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이력서-르포] 공공근로 현장의 백발

이남의 기자 2017. 4. 26.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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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숫자는 계속 증가하는데 웬만한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젊은이들마저 AI(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시대다. 정부는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자하지만 빨라지는 고령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머니S>는 창간 10주년 ‘노후빈곤, 길을 찾다’ 4번째 시리즈를 통해 청년의 가족이자 우리의 내일인 노인의 삶과 일자리의 현실을 살펴보고 ‘노인 일자리 선진국’이 되기 위한 과제와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편집자주>

“강아지가 방문을 심하게 긁어서 구멍이 났는데 문을 교체하지 않고 긁힌 부분만 고칠 수 있을까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7일 고령화 친화기업 핸디맨서비스에 전화벨이 울렸다. 연식이 오래된 집에 사는 노부부가 문을 저렴하게 고칠 수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이날 오전 기자는 나이가 지긋한 핸디맨 2명과 공구를 들고 송파구 A아파트를 찾았다. 방 2개의 문이 심하게 긁혀 구멍이 난 상태였다.

젊은 시절 토목현장에서 일했던 핸디맨 박진만씨(가명·68)와 김중복씨(가명·66)가 능숙한 솜씨로 문이 긁힌 곳에 사포질을 하고 탄산칼슘분말, 돌가루, 산화아연 등을 개어서 만든 건축용 접합제 핸디코트(퍼티)를 발랐다.

몇분 후 핸디코트가 마르자 문 색깔과 동일한 친환경 페인트를 칠했다. 구멍이 난 부분은 우레탄폼을 주입하는 총으로 내부를 채워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페인트를 덧칠하는 작업을 마치니 문은 새것처럼 말끔해졌다.

페인트가 마르는 동안 두 핸디맨은 노부부가 요청한 형광등 갈기, 덜컹거리는 베란다 화분거치대 조이기 작업도 진행했다. 흔히 아파트관리소 직원에게 요청할 만한 욕조 막힘 문제에도 팔을 걷었다.

욕조에 길다란 철사를 넣어 머리카락과 오물을 빼내는 단순 작업이지만 노부부에겐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준 것이다. 물론 문을 고치는 시공비와 출장비를 제외한 서비스는 무료다.

두 핸디맨은 시공비로 6만원을 받았다. 재료비와 출장비를 포함해서다. 일반 인테리어업체에 의뢰하면 문을 통째로 교체하고 전문인력 출장비용까지 20만원이 든다.

핸디맨서비스는 고령자친화기업으로 이익실현보다 노인의 일자리 만들기가 주목적이다. 따라서 저렴한 비용으로 노년층이 할 수 있는 단순한 인테리어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노인 정비공이다 보니 꼼꼼한 작업이 요구되는 부분에선 정확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노인 부부의 살림 곳곳을 고쳐주는 손길은 여느 젊은 정비공보다 더 프로페셔널했다.

“문이 갈라지거나 틈이 벌어지는 결함은 조금만 고치면 되니까 선뜻 인테리어 공사를 맡기기 어렵잖아요. 깨끗이 수리하고 다른 부분도 고쳐주면 나이 드신 분이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저희도 즐겁죠.”(박진만씨)

문수리 작업. /사진제공=핸디맨서비스
사무실 칸막이 설치 작업. /사진제공=핸디맨서비스

◆경로당에 등장한 ‘노란조끼’ 해결사

오후에는 송파구에 위치한 B경로당을 찾았다. 이 경로당은 핸디맨이 월 1회 들르는 곳이다. 핸디맨서비스가 송파여성문화회관 노인쉼터에 위치한 덕분에 송파구 지역 노인들과 자주 만난다. 지역 노인들과 대화하다 보니 이들이 머무는 경로당 20여곳이 주거래처가 됐다.

핸디맨이 경로당에서 수리·보수하는 비용은 2만원 내외다. 일반기업이나 가정에서 수리를 요청하면 출장비 3만원을 받지만 노인시설에는 2만원만 받는다.

이날은 방충망이 문제였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날파리, 모기가 많아졌는데 방충망에 구멍이 뚫렸다. 두 핸디맨은 방충망틀을 떼어내 철물점에서 구입한 새 방충망으로 교체했다. 방충망 한 타래(50m)의 비용은 2000원. 조각조각 잘라서 경로당 곳곳의 방충망을 수리하니 올 여름은 거뜬히 날 것 같다.

이번에는 화장실로 갔다. 경로당에서 행사를 했는데 누군가 먹고 남은 음식물을 버려서 변기가 막혔다. 핸디맨은 가져온 압축기로 변기를 뚫고 세면대에서 떨어진 비누받침대도 단단히 고정했다. 핸디맨들은 경로당을 나오면서 “밤에는 보일러 버튼을 외출에서 온돌로 바꾸세요”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실 핸디맨들도 몇년 후면 경로당의 노인들과 비슷한 나이가 된다. 하지만 노란 작업조끼를 입고 역동적으로 일하는 얼굴에선 액티브시니어의 활기가 느껴진다.

“경로당은 가전제품 사용이 서툰 노인들이 많아 오작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젊은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사용법을 알려주면 노인들의 생활이 훨씬 편해집니다.”(김중복씨)

커피전문점 배수관 교체 작업. /사진제공=핸디맨서비스

◆커피전문점 배수관 교체까지 사업확대

노인들이 일하는 핸디맨서비스는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 3억원을 지원받아 문을 연 곳이다. 60세 이상 고령자를 근로자의 70%까지 고용해야 하는 창업조건으로 평균연령 69세, 직원 29명이 약 130만원의 월급을 받고 근무한다.

송파구에서 시작한 핸디맨서비스는 동작지점으로 확대됐다. 동작지점에는 동작구 고령자 11명이 핸디맨으로 일한다.

한상만 동작구 핸디맨 팀장(68)은 “우리는 나이가 많아도 정규직으로 일하고 월급, 4대 보험, 퇴직금까지 받기 때문에 업계에서 ‘노인공무원’으로 불린다”며 일반 회사처럼 근속연수에 따라 연차도 쓰고 피곤하거나 힘들 때는 쉴 수도 있어 노인에게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핸디맨서비스는 할리스커피, 디초콜렛커피 등과 제휴를 맺었다. 이 업체 매장에서 화장실 타일결함, 배수관 막힘 등 수리할 일이 생기면 바로 해결해준다.

수리비용은 일반 인테리어업체보다 훨씬 저렴하다. 전문업체의 경우 일당 25만원이지만 핸디맨은 시간당 5만원으로 책정돼 간단한 수리를 맡기기 적합하다.

다음날 오전 할리스커피 C지점을 찾은 핸디맨은 커피찌꺼기로 막힌 배수관을 시원하게 뚫었다. 보통 싱크대나 커피 로스팅머신에 연결된 배관으로 커피가루가 쌓이는데 가게 안에서 배수관을 뚫기 어려울 때는 가게 앞 도로의 배수관을 열어 스프링형태의 뚫기 전용장비로 찌꺼기를 밀어낸다.

한승훈 핸디맨서비스 대표는 “핸디맨은 노인이 일하면서 노인을 돕는 노-노케어서비스”라며 “최근에는 인테리어기술과 노하우를 인정받으면서 일반 인테리어공사까지 영역을 넓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낡고 부서져 기능을 상실한 장롱서랍이 핸디맨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많은 고령자가 새롭게 일할 수 있도록 고령화친화기업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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