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이후 세속화가 공화국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병한 역사학자 2017. 6. 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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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파리 : 앙시앙 레짐의 수도 <下>

[이병한 역사학자]

 

3. 파리의 우울

이번 프랑스 대선은 국가비상상태에서 열렸다. 한창 TV 토론 와중에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당일 투표도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진행되었다. 비단 그 사건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2015년 이래 프랑스는 상시적인 테러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파리는 카불만큼이나 테러가 빈번한 도시가 되었다. 하수상한 세월이, 안녕하지 못한 시국이 2년째 이어지고 있다. 파리는 여전히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도시이지만, 불안이 낭만을 잠식해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1세기는 프랑스에 전혀 호의적이지가 않다.


프랑스가 비상사태라는 점은 각종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당장 행복지수가 크게 떨어졌다. 20세기말에 견주면 20%나 하강했다. 더 이상 일상을 향유(Joie de Vivre)하는 행복의 나라가 아니다. 희희낙락, 화기애애하지 않다. 활기는 떨어지고 생기는 옅어졌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 모더니티의 수도라는 자긍심은 약해졌다. 반면으로 신경안정제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2013년 갤럽 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들로 프랑스인이 꼽혔을 정도이다. 자살률이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두 배나 높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 프렌치 라이프스타일도 옛말이다.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며 밤새 노닥거렸던 여유로운 생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 급급하다. 와인 소비는 급감했고, 문을 닫는 카페는 늘어났으며, 갓 구워낸 바게트 대신에 식빵을 찾는 소비자가 불어났다. 저성장 국면을 지나 성장 없는 사회로 진입하면서 실업률은 항상적으로 10%를 오르내린다. 공장이 떠난 교외에서는 40%에 육박하는 곳도 있다. 소득이 없으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갑을 닫는 것이다. 정작 파리에서 우아한 프렌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유람하러 온 아시아의 관광객들처럼 보였다. '19세기의 파리지앵'을 흉내 내며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다. 프랑스산 명품 시장이 유지되는 것도 극동의 큰 손 덕분일 것이다. 


민생의 곤란은 도시의 얼굴도 바꾸고 있다. 향긋한 크로아상을 구워내던 동네 빵집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다. 2000년 이래 1만6000점이 폐업했다. 반면으로 그토록 업신여겼던 미국산 패스트푸드의 상징, 맥도날드는 1만3000점이 늘어났다. 세계 정상을 자부하던 프랑스 요리마저 영 예전만 못한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 공장에서 생산된 식자재를 사용하다보니 아무래도 감칠맛이 떨어진다. 세금은 높고 노동법은 경직되어서 레스토랑 경영하기가 어렵다는 푸념도 들었다. 기본비용에서 영국이나 독일에 견주어 2배 이상이 든다는 것이다. 프렌치 셰프의 6할이 프랑스 밖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믿거나말거나 통신도 귀동냥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의 위상도 낮아지고 있다. 국제 외교무대의 보편어였고, 세련된 지성인들의 상징어였던 화려했던 시절이 저물고 있다. 2014년 EU 의장이 된 폴란드의 도널드 터스크(Donald Tusk)가 상징적이다. 프랑스어를 말하지 못하는 유럽의 첫 번째 수장이었다. 브뤼셀에서 그와 회동하는 프랑스 대표단은 꼬박꼬박 영어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UN 상임이사국이자 G7의 일원이며 유럽에서 두 번째 가는 경제대국이지만, 세계에서의 비중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내리막을 걷다가 2030년이면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전망이다. 그 자리를 인도네시아, 이란, 터키 등 이슬람 대국들이 차지할 것이다. 일국의 나랏말로 전락하는 프랑스어보다는 이슬람 문명의 보편어인 아랍어가 세계어의 위상을 (다시) 누릴 날이 머지않았다.

