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구슬픈 '새타령' 흥겨운 변신, 그것이 더 슬프다

2017. 6. 28. 09:5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든 ‘새타령’을 들어보면, 이토록 구슬픈 소리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남한의 트로트나 북한의 신민요나 오늘날의 ‘퓨전국악’에서 ‘새타령’이 흥겹고 즐거운 노래로 ‘편곡’된 까닭은?

지난주 이 지면에서 초등학교 시절 배운 동요 이야기를 했다. 시골에서 갓 서울로 전학와서는 너무나 맑고 고운 동요들을 갑자기 배우며 노래 부르던 때의 당혹스러웠던 기억을 썼는데 그 중 하나가 ‘고향땅’이다. “아카시아 흰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이렇게 끝나는 노래다.

공연 중인 고 김소희 명창(1917~1995).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 와 다시 회고해보니, 아카시아 흰꽃이나 뻐꾹새 소리가 이토록 맑고 곱게 불리는 게 의아하다. 그 흰꽃이 바람에 날리면 비릿한 내음이 났다. 숲속에서 들려오던 뻐꾹새 소리도 기괴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백과’를 보면, 뻐꾹새 즉 뻐꾸기는 슬픈 울음을 낸다. 시어머니가 잔칫집에 가서 떡국을 얻어 와서는 아들이 오면 꼭 먹이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가난한 집의 며느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떡국을 두어 숟가락 떠먹고는 부뚜막에 두었다. 그런데 누렁이 개가 이를 다 먹어치워버렸다.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저녁을 굶을 판이었다. 며느리는 개가 몰래 먹은 것이라고 하소연하였으나 시어머니는 그 말을 믿기는커녕 내내 구박을 하여 결국 며느리는 죽고 말았다.

그 넋이 뻐꾹새가 되어 숲속에서 처량하게 운다. 울음소리를 가만 들어보면 처음에는 ‘떡국, 떡국’ 하다가 끝에 가서는 ‘개개개’ 하는데 이는 며느리가 넋이 되어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이르고자 ‘떡국은 개가 먹었다’고 우는 것이라고, 한국 설화 전문가들은 풀이한다. 그런 소리를 도회지의 이쁘장한 아이들은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하고 불렀다.

그 동요의 2절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로 끝나는데, 서울로 오기 전의 나는 몇 번쯤 소를 몰아본 적 있지만, 이른바 낭만적 서사와 이미지의 전형대로 논두렁을 따라 소를 몰고 집으로 올 정도로 큰아이는 아니어서, 온전한 내 경험으로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무슨 일로 소를 팔아야 했던 일은 어렴풋이나마 기억난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소장수가 집채만한 소를 끌고 갈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먼 산을 보며 울먹거렸고 소도 평소와 달리 엉덩이를 길게 빼면서 거의 끌려가다시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여간 다시 새의 소리로 돌아오면, 80년대 노동운동과 미술운동의 경험을 가진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7년 후에 힘겹게 재회하며 겪는 고통을 그린 김형경의 소설 제목처럼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구한말의 명창 중에 이날치라고 있다. 담양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경숙(敬淑)으로 1820년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났다. ‘날치’라는 일종의 예명으로 명창 반열에 들어 72세로 세상을 떴는데 그 연유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성격이 단호하여 그렇게 불렸다는 설이고,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잽싸고 바르게 줄을 잘 탔었기에 ‘날치’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판소리 예술미학>을 쓴 이국자 교수 등의 현장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어린 이날치는 구한말에 면장까지 지낸 유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러 왔는데 훗날 ‘날치’라는 예명으로 불릴 만큼 머리가 총명하고 행동이 잽싸서 유씨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음은 물론 한자 공부며 풍수지리도 익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곳저곳을 떠도는 광대패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줄타기를 배워 아예 그 길로 나가서는 동편제 소리꾼 박만순을 수행하며 길 위의 삶을 살게 되었다. 박만순은 김세종, 진채선 등과 함께 판소리를 특별히 사랑한 흥선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이날치는 당대의 가객들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소리를 몸으로 익히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이 가객들의 맨 윗자리에 ‘국창’으로 불린 송흥록이 있다. 더불어 이날치는 좀 더 성장해서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서 호방하고 우람한 동편제 대신 지극히 구슬프고 한이 서린 서편제를 익히게 되는데, 박유전 또한 대원군의 사랑을 출입했던 명창으로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남 보성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여 보성 일대를 서편제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이날치는 ‘춘향가’와 ‘심청가’에 능통하여 그의 소리로 춘향이가 매를 맞으며 울면 청중이 다 울고 그의 소리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면 청중이 또한 다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목소리로 ‘새타령’을 부르면, 청중만이 신묘하고도 구슬픈 새의 울음에 전율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숲속의 새들이 ‘제 이름’을 부르는 줄 알고 소리하는 마당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 그 ‘새타령’은 일제 시대의 명창 이동백으로 직선으로 연결되고 만정 김소희로도 점선으로 이어진다.

