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프라 전쟁 & 인류의 양심

권홍우 논설위원 2017. 5. 3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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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구호품을 들었으나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뼈만 남은 어린아이. 세계를 충격을 빠트린 이 사진이 보도된 이후 더한 참상이 카메라에 잡혔다. 앙상한 팔다리에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진 아기들. 수척만 어머니의 말라비틀어진 젖을 물고 있는 신생아의 눈에 달라붙은 파리떼···. ‘인간이 이토록 처참해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반성 속에 전쟁 종결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고 ‘국경 없는 의사회’가 생겼다. 풍부한 석유자원의 나라, 아프리카 최대의 황금 어장을 갖고 있는 나라,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참극이다.

무엇이 이런 비극을 낳았나. 외세의 부추김을 받은 종족 간 분쟁 탓이다. 갈등이 표면화하기 시작한 것은 50년 전 오늘. 1967년 5월 30일, 나이지리아 남동부 3개 주의 ‘비아프라(Biafra) 공화국’ 수립 선언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953일 동안 진행된 내전은 무수한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컸다.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반란군(비아프라 공화국)이 동원한 병력은 합쳐서 30만. 전사자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군인 3명 중의 1명이 죽었다. 어떤 전쟁보다 전사 비율이 높았다.

보다 심각한 것은 민간인 피해. 약 450만 명이 집을 잃고 약 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대부분 어린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비아프라 지역에서는 한 세대가 사라졌다. 한동안 ‘비아프라 난민 같다’는 말은 아주 마른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어쩌다 이런 참상이 빚어졌을까. 영국의 식민 지배와 종족 분열책, 자원을 둘러싼 국제적 이해 다툼 탓이다. 식민 종주국인 영국은 먼저 종교로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 영국은 이슬람과 토착 종교가 주종이던 남부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며 다른 지역과 차별화를 꾀했다.

식민지 시절, 남부의 이보(Ibo)족과 요루바(Yoruba)족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며 종주국 영국의 식민 통치를 도왔다.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하며 연합 정부를 구성했으나 이보족 등은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다. 1966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최대 종족인 하우자(Hausa)족이 역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식민지 시절부터 눌려 지냈던 하우자족은 이보족과 요루바족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촌락을 학살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보복을 다짐하던 이보족은 뜻하지 않던 기회를 얻었다.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자 국제 자본이 몰려들었다.

초반전은 비아프라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유전에 대한 이권을 노리던 프랑스의 지원 덕분이다. 하지만 전세는 곧바로 뒤집혔다. 공교롭게도 영국과 소련이 같은 배를 타 나이지리아 정부군에게 전쟁 물자와 자금을 대줬다. 영국은 옛 식민지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내전에 개입했다. 마침 소련은 이집트를 비롯한 범이슬람권에 접근하던 시기여서 이슬람 정부군을 도왔다. 여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스라엘과 남아공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세해 무기를 팔고 자금을 지원하며 전쟁의 규모가 커졌다. 인구가 많은 나이지리아를 경계하던 일부 주변 국가들은 비아프라를 정식 주권국가로 승인하고 나섰다.

비아프라 전쟁은 결국 1970년 1월 12일 비아프라군의 항복과 전투 중지 선언으로 막을 내렸지만 종전 후에도 50만 명이 더 굶어 죽었다. 백인 용병들도 대거 참전해 돈을 챙긴 이 전쟁에서 돈을 받지 않고 전쟁에 끼어든 백인들도 있었다. 비아프라 난민 구호를 위해 전장을 찾았던 의사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흑인 환자들을 돌보고 식량을 조달해 생명을 구해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71년 이들은 파리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를 결성했다. 환란 속의 빛은 또 있다. 지난 1986년 아프리카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월레 소잉카(Akinwande Oluwole Soyinka). 소잉카는 의미 없는 내전을 비판하다 2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비아프라의 비극이 발생한 지 50년.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8위의 산유국인데도 1인당 국민소득이 2,640 달러에 불과한 빈국이다. 국민의 54%는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권력도 외형적으로는 불안하다. 1년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다. 문제는 구조화했다는 점이다. 스위스 출신의 인권운동가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에 따르면 국제 석유 메이저와 군부가 짜고 빈번하게 쿠데타와 정변을 일으킨다. 자원과 권력을 영구히 독점하기 위해서다.

지글러는 서구 자본이 투자자로 위장한 현대판 ‘노예상인’들이라고 질타한다. 나이지리아 군벌의 독재도 여전하고 서방 자본은 계속 살찐다.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지금까지 고통받아야 하나. 악순환을 끊을 길은 없을까. 하긴 지구촌 전체가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문호 소잉카마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직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마당이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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