그래서 장래에 대한 전망 또한 대체로 어둡다. 2013년 르몽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75%가 프랑스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62%가 (그들이 뽑았을)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사르코지와 올랑드를 겪으면서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바닥을 쳤다. 2014년 사회통계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난 30대의 삶의 수준이 한 세대 전에 비하여 17% 떨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30대 가운데 자식들의 미래가 본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응답한 경우는 9%에 불과하다. 과연 2000년 이후 나라 밖에서 직장을 구한 이들의 숫자는 160만까지 치솟았다. 고학력자, 특히 박사 학위 소지자 가운데 1/4이 프랑스를 떠났다. 능력이 된다면,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헬프랑스를 등지는 탈프랑스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배낭여행으로 처음 파리를 구경하며 감탄을 그치지 못했던 것이 1999년이다. 18년 사이, 격세지감이 어마어마하다. 우뚝 솟은 저 에펠탑이 피라미드라도 되는 양 19세기의 유물처럼 어릿해 보인다.


▲ 파리. ⓒ이병한


4. "나는 샤를리이다"("Je suis Charlie") : 공화국의 적폐

프랑스의 비상시국을 촉발한 계기는 2015년 1월 시사풍자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이다. 전국에서 400만이 뛰쳐나와 "나는 샤를리이다."(Je suis Charlie)를 외쳤던 가두행진이 기억에 선명하다. 이 '공화주의의 행진'에 호응하여 SNS도 온통 삼색기로 물들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던 차, 눈을 찌르는 글 한 편을 접했다. 일본의 학술 월간지 <현대사상>에 실린 임마누엘 토드의 논설이다. 샤를리 행진을 거대한 위선이라고 비판하며 프랑스풍 집단 히스테리라고 힐난했다. 차마 그런 견해를 국내에서는 표명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되고 있다는 음울한 전망까지 보태었다. 계층/계급이나 젠더/성별보다는 종교와 인구를 주요 변수로 삼아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는 시각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샤를리 사태를 성과 속의 균형이 붕괴된 상태에서 일어난 공화국의 위기라고 접근하는 대목이 신선했다. 남아시아와 서아시아를 거치며 '탈세속화, 재영성화'라는 메가트렌드를 두 눈으로 확인해왔던 바이다. 좌/우에 성/속의 구도를 보태어 현대정치를 독해하는 방법을 연마해가고 있던 차였다. 과연 세속주의의 보루,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인가. 파리에 가면 그의 말을 직접 청해 듣고 싶었다. 


▲ 임마누엘 토드. ⓒ이병한


이병한 : 최근 3년간 프랑스보다는 일본에서 더 자주 글을 발표하고 계십니다. 저서도 여러 권 출판되었더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토드 : 2015년 샤를리 사태 당시, <일본경제신문>의 파리 특파원이 기고문을 청탁해왔습니다. 좌/우파 언론을 막론하고 일방적인 언설만 유통되던 상황에서 다른 견해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저도 답답함을 느끼던 차, 반가운 마음으로 응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예기치 않게 일본의 언론계와 출판계와 밀접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병한 : 샤를리 행진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혹평하셨습니다. 테러를 단죄하고 대처하는 것과 <샤를리 에브도>를 옹호하는 것은 하등의 관련이 없다고요?

토드 : 당시처럼 수백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프랑스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68혁명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학생들과 급진세력들이 주도한 운동이었죠. 오히려 여론의 다수는 그들에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의기투합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샤를리이다.', '나도 샤를리이다.'라며 무함마드를 풍자했던 주간지와 자신을 동일시했죠. 정부 보조금에 기대어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조그마한 언론사가 일순 성역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순식간에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 풍자의 자유를 상징하는 기관처럼 되었지요. <샤를리 에브도> 희생자에 대한 묵념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동시에 1분간 진행되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테러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처럼 보일 수 있었죠. 나아가 프랑스 국민 공동체에 대한 거부 의사로 간주되었습니다. 저는 모골이 송연했어요. '나는 샤를리이다.'와 '나는 프랑스인이다.'가 등치된 것입니다. 프랑스인이라면 응당 <샤를리 에브도>를 지지해야 한다는 이상한 등식이 생겨났습니다. 