슬픈 사연을 안고 죽은 넋들의 울음

지금 우리는 이날치의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일제 시대 유성기 녹음의 이동백과 김소희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두 사람의 소리를 듣다 보면, 그 원형이 되는 이날치의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가 있는데, 감히 말하건대, 이날치가 ‘새타령’을 불렀을 때 숲속의 새들이 자기 이름을 듣고는 기꺼이 날아왔으리라 생각한다.

그 새들은 앞서 풀이한 뻐꾹새가 그렇듯이, 모두들 슬픈 사연을 안고 죽은 넋들의 울음이며, 그렇기에 ‘새타령’은 지극히 슬픈 소리다. 앵무새, 비둘기, 백학, 봉황새, 풍년새, 기러기, 채련새, 서왕모, 청조새, 황새, 제비, 따오기 등이 울고 또 운다. “먼산에 앉어 우난 새는 아시랑허게 들리고 근산에 앉어 우는 새는 둔벙지게도 들린다.” 할미새가 운다. ‘묵은 콩 한 섬에 칠푼오리 허여도 오리가 없어 못 팔어먹는 저 빌어먹을 저 할미새’가 운다. 가락은 넘실거리지만 노래는 구슬프다. 두견새 울음 소리, 들어보자.

저 두견새 울음 운다. 저 두견새 울음 운다 야월공산 깊은 밤에 저 두견새 울음 운다 이 산으로 가며 귀촉도, 저 산으로 가며 귀촉도

며칠 동안 ‘퓨전 국악’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하여 이른바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나아가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로 널리 전파’하겠다는 의욕으로 창작된 ‘새타령’을 들었다. 흥겹고 신나는, 그러나 그뿐인 ‘새타령’이었다. 좋은 세상 만나서 신명나게 잘 살아왔다는 식이었다. 북한의 ‘새타령’도 들어봤고 트로트 버전도 들어봤다. 어쩌면 그렇게들 즐거운 세상인지 모르겠다.

그 모든 곡의 원형이 되는 ‘새타령’을 들어보면, 이토록 구슬픈 소리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동백 소리는 유성기 잡음이 섞여 있어 제대로 듣기 어렵다 하더라도, 만정 김소희의 ‘새타령’은 얼마든지 금세 찾아 들을 수 있다. 그 슬픈 노래를 듣다 보면 새들의 울음소리마저 예사롭게 들을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남한의 트로트나 북한의 신민요나 오늘날의 ‘퓨전국악’에서 ‘새타령’이 흥겹고 즐거운 노래로 ‘편곡’된 까닭은 좋은 세상 만나서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며 즐겁게들 잘 살고 있다고 하려면, 이 노래에 서려 있는 깊고 깊은 슬픔의 정서는 ‘국뽕’이라는 세제로 말갛게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점이 더욱 슬프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