씩 맛을 보는데, 거부감도 안 느껴지고 속이 편안해지며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어떻게 만든 음식인데 위가 안 아프지?’

아무리 바빠도 약보다는 음식으로 위를 고쳐보겠노라 작심하고 그분께 음식을 배우겠다고 청을 드렸다.

첫 작품은 약식(藥食)이다. 일단 집에 있는 재료부터 사용하기로 했는데, 찹쌀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식은 사 먹은 적은 없고 가끔 먹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만들어 본다는 호기심에 새로운 연극 작품을 만나는 것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약식은 정월 대보름의 절식(節食)인데, ‘약식’ 또는 ‘약밥’이라고도 하며,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던 음식으로, 밥이 아닌 떡류에 속한다. 약식의 ‘약’자는 병을 고쳐주는 동시에 이로운 음식이라는 의미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사를 보면 신라 21대 소지왕이 왕위에 오르고 10년 되던 해의 정월 대보름날에 재앙을 미리 알려줘 목숨을 살려 준 까마귀에 대한 보은으로 이날을 까마귀 제삿날로 삼아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정월 대보름의 절식이다.

드디어 약식 만들기에 들어갔다. 먼저, 찹쌀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내 찹쌀은 좀 오래돼 누런 기름 물이 빠지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었다. 다음은 쌀을 불리는 작업이 이어진다. 최소한 5시간 정도는 불려야 한다. 아주 예쁜 하얀색으로 불면 찹쌀을 건져 물기를 뺀다.

다음은, 찜통에 젖은 면 보자기를 깔고 1시간 정도 찌는데 김이 씩씩하게 나오기 시작하면 도중에 소금물을 훌훌 끼얹은 후 나무주걱으로 위아래를 고루 뒤집으며 잘 풀어준다. 이어서 밤, 대추, 잣, 계핏가루, 진간장, 꿀, 참기름, 대추를 곤 대추고를 넣어 버무리는데 첨가물들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고루 버무려야 한다. 밥알이 무르면서도 질지 않고 고슬고슬하게 쪄야 맛있는 약식이 되는데 처음에는 센 불에서 그리고 중불에서 중탕으로 8시간 정도 쪄낸다.

여기에 신의 한 수가 있다. 요즘은 대개 설탕을 태운 캐러멜 색소로 약식의 누르스름한 색을 내는데 여기서는 대추고를 사용한 것이다, 대추고는 대추를 몇 시간 동안 푹 고아 흐물흐물한 상태에서 꽉 짜내 다시 엑기스를 2시간 넘게 고아 잼처럼 만든 것이다. 대추가 사람 몸에 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고 특히 위에 좋은 작용을 하는데 이 대추고로 색도 내고 맛도 내니 진정한 약식이 되는 것이다.

휴∼! 걸린 시간만도 15시간이 넘어 이틀에 걸쳐 만들었다. 요즘같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먹어본 어떤 약식보다도 고소하고, 속이 편하며, 건강한 맛이 나는 진정한 의미의 맛있는 약식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맛보다도 크게 마음에 와 닿는 깨달음이 생긴다. 예전엔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3년 불 때고, 3년 물 긷고, 3년 밥 짓고 하는 10년 공부법이 있었다. 배우수업도 10년은 해야 겨우 무대에 설 자격이 주어졌었다. 10년간 열성을 쏟는 중에 희망과 절망, 애정과 증오, 용기와 좌절 등이 뒤섞이고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에너지가 응축되면서 비로소 자기가 택한 길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다.

초를 다투며 모든 것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지는 디지털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런 긴 호흡의 아날로그적 의미를 갖는 모든 작업이 참 필요하고 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치일까? 이런 사치라면 얼마든지 누려도 될 성싶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지켜주는 지킴이들이 정말 고맙고 살맛 나게 한다. 요즘 ‘뮤지컬 아리랑’ 연습이 한창이다. 연극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공연예술인에겐 연습이 생명이다. 같은 대사, 같은 동작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관객과 직접, 그리고 제대로 소통하기 위한 정답을 찾는 작업을 미련하게 반복하는 과정이 난 참 좋다.

내가 긴 시간 동안 만든 약식을 긴 호흡으로 작업하는 후배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먹기 좋게 잘라 하나하나 예쁘게 포장해서 싼다. 약이 되는 음식이니 마음 놓고 먹으라고 자랑스럽게, 또 자신 있게 권하는 모습과 맛있게 음미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힘이 절로 난다. 약보다는 음식으로 위를 고치겠다는 가상한 생각을 하며 시도했던 약식 만들기로 난 역시 아날로그적 삶이 어울리는 연극인이라는 점을 인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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