무슬림은 이미 프랑스 국민의 1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500만을 훌쩍 넘어섰어요. 전국 평균이 그러할 뿐, 생드니(Saint-Denis)처럼 인구의 4할을 차지하는 곳도 있습니다. 대개 도심 외곽과 공단지대, 농촌에 밀집되어 있죠. 자연스레 무슬림 학생들이 현지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프랑스인이고자 한다면 무함마드를 모독하고 능욕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야 함을 국민의 의무로서 강제 받은 것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특정 종교의 성인(聖人)을 욕되게 할 권리를 가질 뿐 아니라, 의무로 삼아야 한다는 식이죠. 중세의 이단 심판과 흡사한 풍경이었고, 비시 정권 아래 파시즘과 유사한 모습이었죠. 


그런 기세에 힘입어 다시 문을 연 <샤를리 에브도>는 그 다음호 표지에서 무함마드의 얼굴을 남성의 성기처럼 길쭉하게 묘사했습니다. 머리에는 콘돔을 끼운 양 흐릿한 녹색 터번을 두르고 있었죠. 이는 19세기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업이 절정을 구가할 때나 볼 수 있었던 퇴행적인 모습입니다. 탈식민주의의 세례를 입었던 20세기 후반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저는 페니스 형상을 한 무함마드의 이미지를 표지로 삼는 시사 주간지를 성역화 한다는 것은 프랑스 현대사의 일대 전환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상 애호적이든 성상 파괴적이든, 이는 종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거든요.

이병한 : 공화국의 위기가 아니라 종교의 위기라는 말씀이신가요?

토드 : 양자가 동시에 분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두 현상은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습니다. 지방에서는 가톨릭이 사라지고, 중심에서는 세속 정부가 오작동 함으로써 사회의 해체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수세에 처한 가톨릭의 위기에 공화국의 위기가 배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주의(laicite)의 본뜻은 특정 종교의 지배 없이 모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조화 됨으로써 이슬람을 배척하는 도구가 되고 있이요. 교육 현장에서 세속주의를 강제하는 것은 무슬림의 정체성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에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도대체 어떤 공화국이 수백만이 거리로 나와서 특정 종교를 모욕하는 풍자만화를 옹호하며 소수자의 종교를 탄압할 수 있을까요?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문화적, 종교적으로도 박해하는 반동적 행위입니다. 프랑스는 부지불식간 자기반성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 비공화주의적 공화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새삼스레 환기하자면, 드레프스 사건(1894~1906)과 정교분리법 시행(1905) 직후의 제3공화국은 복합적인 문화를 구가했습니다. 도시부/중심부의 부르주아 문화와 주변부/지방의 가톨릭 문화가 공존했습니다. 새 문화와 옛 문화 간의 긴장 관계가 6:4, 7:3의 균형을 이루며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파리지엥과 독실하고 경건한 가톨릭 신자 사이에 공존체제가 가동되었죠. 이런 복합문화적 우주가 작동함으로써 유대교와 개신교, 무슬림 같은 소수자들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가 '프랑스'였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3원칙 아래 아나키스트도 가톨릭도 공산주의자도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공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직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우아한 사회였습니다. 


