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정규직' 박사입니다

송진식 기자 2017. 5. 27. 13: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박사는 2년 근무해도 기간제법 적용 못 받아… 임시직 비율 갈수록 늘어

지난 2월 2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열린 ‘과학기술계 합리적 질서 만들기’ 행사에서 정부 출연연구원 및 대학 등 각계 소속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과학기술계 현안과 연구풍토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박은하 기자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ㄱ씨(37·여)는 벌써 10년째 비정규직의 쳇바퀴를 맴돌고 있다. 2006년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박사학위 취득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직장을 옮긴 횟수만 8번. 아직까지 2년 넘게 한 직장에 있어본 적이 없고, 때에 따라선 두세 달 단위의 초단기직으로 일한 경우도 여러 번이다.

지금 일하는 학교도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며 고용기간을 연장 중이다. 올해 말에도 그간의 업무성과 등을 평가받고 재계약을 해야 계속 머무를 수 있다. 박사학위를 가진 ㄱ씨의 경우 학교 규정상 2년 근무 후 재계약시 연봉을 올려줘야 한다. 올해가 근무 2년째인 ㄱ씨에게 비용문제를 이유로 정규직 연구원 채용을 꺼리는 대학 측이 연말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다.

ㄱ씨는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2년간 근무했지만 전망 등을 고려해 학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의 자율성도 높고 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공부였지만 석사·박사학위를 따도 크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석사를 딴 뒤에는 ‘2년 고용 후 정규직 전환’이라는 기간제법 조항에 걸려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박사가 된 후에는 기간제법 적용을 안 받는 전문직이라는 게 문제였다. 기간제법 시행령에서는 ‘기간제근로자 사용기간 제한의 예외’로 박사학위 소지자를 의사·변호사 등과 함께 기간 제약 없이 고용할 수 있는 직군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사급 인력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 없이 한 달, 1년 등 사용자 편의에 따라 마음껏 고용할 수 있다.

“고용구조 악화시킬 것” 노동계 우려
박사 등의 전문인력이 기간제법의 예외로 들어간 것은 시행령이 개정된 2010년부터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전문인력 상당수가 ‘2년 후 정규직 전환’ 조항에 걸려 근무기간 2년을 못 채우고 해고되고 있다”며 “전문인력을 예외로 넣으면 정규직 전환 부담이 없으니 2년 내 해고할 일이 적어져 고용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시행사유를 밝혔다.

하지만 결과는 “시행령 개정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전문인력의 고용구조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와 맞아떨어졌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실시하는 ‘박사조사’ 자료를 보면 2011년 재직 중이거나 취업이 된 박사 인력 중 상용직 비율은 71.6%, 임시직 비율은 14%였다. 반면 2016년 같은 조사에서는 상용직 비율이 66.2%로 줄었고, 임시직 비율은 21.8%로 늘었다. 그래서 박사급 전문인력들은 그나마 있는 ‘2년 후 정규직 전환’이라는 기간제법의 보호도, 기간제법 예외로 인한 혜택도 모두 얻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섬’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박사급 전문인력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직장 자체가 턱없이 적다. 석·박사급 전문인력 채용정보사이트인 ‘하이브레인넷’의 신규채용정보란을 보면 비정규직 연구원을 찾는 곳은 공공기관, 대학, 기업 등 직장 유형을 가리지 않는다. 조건으로 내건 채용기간도 1년 내외의 단기 고용이 대부분이고, 어쩌다 있는 정규직 자리도 채용인력이 많아야 2~3명 정도로 기회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전문인력 상당수가 학위 취득 후 주로 근무하는 대학의 경우 비정규직 고용실태가 심각하다. 2016년 박사조사에서 직장에 재직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한’ 박사 취업자 중 54.6%가 대학에 재직 중이다. 대부분이 연구나 강의를 전담하는 교직원으로 채용되거나 정부나 기업 등과 연계된 학내 산학협력단 등에서 일한다. 반면 대학알리미 사이트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국의 4년제 대학 교직원 중 비정규직 인력이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10곳 중 3곳(33.5%) 이상이다. 산학협력단 근무인력의 근속연수가 2년 미만인 대학도 전체 206개 대학 중 절반이 넘는 112개에 달한다.

정부가 출연해 만든 연구기관들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감에서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6월 기준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소속 출연 연구원 25개의 직원 총인원 1만5712명 중 비정규직은 3830명으로 전체의 24%를 차지했다. 같은 자료에서 2016년 1~6월 중 이들 출연 연구원이 신규채용한 직원(801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534명으로 무려 67%에 달한다.

박봉과 각종 차별에 시달리기도
비정규직 전문인력에 대한 급여나 처우도 낮다. 박사조사 결과를 보면 학업에 전념한 박사 취업자 중 46.8%가 연봉이 30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0만원 미만인 박사 비율도 4명 중 1명꼴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 없이 이뤄진 조사인 점을 감안하면 비정규직 전문인력의 연봉수준은 더욱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ㄱ씨만 해도 석사 취득 후 강의와 연구직 등을 병행한 지 7년째지만 아직 연봉이 3000만원 초반대다. 동일한 업무를 하고 근무시간도 같은 정규직에 비해 많게는 3배가량 적은 수준이다. ㄱ씨는 “유관성이 높은 연구실적과 경력을 가지고 취업을 해도 정규직 경력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력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전문인력 내에서도 출신대학, 해외학위 여부 등에 따라 차별이 심하다. 과거 과학기술분야의 한 출연 연구원에서 일했던 ㅇ씨는 “그나마 투명하다는 정부 출연 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원 자리도 부모나 친인척 등의 배경, 과거 지도교수와의 학연 등에 따라 채용이 좌우된다는 소문이 많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학 교수는 “전문인력이 실무를 쌓기 시작하는 ‘박사후과정(포닥)’만 봐도 같은 값이면 국내보다는 해외학위 소지자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며 “일부러 해외에서 포닥을 하는 ‘스펙’을 쌓고 유턴하는 전문인력도 상당수”라고 밝혔다.

여성 전문인력의 경우 더 많은 차별과 수모를 겪는다. 지난해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유승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7월 기준 정부 출연 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인력 중 남성은 9385명으로 87.5%인 데 비해, 여성은 1344명(12.5%)으로 적었다. 반대로 비정규직 비율은 여성 연구인력이 50.5%로 남성(20.5%)보다 훨씬 많았다. 직장 내에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겪는 경우도 빈번하다. ㄱ씨는 “정규직인 남성 상사로부터 일상적인 반말과 신체접촉을 당하기 일쑤고, 회식자리에서의 포옹 등 불쾌한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상급자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희롱 발언을 해서 기겁한 적도 많다”고 밝혔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조국을 등지고 해외로 떠나는 인재들도 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015년 이공계 인력의 국내외 유출입 수지와 실태’ 보고서 집계를 보면 외국에서 취업해 한국을 떠난 박사학위의 이공계 기술인력 수는 2013년 기준 8931명으로, 2006년(5396명)에 비해 65.5%나 증가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이 매년 발간하는 ‘세계인재보고서’에서 조사대상 국가 61개국 중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지난해 46위로 바닥권이다. 두뇌유출지수가 낮을수록 해외로 빠져나가는 인재가 많다는 뜻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송창용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박사급 전문인력에 대한 적절한 고급인력 정책의 수립, 교육환경의 파악, 교육 투자의 효율성 제고 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