▲ 노트르담 대성당. ⓒ이병한



그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68혁명 이후입니다. 그 후세대들은 좌/우에 상관없이 세속화 근본주의로 치달았어요. 프랑스 문명의 뿌리인 가톨릭마저 조롱하고 비아냥거립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도 무덤덤할 뿐입니다. 영성이 고양되지가 않아요. 불과 백년 사이 유럽 중에서도 가장 비종교적인 사회가 되었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어린 문명은 오래된/늙은 문명에 견주어 경향적으로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정된 사회에서 한층 관용적인 태도가 지배적입니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도리어 획일화, 동질화가 심해집니다. 유럽의 파시즘과 나치즘, 소련의 공산주의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떠올려 보십시오. 단기간에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변용에 성공하면, 특정한 인간 유형에 대한 집중과 편향이 깊어집니다. 저는 20세기 초반 좌/우 전체주의의 출발이 이탈리아와 러시아였다는 점도 탈종교화, 세속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을 버린 로마와 정교회를 떠난 모스크바를 오늘의 파리가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병한 :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과 프랑스의 비공화주의적 성격이 강화되는 것이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토드 : 샤를리 행진은 철저하게 시민계급들이 주도한 집회입니다. 도시적이고, 세속적이며, 글로벌한 중산층들이 주역이 된 시위였습니다. 그간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상징했던 노동자 파업이나 농민 시위와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었어요. 계급은 부차적이었죠. 좀처럼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던 이들이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방의 노동자들도 교외의 청년들도 소외되었습니다. 세계화의 수혜를 입은 상층 10%가 과잉 대표되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에고이스트들이에요. 그래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관용적이기보다는 독선적이지요. 다시 말해 평등의 원칙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계몽주의보다는 왕년의 가톨릭 상층부의 행태에 더욱 가깝습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각변동은 좌이든 우이든, 중산층의 견해가 달라진 결과로 일어납니다. 마르크스는 쁘띠 부르주아를 가벼이 취급 했지만, 정작 실제 역사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쁘띠 부르주아의 선택이 결정적이었어요. 프랑스 혁명도 그러하고, 파시즘과 나치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는 또 어떻습니까. 볼셰비키야말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인텔리겐차들이 창설한 조직이지 않았습니까.

이병한 : 2000년대 초 20:80 사회라는 담론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2008년 이후에는 '99%' 운동이 일어났죠. 20:80이 아니라 1:99의 격차사회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양자 사이에 좀 더 세심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1:11:88이라고 할까요? 공론장을 장악하고 있는 10%의 '자유주의 근본주의' 세력이 88%가 아니라 1%과 연합하는 과두지배체제가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권력를 행사하며 공론장을 장악하고 있죠. 말씀을 듣고 있자니 '샤를리 히스테리' 또한 과녁을 비켜난 화살, 11%의 민낯처럼 보이는군요.

토드 : 파리와 니스 등 프랑스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테러의 범인들은 중동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가 키워낸 '프랑스인'들입니다. 이들이 갈수록 프랑스로부터 멀어지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프랑스 국민으로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르낭은 함께 살아가는 인민들의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가 공화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공화국으로부터 프랑스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장소와 유리되고 격리되어 있다는 불안한 정체성을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치유하고 있는 것이죠. 왜 IS에 투신하는 의용군 가운데 유독 프랑스 출신의 비율이 높은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즉 이슬람의 확산은 지엽말단의 증상이고 프랑스 공화정의 오작동이야말로 화근인 것입니다. 


세속화 지상주의자와의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 내에서 무슬림의 비중은 갈수록 늘어날 것입니다. 르펜의 주장처럼 이민을 규제해도 대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프랑스인 가운데 무슬림의 출산율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즉 프랑스의 장래는 실재했던 공화국의 과거, 복합문화적 우주를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백 년 전 가톨릭에 허용했던 수준으로 이슬람에 똘레랑스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면 할수록, 포용하면 하는 만큼 공화국 문화가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종교를 배타하는 세속주의자들의 획일적인 사회가 아니라. 가톨릭도 무슬림도 유대교도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시와 지구촌을 이루는 것, 그편이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Make France Great Again)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고 있지만 유대인들도 프랑스를 떠나고 있어요. 북아프리카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이었던 유대인들이 속속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인구 이동은 미래를 예지하는 풍향계 역할을 했습니다. IS의 지하드에 가담하기 위하여 시리아로 떠나는 무슬림 이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하고 있는 유대교 프랑스인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들마저 프랑스를 등지고 있는가? 제가 거듭하여 공화정의 위기야말로 사태의 근간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입니다.

이병한 : 이념보다는 종교에 기초하여 현대사회를 분석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토드 : 2014년 <프랑스의 자살>(Le Suicide Francais)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세계화, EU, 이민, 페미니즘, 이슬람 등 온갖 잘못된 원인 진단을 내리고 있지만, 증상 파악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프랑스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차마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놓았어요.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백 년 전 종교 사회학자였던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이었습니다. 19세기말 프랑스를 진단한 책이죠. 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내리고 있다며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취급하고 있을 때, 뒤르켐은 도리어 종교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왜 고등교육이 보급되고 고도성장이 이루어지는데도 자살하는 이들은 도리어 늘어나고 있는가를 심도 있게 천착했습니다. 근대사회에 만연한 의미의 상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의 부재를 예민하게 포착한 것이죠.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쳤던 전투적 계몽주의자들과 달리 뒤르켐은 해석의 지평을 상실한 현대사회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낳고 있다고 파악한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 최신의 이념들이 종교가 제공해주었던 삶의 의미를 대체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신구 사이의 방황 상태를 '아노미'라는 개념으로 짚어내었던 것입니다. 도덕적 진공 상태, 영성의 공백 상태를 말합니다. 뒤르켐의 <자살론>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를 위시로 근대문명의 임계를 예견하는 고전에 값하는 명저입니다.

▲ 파리. ⓒ이병한


5. 대안 민주주의(Reset Democracy)

샹젤리제 거리를 가득 메운 지지자들 사이로 젊은 대통령 마크롱이 등장했다. 나는 당선 연설을 뒤로하고 급히 기차역으로 향했다. 새 보금자리로 꾸린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틀이 조금 모자라게 걸리는 거리이다. 도착하자 5월 9일, 이번에는 극동의 광화문에서 새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녁 산책에 나서니, 불꽃놀이가 모스크바의 밤을 수놓는다. 5월 9일은 마침 러시아의 최대 국경일, 승전절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를 축하하는 축포처럼 보였다.


자연스레 두 나라의 대선을 견주어 보게 된다. 프랑스보다 한국의 대선이 훨씬 근사해 보였음은 비단 팔이 안으로 굽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2016-17년, 새 정치를 선보인 쪽은 서구가 아니라 동방이었다. 모자라는 지배자를 끌어내리고, 번듯한 지도자로 고쳐 세우기까지 철두철미 민간이 주도했다. 촛불이 앞에서 이끌고 정당은 뒤에서 따라가는 기특한 모양새가 수개월째 이어졌다. 80%의 견고한 집합의지=일반의지 속에서 20세기를 옥죄었던 좌와 우의 다툼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로움(利)을 쫓기보다는 의로움(義)을 추구하라 하셨던 오래된 가르침의 현현인 듯 보였다. 여/야의 대결보다는 공(公)과 사(私)의 대결, 사사로움/상스러움(俗)과 성스러움(聖)의 길항처럼 보인 것이다. 지난 겨울 이래 활활 타올랐던 촛불을 통하여 '다른 민주', '개신 민주'의 맹아를 보았노라 하면 현장감이 떨어지는 외부 관찰자의 오판일 것인가.

다만 좀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대안 민주주의(Reset Democracy)를 구현한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을 좇아가는 언설만은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서구형 민주에 고착된 이들이 쌍팔(88)년도 민주화 담론에서 훌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눈에 밟힌다. 하기에 새 생각을 촉발하고 새 언어를 장착할 수 있는 제3의 자극이 요긴해 보인다. 마침 극서의 프랑스, 극동의 한국과 더불어 중동에서도 선거가 있었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자리한 이란에서도 대선이 열린 것이다. 나는 촛불혁명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라도 구민주의 아성 파리보다는, 30년이 넘도록 신민주(=이슬람 공화정)를 실험하고 있는 테헤란을 살피는 것이 이롭다고 여기는 편이다.


내가 유별난 것만도 아니다. 나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이란혁명으로부터 '새 정치'의 영감을 얻은 철학자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이름, 미셸 푸코이다. 68혁명의 좌절을 겪으며 서구형 민주에 낙심했던 그가 말년을 활달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테헤란 거리에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테헤란 대학교의 남문으로 쭉 들어서 있는 헌책방 거리에서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푸코의 이란혁명론을 접한 것이 꼬박 1년 전이다. 그 후 줄곧 그 책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영성'을 방편으로 삼아 새 정치를 궁리해오고 있다. 이제야 그 신통방통했던 푸코와 호메이니의 심오한 앙상블을 풀어놓는다.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푸코를 쥔 채, 테헤란으로 잠시 우회한다.


▲ 파리. ⓒ이병한



이병한 역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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